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이면 아버지는 축사에서 소를 돌봤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밥통에 사료를 쏟고 있었다.
“제가 할게요.”
“놔둬라. 내가 할 테니.”
내가 사료 자루를 잡자 아버지는 이상하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기운이 넘쳐서 그랬나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갑자기 효자 노릇을 하려니 나도 어색했다. 우선 아버지를 쫓으며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아버지는 축사를 돌며 사료를 줬다. 암소들에게는 약초를 넣은 사료를 줬다. 건강한 새끼를 낳으라는 바람이었다.
축사에 소가 수십 마리나 있었다.
한우 사업을 시작할 때, 아버지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무리하게 가공 설비까지 한 것도 성공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한우 사업 이전에 실패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모두 아버지가 감당할 수준의 일이었다. 빚을 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그게 성공의 바탕이 됐던 것이다.
지금은 반대로 가고 있었다. 이미 감당한 수준을 넘어섰다. 곧 태풍이 불어 닥칠 날도 멀지 않았다.
이미 아버지도 위기를 느끼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료를 다 준 뒤 아버지는 냉수 한 잔을 들이켰다. 그는 물을 마시고 나를 슬쩍 흘겨보았다.
“너 돈 필요하냐?”
아버지는 무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주실 수 있으세요?”
역시 짐작이 맞았다는 표정으로 지갑을 꺼냈다.
“아침부터 이상하더니 돈 때문에 그랬구나. 얼마면 되냐?”
“2억이요.”
농담이었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2억이 있으면 급한 불부터 끌 수 있었다. 내 마음을 모르는 아버지는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이십 만원이면 되겠냐?”
난 그 돈을 아버지의 지갑에 다시 넣어드렸다.
“왜? 돈 필요한 거 아니었어?”
“돈은 필요 없어요. 진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진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계획이에요.”
농사라는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이 농부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아들도 농부가 되길 바랐다.
평소의 그의 바란 대로라면 좋아서 춤이라도 춰야 했다.
지금은 반응이 사늘했다.
“넌 도시로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냐?”
“생각이 달라졌어요. 아버지 말대로 농촌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구나.”
“빚 때문에 그러시죠?”
“감당할 수 있는 정도다. 당장 망할 수준도 아니고.”
아버지는 최대한 축소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망한다는 말을 꺼냈다는 건, 이미 망했다는 소리였다.
“5개월 안에 2억 갚아야 하잖아요. 이거 못 막으면 우리 농장 다 넘어가고요.”
“네가 그걸 어떻게?”
그렇게 놀란 얼굴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조만간에 솟값이 똥값이 될 거라는 사실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죄인이 된 사람 같았다. 시장 개방과 사룟값 폭등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난 말을 아꼈다.
우선 확실히 해 둬야 할 게 있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찾을 생각이에요. 나름대로 계획한 것도 있고요.”
“정말 그럴 생각이냐?”
“단단히 각오한 일이에요. 저도 돈을 벌어서 빚을 갚는 데 보탬이 될게요. 아버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일이잖아요.”
아버지는 즉답을 피하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는 슬픈 눈빛으로 소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리해주겠다면 나도 좋다.”
“어머니와도 함께 상의하면 좋겠어요.”
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작은 고비를 넘겼다. 어머니도 충격을 받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가족회의는 저녁에 해요.”
그 말을 남기고 축사를 빠져나갈 때였다.
“덕명아.”
아버지가 날 쫓아왔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난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고맙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남자 대 남자로 하는 말이었다.
“부자 농부가 될 생각이에요. 지켜봐 주세요.”
아버지가 기분 좋게 웃었다. 얼마 만에 보는 미소인지 모르겠다.
과거로 돌아온 순간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를 위로하고 힘을 보태는 일이었다.
빚은 돈을 벌어 갚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 번 잃은 건강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머릿속의 혈관이 터진 건 깊은 절망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난 아버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