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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화 유렌 록스 그리고 박성우 (완) (241/241)

241화 유렌 록스 그리고 박성우 (완)

“선택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럭스는 씁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엔 아쉬움과 안도가 함께 담겨 있었다.

“무슨 선택을 말씀하시는 거죠?”

“이곳에서 유렌 록스로 살아가실지, 원래 세계의 박성우로 돌아가실지를 선택해주세요.”

“...”

사실 럭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그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되물었을 뿐이다.

“유렌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럭스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혼란스러운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움브라가 했던 방법을 따라 이 세계의 끝에 가서, 당신의 세계를 엿보고 왔어요.”

“그럼 갈 수 있습니까?”

“힘을 모으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보내 드릴 수 있어요.”

럭스의 말을 듣자 반가운 느낌도 들었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도 들었다. 지금까지 잊고 있던 현대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 듯이 흘러들어왔다.

“역시 유렌님은 다른 세계에서 오셨군요.”

렐리아가 잔잔힌 미소를 지었다.

-유렌 록스가 이 세계의 인물이 아니라고? 그래서 강했던 거였군. 네가 이세계의 인물이었다면 내가 이겻...으헉!

까부는 녹용의 아니, 기린의 머리를 쥐어박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

“고민되시겠군요.”

“언젠간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 시간이 다가오니, 쉽게 결정을 할 수가 없군요.”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렐리아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현실 세계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이 세계를 떠날 수도 없었다. 두 세계 중 하나를 선택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제가 미리 움브라를 막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뇨. 이 세계에 와서 얻은 건 말로 할 수 없이 많습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처음에 망나니인 유렌 록스의 몸에서 눈을 떠 아린을 만났을 때의 기억이 났다.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 날 믿고 따르는 기사단장이 되었다.

독을 풀어 나를 죽이려 들었던 페루는 내 무공을 전수받아 당가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나와의 약혼을 취소하려 했던 일리아는 진심으로 날 사랑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생활하며 정말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 많은 고생을 했지만, 얻은 것은 그 이상으로 많았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혹시 이 세계와 제 세계를 왕래 할 수는 없습니까?”

럭스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답도 필요 없이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해요. 굉장히 많은 힘이 필요하고, 양쪽 세계와 파장이 맞아야 하고...음?”

말을 하던 럭스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 것 같다.

“잠시 실례 좀 할 게요.”

럭스가 내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에서 화사한 빛이 반짝였다.

“파장이...”

“네?”

“유렌님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파장이 달랐어요. 그래서 혼이 조금 떠 있던 거죠.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시며 세계와 파장이 일치하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네. 이동에 필요한 힘만 수용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다시 돌아오실 수도 있어요!”

럭스의 긍정적인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양 세계를 왕래할 수 있다니, 최고의 결과다.

“다만 처음에 말씀드렸던 힘이 부족해요. 갈 땐 제 힘을 지원해드려도 돌아올 땐 힘들어요.”

“어느 정도여야 하죠?”

“유렌님이 움브라와 싸울 때 도달했던 경지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생사경인가...”

죽음과 삶을 초월한 생사경에 올라야 양 세계를 왕래 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힘들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직 생사경에 도달했을 때의 감각이 남아있고, 꾸준히 수련을 해왔다.

“할 수 있으신가요?”

“해야죠. 해내겠습니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후후, 그렇게 대답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럭스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유렌님을 보내드리기 위해 저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럭스는 더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것을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럼 수련은 이곳에서 하시는 게 어떨까요?”

“렐리아님?”

“요정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거든요.”

“정말입니까?”

“여기의 열흘이 밖에서 하루에요.”

“허...”

요정계는 조용하고 기도 풍부한데, 시간까지 느리다면 최고의 수련 장소였다.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

팍!

검은색 비수가 날아가 과녁의 중앙에 꽂혔다. 그 뒤로 날아간 9개의 비수도 같은 과녁에 박혔다.

“보았나?”

“보았습니다!”

검은 무복을 입은 페루의 말에 그의 뒤에 있는 수련생들이 목청 터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수련생들의 무복에는 사천당문이라 적혀 있었다.

“이게 직사다. 모두 차례에 맞춰 비수를 날려보도록.”

“알겠습니다!”

수련생들이 한 명씩 나와서 과녁을 향해 비수를 던졌다. 비수는 엉망진창으로 날아갔지만, 직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강한 힘이 실려있었다.

“너희가 배우는 암기술은 대륙을 구한 영웅 유렌 록스 공작님의 기술이다. 한 번을 사용해도 온 정신을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수련생들에게서 귀청을 떨어뜨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청하나만큼은 모두 장군감이었다.

수련생들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다시 비수를 던졌다. 여전히 어설펐지만 아까보단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젠 스승이 다됐군.”

유렌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엔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스승님.”

유렌은 만날 수 없는 당천위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당문도 세우고, 재능 있는 자들을 당가의 무인으로 만들었다.

유렌은 근엄한 표정을 짓는 페루를 웃으며 지켜보다가 옆에 있는 연무장으로 갔다.

“좀 더 빠르게 움직이도록!”

“좀 더 빠르게!”

아린의 지시에 따라 기사들이 검을 세운 채로 돌격했다.

“아린.”

아린은 더 이상 감정이 없는 차가운 여기사가 아니었다. 부하들의 감정을 느끼고 그에 맞춰 배려를 해주는 훌륭한 단장이 되었다. 이제 아린이 없으면 기사단은 돌아가지 않는다.

“크라이드, 브리카.”

크라이드는 돌격대장의 역할을 해서 모두를 이끌었고, 브리카는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들을 함께 끌고 갔다. 둘 역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렌은 기사들의 수련을 보다가 망치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쩡!

쩌정!

유렌은 힘차면서도 규칙적인 망치소리가 나오는 공방에서 걸음을 멈췄다.

“역시 그대로군.”

유렌은 기라녹스를 보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성실하고 처음과 끝이 똑같은 인물이 바로 기라녹스였다. 기라녹스 덕분에 이긴 싸움도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고마운 녀석이다.

쩡!

기라녹스의 망치 소리를 즐기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유렌이 다음으로 간 곳은 엘루나였다. 움브라와의 전쟁이 끝난 뒤 엘루나는 문호를 열어 다른 나라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로디엔은 족장이 되어, 부족의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엘루나를 이끌고 있었다.

“자 이게 광땡이야! 따라해 봐.”

“광땡!”

유렌은 로디엔이 엘프들에게 섯다를 가르치며 행복해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오칼로 향했다.

“이제 괜찮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성녀님.”

“아니에요. 건강하셔야 해요.”

이레아는 오늘도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본인이 은혜를 베풀고도 더 즐거워하고 있었다. 역시 성녀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유렌은 여신과도 같은 이레아에게 감탄을 느끼고 록스의 저택으로 갔다.

“서류가 부실하다.”

“이정도도 안 됩니까?”

“부족해. 너 그 정도 일도 처리 못하면 네 형이 관리자격 안 줄 거다.”

“으, 알겠습니다.”

콜린은 카렌스 영지의 관리를 맡게 되었기 때문에 록스 후작에게 영주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기사 때와 달리 꽤나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저 녀석도 정말 많이 변했지.”

유렌은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에게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들려야 할 곳으로 향했다.

“일리아.”

유렌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일리아의 방이었다. 다른 곳과 다르게 그는 일리아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가는 거야?”

“그래.”

“못 돌아올 수도 있다며.”

“돌아올 거야.”

“안 가면 안 돼?”

일리아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약속할게. 꼭 다시 돌아올 거야.”

“마음대로 해!”

일리아가 획 돌아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유렌의 일리아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아...”

일리아는 유렌의 눈을 보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유렌은 일리아의 손과 허리를 부드럽게 잡은 뒤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에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꼭 돌아올게.”

유렌은 키스를 마치고, 일리아에게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안 오면 찾아가서 죽여 버릴 거야.”

“그래. 꼭.”

유렌은 일리아와 밤새 대화를 나눈 뒤 요정의 숲으로 이동했다.

“준비 되셨나요?”

“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럭스는 더욱 많은 힘을 되찾아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유렌은 럭스의 부드러운 빛에 몸을 맡겼다. 그가 빛 속으로 들어갈 때 작은 그림자가 그를 따라 들어갔다.

“빽!”

**

“작가님. 정말 이렇게 하실 겁니까?”

“네.”

앞에 있는 카라멜 마끼야또를 마시며 편집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이런 작품 안 팔려요. 환생도, 회귀도 없는 무협이라니, 거기다 사천당가? 무협에선 대부분 적으로 나오는 가문이잖아요. 비주류 중에 비주류에요.”

“그래도 이대로 낼 겁니다.”

“주인공 이름도 당천위보단 좋은 게 있을 텐데...”

“그 이름밖에 없습니다.”

편집자의 말에도 내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이 무협은 그렇다 치고 이미 완성된 소설은 왜 바꾸려고 하시는 거죠?”

“주인공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요.”

“이 정도면 나름 해피엔딩 아닌 가요?”

“그것보다 더 좋게 끝을 내주고 싶어요. 자아를 찾고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에휴, 알겠습니다.”

편집자는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숨을 쉬면서도,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빽!”

갑작스러운 소리에 편집자가 내 옆을 쳐다봤다. 그 소리는 빽빽이가 쿠키를 쪼아 먹으며 기쁨의 환호를 지르는 소리였다.

“그거 뱁새 아닌가요?”

“흰머리 오목눈이에요.”

“아아, 키우시는 거?”

“키운다고 해야 하나. 지가 따라다닌다고 해야 하나.”

피식 웃으며 빽빽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편집자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말씀하신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다음엔 제 부탁도 좀 들어주세요.”

“물론입니다.”

편집자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왔다. 말을 하면 들어주는 사람이니, 이제 소설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돌아온 지 벌써 1년이나 됐나.”

현실로 돌아온 뒤 바로 가족을 찾아갔다. 가지고 있는 보석들로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지원해드렸다. 두 분이 나를 보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셨던 건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부모님과 한 달 정도 시간을 보낸 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당천위를 위해서 무협소설을 썼고, 라시드를 위해서 소설의 끝을 수정했다.

현실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모두 이뤘으니, 이제 돌아갈 때가 왔다.

촤아아앙!

생사경에 오른 내력과 럭스의 힘을 연결해 현실과 대륙을 연결하는 차원의 문을 만들었다.

“돌아가자.”

“빽!”

**

록스 후작령의 바닷가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꺄륵!”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서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경국지색의 미녀에게 걸어갔다.

“아이고 우리 딸!”

“꺄아...”

보라색 머리카락의 미녀, 일리아는 자신의 딸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아이를 꼭 껴안았다.

“우리 딸 너무 귀엽지 않아?”

“에델린도 귀엽고, 너도 귀여워.”

난 얼굴에 화색이 돈 얼굴로 방긋 웃었다. 일리아는 마주 미소를 짓고서 나와 그녀의 딸 에델린을 쓰다듬었다.

나와 일리아는 조용한 바닷가를 걸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함께 걷기만 해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제 수련은 안 할 거야?”

“수련?”

“그래. 생사경인가 뭔가 뒤에 뭐가가 있다며.”

“그래. 그랬지.”

생사경에 도달하면 무공의 끝을 본다고 생각했지만, 그 다음 단계도 있었다. 무협소설에서 무공에 끝이 없다는 소리가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더 강해지고 싶지 않아?”

“강해져서 뭐해. 세계정복 할 것도 아니고.”

피식 웃으며 잔잔한 바다를 보았다.

“이제 무공은 딱히 필요 없어. 네가 있고 에델렌이 있잖아.”

“얼씨구, 말은 잘해요. 맨날 싸돌아다니면서.”

일리아가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날 흘깃 봤지만 기분이 좋은지, 뺨이 붉어지는 건 숨길 수 없었다.

“하하하!”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일리아와 에델린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써내려간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이제 누군가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 될 거다.

언제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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