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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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시침이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지로 가기로 한 시간은 아침 7시였다.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장례식장이 아니었다.

난 시골집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뒤꼍에 감나무까지 우리 집이 확실했다.

“젊은 놈이 늦잠은.”

아버지가 평소처럼 잔소리를 했다. 난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아버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부자간에 처음으로 하는 포옹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아버지는 당황스러운 듯 몸을 슬금슬금 피했다. 그제야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온기와 감촉이 진짜 같았다.

난 거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았다. 피부가 팽팽했다. 머리카락도 윤기가 흘렀다. 젊어져 있었다.

당장 달력을 확인했다. 2006년 9월이었다. 코스모스 졸업을 하고 잠시 시골집에 내려왔던 때였다.

내 나이 27살. 정확하게 15년 전이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난 현실감을 찾으려고 애썼다.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섯 달 후면 아버지가 만든 농업법인이 완전히 풍비박산 난다.

거액의 채무는 가족의 몫으로 돌아왔고, 우리 집은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졌다.

그 뒤로 우리 가족은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

“밥 먹어라. 덕명아.”

엄마의 부름에 식탁으로 달려갔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밥만 한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엄마표 밥상이었다. 좋아하는 돌솥비빔밥이 나왔다.

밥을 비벼 먹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아버지의 농업법인이 부도가 난 후로 부자간의 관계는 깨졌다. 난 아버지의 무능이 집안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농업에 관련한 기사를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아버지는 시장개방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게 문제였다.

아버지는 압류가 들어오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숨겼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었지만 그땐 정말 싫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구직활동을 했다. 그때 찾은 직장이 광고 대행사였다.

다시 광고주들의 뒤나 빨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서울에서 돈을 버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마음이 달랐다.

내가 고향을 떠난 후로 집안에 우환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고향에서 돈을 벌 방법을 찾고 싶었다.

때마침 온라인의 태동기였다.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사고파는 게 익숙해진 시점이었다.

나에게는 백화점 식품관에 들어간 농산물부터 온갖 상품을 판 경험이 있었다.

‘부자 농부가 된다.’

그 생각하자 고향에 있는 특산품이 하나 떠올랐다. 하동의 명물 대봉감이다.

생감이 아니라 가공을 한 곶감이었다. 아직 누구도 대봉감으로 곶감을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하던 때였다.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가족이 뭉친 날

부자지간에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밭을 일구고, 새참으로 짜장면을 먹었던 추억도 있었다.

최소한 아버지가 쫄딱 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버지는 시골 출신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유년 시설을 도시에서 보낸 분이셨다.

과거의 일을 물으며 대답을 피하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도시를 싫어했다. 도시 빈민의 삶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친구들이 학교에 다닐 때, 공장에서 일한 아픈 기억도 있었다.

그에게 시골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특히 지리산을 품에 안은 하동은 산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점찍어 둔 장소이기도 했다.

“병묵이 이번에도 성공했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볼 때마다 했던 말이다. 정말이지 하는 일마다 잘 되긴 했다. 작은 텃밭에서 시작한 양상추부터 대봉감까지 손을 대는 작물마다 돈이 됐다.

그 덕에 나도 큰 부족함 없이 자랐다. 아버지는 시골 사람들이 부자가 돼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농부들이 잘살아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그만의 철학이었다.

마침내 아버지는 부자 농부가 되기 위해 모험을 강행했다. 지리산 한우 사업, 그것은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한우 사업은 초기자본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대출로 부족한 자금을 개인들에게 빌리기도 했다. 농업 법인을 만들며 가공업에 손을 댄 게 화근이었다.

시장개방과 사룟값 폭등이 맞물려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문제는 남겨진 거액의 빚이었다.

그동안 쌓인 빚을 전부 다 합치면 5억이 넘었다.

압류딱지가 붙고, 빚쟁이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때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도 틀어져 버렸다. 그 뒤로 평생을 나와 아버지의 중계자로 산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는지 짐작도 할 수도 없다.

중요한 건, 문제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겨울이 끝나고 꽃샘추위가 매서웠던 봄이었다.

빚에 허덕이던 부모님은 비닐하우스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뇌혈관이 터져 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말년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병원비를 아끼다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원망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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