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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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은 서리가 내리는 계절에 단 한 번 만들 수 있다.

추석에 나오는 곶감은 설날에 팔다 남은 것들이다.

우린 일주일 동안 감을 따고, 깎고, 널고, 다시 떼기를 반복했다.

일주일이 지났건만, 7년 동안 곶감 농사를 지은 느낌이었다.

일주일 동안 색다른 변화도 있었다. 가희는 황정아 여사와 가까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들끼리 통하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나와 황유신 선생의 관계는 처음과 그대로였다. 물론 대하는 태도와 말투가 조금 더 살가워진 건 사실이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황유신이 나와 가희를 불렀다. 웬일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이제 발효액을 만드는 비법을 알려주겠네.”

그는 일주일 내내 발효액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민감한 부분이라 우리도 잠자코 있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스승과 제자

황유신은 술상에 있는 곶감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법을 알려주기 전에 하나 묻지.”

곶감에 하얀 가루가 덮여있었다. 그만의 노하우로 3년간 숙성한 곶감이었다.

“곶감 말고도 감을 가공하면 반건시와 감말랭이를 만들 수 있지. 세 가지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게 뭘까?”

난 반건시를 선택했고, 가희는 곶감을 골랐다.

“각자 이유를 말해 볼까.”

황유신은 손자 손녀에게 묻듯 자상하게 말했다.

“곶감의 쫀득한 맛이 좋아요. 하얗게 올라온 시분은 꿀보다 더 달고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단맛 때문인지 가끔 생각나기도 해요.”

가희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덕명이도 말해 봐라.”

“반건시는 곶감에 비해 수분이 많아 먹을 때 부드럽죠. 노인과 아이들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고요. 전 그 부드러운 맛이 좋습니다. 가장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는 상품인 점도 좋고요.”

“각자 취향과 이유가 분명하구나.”

황유신은 상에 있던 곶감을 하나 들었다.

“나에게 곶감은 유일한 겨울 간식거리였지. 난 곶감, 반건시, 감말랭이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내가 곶감을 만들게 된 건, 할머니가 만들어 주던 그 맛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어. 하지만 사람들이 처음부터 내가 만든 곶감을 좋아했던 건 아니야.”

“왜죠?”

가희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에 내놓은 곶감은 탄 것처럼 색이 검었다.

“색과 모양이 좋지 않았어. 사람들이 원하는 곶감이 아니었지.”

지금 그가 만드는 곶감은 색이 곱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제 사람들은 곶감을 추억과 맛으로 소비하지 않아. 그저 명절날 차례상에 올리는 물건으로만 치부하지. 그래서 맛보다는 때깔이 좋은 물건을 찾게 되는 거고.”

“선생님은 천연의 방법으로 맛과 때깔을 살릴 방법을 찾으신 거고요.”

난 황유신의 눈을 보며 말했다. 회상에 잠긴 눈이었다.

“시행착오 끝에 방법을 찾았지. 오늘 너희들에게 그 방법을 알려줄 거야.”

농사도 작은 차이에 따라 명인이 될 수 있다. 황유신은 자신이 바라던 맛과 사람들이 원하는 모양을 찾았다.

그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린 그를 쫓아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안에 항아리가 즐비했다. 항아리마다 메모들이 붙어 있었다.

날짜와 발효액을 만들었던 재료와 비율들이 적혀 있었다.

낡은 창고처럼 보이지만, 명인의 비밀 연구소였다.

“이건 올해 쓸 물건들이야.”

그는 항아리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법을 듣고 나면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원래 비밀이란 건, 알고 나면 싱거운 법이니까.”

그가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민트처럼 화한 기운이 느껴졌다.

“솔잎, 지칭개, 매실액을 넣고 한 달간 발효하면 발효액이 되지.”

“솔잎이 방부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지칭개는 뭔가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황유신은 내 얼굴을 힐끔 보며 말했다.

“산야초야. 겨울에도 나는 놈들이지. 항산화 효과가 있어서 산화를 막아주지.”

“모두 생명력이 강한 식물들이네요.”

“식물의 강한 생명력이 곶감과 만나서 고운 빛을 유지시켜 주는 거야.”

솔잎과 지칭개 그리고 매실액을 이용한 발효액이 유황 처리를 하지 않고도 좋은 곶감을 만드는 비결이었다.

* * *

다음날부터 우리는 산을 올랐다. 발효액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직접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나와 가희는 솔잎과 지칭개를 땄다. 산삼을 찾아 산을 오르는 심마니가 된 것 같았다.

채취한 솔잎과 지칭개는 깨끗하게 세척한 후에 양파망에 담았다.

매실액은 황유신 선생이 직접 담근 원액을 사용했다.

솔잎과 지칭개는 일대일이었고, 매실액은 0.8이었다.

그 비율로 항아리에 넣고 한 달간 발효해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발효액을 담은 항아리가 창고에 가득 찼다.

더 담을 항아리도 없어지자 황유신이 우리를 불렀다.

그는 발효액 대신 밀랍을 녹여 사용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밀랍은 벌집을 녹여 만든다는 천연 물질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발효액보다 더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했다. 문제는 원하는 만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대안으로 매실 발효액을 만들었고, 지금의 발효액이 나왔다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 교육이었다.

말이 끝나자 황유신은 우리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나머진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 할 거야.”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데.”

가희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속성 수업은 여기서 끝이다.”

“가르침 잘 받았습니다.”

난 스승에게 큰절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껴두었던 말을 그에게 꺼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뭐지?”

“저희 집에 함께 가주십시오.”

“너의 집에?”

난 집을 나오며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황유신 선생을 집으로 모시고 오겠다고 했던 약속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대봉감으로도 최상급 곶감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걸 꼭 가서 말해야겠냐?”

황유신 선생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예상은 했었다. 상주에서 하동까지 거리도 그렇고, 보기보다 낯을 가리는 그의 성격도 거절할 요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그와 함께 고향으로 가고 싶었다.

가장 큰 이유는 약속보다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 때문이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그와 사제 간의 연을 맺었다.

그 뒤로는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다.

귀한 시간을 내서 우리를 가르치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지.”

황유신이 거절을 하고 나가려는 찰나였다. 가희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선생님.”

“넌 또 왜?”

“이렇게 헤어지면 섭섭하죠. 같이 가세요. 제가 모시고 갔다가 모셔다드릴게요.”

황유신은 가희에 애교에 약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남자의 유일한 약점이기도 했다. 손녀 같은 여자의 말을 쉽게 외면하지 못했다.

“네가 운전을 한다고?”

“그럼요. 저희 집도 한 번 가보셔야죠.”

가희는 코알라처럼 황유신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가 황유신 선생에게 물귀신처럼 달라붙어 있는 건 이유가 있었다.

나와 이미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산으로 솔잎과 약초를 캐러 다닐 때 그녀에게 부탁했다.

황유신의 평소 성격이라면 거부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힘을 빌려야 했다. 다만 거저는 아니었다.

그녀는 소원카드를 쓰길 바랐다. 내가 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 게 내심 불편했던 모양이다.

난 깨끗하게 소원카드를 사용했다.

다만 실패할 경우 소원카드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였다.

정가희의 필사적인 부탁에 황유신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결국, 승낙을 얻어내고 말았다.

그녀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손가락으로 황정아 여사를 가리켰다. 황정아 여사도 함께 갔으면 했기 때문이다.

가희뿐만 아니라 나도 적극적으로 설득했지만, 그녀는 끝내 거절했다. 둘 다 집을 비울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황유신 선생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음날 우린 하동으로 출발했다.

“안전벨트 매세요. 선생님. 하동으로 출발합니다.”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황유신 선생도 생각보다 즐거워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여행을 가는 할아버지 같았다.

표정도 평소와 달리 상냥했다. 몸과 마음이 말랑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평소라면 묻지 않을 질문도 했다.

“가희는 대학에서 뭘 전공했나?”

“국문학 전공했어요.”

“국문학도라… 가희도 농사를 지을 생각인가?”

“아직 정확하게 진로를 정하진 못했어요.”

“그럼 뭘 하고 싶은 거지?”

그녀가 침묵했다. 황유신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덕명이 넌, 뭘 전공했지?”

“전 광고홍보를 전공했습니다.”

“광고홍보라. 너와 묘하게 어울리는 느낌이구나.”

“말이 나온 김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또 부탁이냐?”

황유신은 몸서리치며 말했다.

“제 전공을 물으셨잖아요. 사소하지만 중요한 부탁이기도 해서요.”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말해라.”

“선생님 이름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을?”

“제가 만든 상품에 선생님의 이름을 넣고 싶어서요. 황유신의 제자가 만든 곶감이다. 뭐 이런 느낌이죠.”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하동의 명물 대봉감과 곶감 장인 황유신의 콜라보였다.

물론 그가 직접 만들진 않았지만, 그의 제자라는 이름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예인이 아니고서야 광고에 사람 이름이 쓰이는 경우가 없었다. 인플루언서보다 오피니언리더라는 타이틀이 익숙한 시절이었다.

황유신은 내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가희야 들었니?”

황유신은 운전하는 가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뭘요? 선생님.”

“덕명이 머리 굴리는 소리 말이다. 이놈은 부자가 되겠구나.”

황유신 선생은 호탕하게 웃으며 허락했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작은 숙제였다. 기꺼이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운전대를 잡고 있는 가희가 마음에 걸렸다.

돌이켜보니 그녀는 나와 달리 가방끈이 길었다. 학부생인 나와 달리 그녀는 대학원도 졸업했다.

과거의 기억대로라면 그녀는 딱히 직업을 갖지 않았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살았다.

부자가 돼서 집을 갖고 싶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가볍게 넘어갔지만,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것만 같았다.

기회가 되면 그녀에게 다시 묻기로 했다.

우린 하동 톨게이트를 지났다.

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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