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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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역에 내려 라면과 소주를 샀다.

민석은 신림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살았다.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산을 오르듯 가야 했다.

3층 벽돌집 옥탑방에 민석이 있었다. 당장 무너질 것 같은 철제 계단을 오르자 그가 사는 공간이 나왔다.

하늘과 맞닿은 곳이었다. 난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냐? 이 썩은 내는. 야, 백민석. 당장 일어나.”

노숙자가 사는 집 같았다. 집안 곳곳에서 역한 악취가 났다. 난 집안에 있는 옷이며 이불을 바깥에 있는 빨래 걸이로 가져갔다. 세탁도 청소도 안 한 지 오래된 것 같았다.

그는 이때도 게임 폐인으로 살았다. 겉으론 아무 이상 없는 듯 보였지만, 속으론 이미 곪아가고 있던 것이다.

민석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너 지금이 몇 신 줄 알아? 씻고 정신 차려.”

그에게 수건을 던지며 말했다. 그가 씻는 사이에 라면을 끓였다. 간만에 끓이는 라면이었다. 그와 옥상에서 라면을 먹었던 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너 보고 싶어서.”

그를 보자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사회인이 됐을 때는 나 역시 힘들었다. 누군가를 챙겨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민석의 상태를 알았다고 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밥이나 먹고 이야기하자.”

집 밖에 작은 평상이 있었다. 민석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난 막 끓인 라면을 그에게 대령했다.

집까지 올라오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경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서울이 발밑에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민석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뭐라도 먹고 난 뒤에 말을 붙일 생각이었다. 냄비를 다 비우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집은 힘들어서 다신 오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아주 오래전에.”

“그렇게 오래됐나?”

“백만 년은 됐지 아마.”

“미안하다.”

마음이 아팠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학 생활 내내 난 바빴다. 공모전 준비와 스펙 쌓기로 눈코 뜰 새 없었다. 그 정도는 해줘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겼다.

난 소주를 잔에 따랐다. 민석은 술잔을 받으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너 나에게 할 말 있구나?”

“귀신이네.”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 그도 내 눈을 살피며 한잔 마셨다.

“김덕명이 뜸을 들일 때가 다 있네.”

“너 나랑 고향에 내려가자.”

“고향?”

따지고 보면 그의 고향은 서울이었다. 하지만 유년 시절의 대부분은 하동에서 보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난 뒤, 외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는 종종 자신의 고향은 하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촌구석에 내려가서 뭐하게?”

그는 술잔을 들이키며 물었다.

“시골에서 나랑 같이 농사짓자.”

“농사?”

당황한 말투였지만, 묘하게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하동 명물 대봉감으로 곶감을 만들려 보려고.”

“곶감?”

난 녀석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곶감 명인 황유신에게 기술을 전수받은 사실도 빠짐없이 말했다.

“넌 뭘 할지 알겠는데. 나는 가서 뭐하냐?”

“넌 할 일이 따로 있지.”

민석의 표정이 진지했다. 난 차분하게 사이트를 만들 계획을 이야기했다.

곶감뿐만 아니라 다양한 농산품을 팔 사이트라고 말하자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계획은 훌륭한데. 질문이 하나 있네?”

“말해? 뭐든.”

“나에게 그런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지? 왜 나랑 하려는 거지?”

민석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물을 만하기도 했다. 아무리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였지만, 대학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보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함께 일하자고 말하는 게 이상할 만도 했다.

“솔직하게 말할게.”

난 술잔을 부딪치고 한잔했다.

“살다 보니 고향 친구만 한 게 없더라. 나 지금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해.”

“고향 친구가 거절하겠다면?”

그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나 부자 농부가 될 생각이야. 너도 부자로 만들어 줄게.”

“부자 농부!”

민석은 그 말에 크게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유쾌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뭐지?”

“네가 취업 생각이 없다는 거 잘 알아. 그래서 지금까지 프리랜서로 일하는 거고. 나와 함께 하면 너에게 자유를 줄 수 있어.”

“자유?”

“도시에서 벗어날 자유와 돈에서 해방될 자유.”

민석은 내 말을 듣고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난 녀석이 죽은 후에 그가 일기처럼 썼던 블로그 글을 발견했다. 미처 지우지 못한 글들이 유서처럼 남겨져 있었다.

민석은 반복해서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글을 썼다. 하지만 그에겐 돌아갈 고향도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외가엔 이제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를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모든 걸 정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도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혼자 힘으로 등록금을 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학자금 대출금이 남아 있었다.

그는 대출금을 다 갚고 목숨을 끊었다.

“넌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잖아. 농사와 관련한 모든 건 내가 책임질 테니. 넌 사이트만 운영해줘.”

“사이트만?”

“넌 사이트만 맡아주면 돼. 그리고 도시를 벗어나는 게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서울은 너와 맞지 않으니까.”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그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디자인은 못해.”

“걱정 마. 그 부분은 내가 맡을 테니까.”

대행사 시절, 디자이너가 펑크를 내면 내가 대신하곤 했다. 실제로 그와 일할 때도 모든 리소스를 내가 디자인 했다.

“가볍게 생각해. 고향에 내려가서 좋은 공기 마시며 쉰다고.”

“그 말은 마음에 든다.”

“그럼 승낙한 거다.”

“아직 승낙까진 아닌데.”

“가보고 마음에 안 들면 돌아와도 돼.”

“그럼 한 번 해보지.”

“좋아. 그럼 당장 내일 내려간다.”

“그렇게 빨리?”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우린 마지막 잔을 기분 좋게 마시고 평상에 대자로 누웠다. 민석은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난 정신이 말똥했다. 이불을 꺼내와 그에게 덮어주었다.

민석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유서처럼 남겨진 글을 읽고,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이해가 갔다. 결론은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었지만, 그 이면엔 말 못할 외로움이 있었다.

서울에선 누구도 그의 외로움을 달래 주지 못했다. 도시만 벗어나도 그의 마음이 달라질 것 같았다.

다음 날, 우린 해장국을 먹고 터미널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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