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축사를 나와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오랜만에 밟는 고향 땅이었다. 자주 올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에 그리던 곳이기도 했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지리산을 품에 안은 마을은 여유롭고 넉넉해 보였다. 집마다 감나무가 익어가고 있었다.
하동의 특산물 대봉감이다.
길을 걷던 중에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야. 김덕명.”
“어. 정가희.”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다. 과수원집 셋째 딸.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고, 동네 친구로 친하게 지냈다.
나의 첫사랑이었다. 고백까지 했다가 차인 아픈 기억도 있었다.
그 후로 우린 서먹한 사이로 지냈다.
시간을 역행하니 이런 기막힌 일도 생긴다.
“잘 지내?”
“나야, 잘 지내지.”
“다음에 또 보자.”
예전 같았다면 여기서 대화는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손에 든 거 뭐야?”
“이거 자두.”
“맛 좀 볼 수 있을까?”
“좋아.”
그녀도 기분 좋게 응했다. 우린 함께 계곡으로 내려갔다. 산바람과 흐르는 물소리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깨끗이 씻은 자두를 내밀었다.
“먹어봐.”
난 자두를 한입에 쏙 넣었다. 달콤한 기운이 입에서 몸으로 퍼졌다. 먹는 동시에 그녀에게 고백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였다. 그녀는 친구로 지내고 싶다며 불편해했다. 그 뒤로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어리고 경험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때 한 말 아직 유효하지?”
“무슨 말?”
그녀는 놀란 듯 날 바라봤다.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말.”
“언젠 친구 아니었어?”
“미안하다.”
“뭐가?”
“그동안 아는 척도 안 하고 옹졸하게 굴어서.”
“알면 됐어.”
난 잠시 흐르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쫓아 한곳을 응시했다.
“나 서울에 안 올라가. 고향에서 농사지으려고.”
그녀는 내 말을 가만히 들었다. 시선은 투명한 물에 고정돼 있었다.
“너도 가지 마라.”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눈빛이었다.
“놀래긴. 이 동네에 친구라곤 너뿐이잖아.”
“그건 그렇지.”
“너라도 없으면 너무 심심하잖아.”
가희는 고개를 돌려 계곡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민할 때면 손가락을 가만히 안 두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은 작은 차돌을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나처럼 결혼해 실패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연달아 고배를 마셨다.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삶의 굴곡도 많았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은 나도 고민하고 있었어. 당장 올라갈까 아니면 좀 더 있다 갈까 하고.”
“어떻게 할 작정이야?”
“아직은 미정이야. 너 하는 거 봐서 결정할까 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오래전 친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녀와 숲을 거닐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함께 있으니 철없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