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구원자 (10)
“후...”
너무 많은 힘을 단번에 쏟아서 그런지 엘릭서를 먹었는데도 아직 두통이 남아있다.
두통을 때문에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라시드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에 내력을 넣어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으음...”
“괜찮나?”
“괜찮소. 나쁘지 않은 기분이오.”
라시드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일어났다. 포메라가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
“친구. 괜찮나?”
“조금 머리가 아플 뿐이야. 친구.”
“너희 무슨 꽁트하는 거냐? 왜 매번 뒤에 친구라고 붙이는 거야.”
“빽!”
라시드와 포메라는 서로에게 꼭 친구라는 말을 붙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기게 만드는 신기한 놈들이다.
“라시드. 수고했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오.”
라시드는 포메라와 함께 꾸준히 마나명상을 해왔다. 그 덕분에 움브라의 정신 공격을 버틸 수 있었던 거다.
“유렌. 당신이 말했던 대로 모든 것이 끝난 거요?”
“그래. 끝났다.”
“그럼 내 역할도 끝난 것이오?”
“...그래. 네 역할도 끝이 났지.”
라시드는 나를 지그시 올려보았다. 나도 그를 마주 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죽을 건가?”
라시드는 예전에 모든 일이 끝나면 스스로 죽겠다고 했었다. 지금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궁금했다.
“주인. 뭐 그리 냉정하게 말하는 거요.”
“빽!”
빽빽이와 포메라는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라시드의 곁에 가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저 놈이 한 말이거든.”
“맞아. 내가 그랬지.”
라시드가 비틀 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호흡을 고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생각이 바뀌었소.”
“어떻게 바뀌었지?”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다만 죽음으로 죄를 갚지 않고, 살아가며 죄를 갚고 싶소.”
라시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명상을 하며 무엇이 정말 옳은 것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라시드는 처음부터 움브라에게 납치당했다. 움브라가 정신을 지배하는데 아무 능력도 없는 라시드가 어떻게 버티겠는가. 하지만 그는 계속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라시드이기 때문에 그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날 죽일 거요?”
라시드의 말에 포메라와 빽빽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난 라시드를 쳐다보며 비수를 들어올렸다.
“주, 주인?”
“빽?”
포메라와 빽빽이가 막기 전에 라시드를 향해 비수를 던졌다.
피익!
비수가 라시드의 볼을 스치며, 그의 뒤편에 박혔다.
“선물이다. 항상 그것을 가지고 다니며, 네 잘못을 되새기도록.”
라시드는 볼에서 흐르는 피도 닦지 않고, 내가 던진 비수를 주웠다. 그 비수는 보통 비수가 아니다. 단 하나 뿐인 신살의 비수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소.”
“믿어보지.”
라시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여러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포메라. 라시드를 잘 챙겨줘.”
“그는 내 친구니, 당연히 그럴 거요. 라시드와 함께 세상을 돌면서 주인보다 더 많은 선행을 베풀겠소.”
“그래. 열심히 해봐.”
라시드의 곁에 포메라가 붙어 있으면 안심이다. 서로를 배려하며 잘 지낼 것이다.
“정말 끝났군.”
한 달 동안 하늘 전체를 가리고 있던 어둠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찬란한 태양이 세상에 내리 쬐고 있었다.
“빽!”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빽빽이가 내 어깨위로 올라왔다.
[유렌님.]
“럭스.”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한 동안 찾아뵙지 못하겠네요. 너무 많은 것이 망가졌어요.]
“그렇겠죠. 제 일은 끝났는데, 당신은 이제 시작이군요.”
[후후, 나중에 찾아뵐게요.]
럭스의 말이 끝나자, 태양이 강렬하게 반짝였다. 그녀와 빽빽이의 연결이 끊겼다.
“빽!”
빽빽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이제 집에 가자.”
**
깊은 숲을 나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는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내가 이기길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유, 유렌?”
“유렌님!”
일리아와 아린이 가장 먼저 날 발견하고 바로 달려왔다. 그 뒤로 이레아와 로디엔도 뛰어왔다.
“윽!”
네 명의 여자가 동시에 내게 달려들어서 날 껴안았다.
“이, 이제 끝난 건가요?”
“그래. 다 끝났어.”
아린의 질문에 대답해주마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흐윽...”
“유렌!”
아린만이 아니다. 일리아와 이레아도 나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에 긴장이 풀린 것이다.
“이제 괜찮아.”
이들도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 떨리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끝낸 건가?”
내 뒤로 카이젤이 와 있었다.
“그래.”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군. 수고 많았다.”
카이젤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녀석도 계속 내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정말 난리가 났군.”
“그렇지.”
카이젤의 말대로 내가 나온 공간은 폐허 그 자체였다. 복구가 되려면 아마 수백 년은 걸릴 거다.
“우와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양손을 들어 올리고 환호를 내질렀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움브라 때문에 느꼈던 죽음의 공포가 풀려 이제 살았다는 실감이 난 것이다.
“살았다! 살았어!”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우와아아아!”
“유렌 록스 만세!”
다양한 함성을 내지르던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듣고 전부 한 마음이 돼서 내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유렌 록스! 유렌 록스!”
“유렌 록스 만세!”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앞으로 나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유렌님! 믿고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꼭 이기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렌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르고, 함성을 질러서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부 내게 환호와 찬사를 보낸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일리아와 아린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로디엔과 이레아는 아직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페루는 나를 자랑스럽게 쳐다봤고, 후라켄 공작과 사이온 후작은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대들과의 약속은 지켰다! 전쟁은 끝났다!”
“우와아아아아아!”
“유렌! 유렌! 유렌!”
“우리가 이겼다!”
모두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목이 터져서 함성을 지르고, 내 이름을 목 놓아 부르짖었다.
이 날 난 세계의 구원자가 되었다.
**
전쟁이 끝나고 한 달 간 조의의 시간을 보낸 뒤 왕궁으로 불려왔다.
“유렌 록스 후작에게 공작의 위를 내리고, 비어있는 카렌스 영지와 위빈턴 영지를 하사한다.”
국왕이 얼굴 만면에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공작의 위와 영지의 소유권을 내려 주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를 숙여서 국왕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미 이 땅은 없어졌을 걸세! 안 그런가?”
“맞습니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와아아아아!”
나와 국왕 옆에 줄을 지어 서 있는 귀족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왕자와 그의 파벌이 몰락하면서 현재 크라시스의 귀족들은 날 신처럼 받들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귀족들도 후라켄 공작이나 사이온 후작처럼 나와 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같은 마음으로 함성을 질러주었다.
“유렌 록스 공작에게 박수와 환호를!”
“우와아아아아!”
“축하드립니다!”
귀족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뿌렸다.
“감사합니다.”
모두에게 손을 흔들면서 환하게 웃음을 짓자, 귀족들이 더욱 큰 환호를 보내 주었다.
“유렌 록스 공작.”
“예. 폐하!”
“이 대륙의 모두를 대신해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네.”
국왕이 내 정면에 자리를 잡았다. 귀족들도 자신의 위치에 일렬로 정렬했다.
“이 세계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고맙습니다!”
미리 준비를 했었는지 국왕이 고개를 숙이자, 이 장소에 있는 모두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 장소에 있는 모두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와 모든 종족이 내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속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그대로 느꼈다.
“일어나세요.”
내 말을 들은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난 그들에게 웃어주었다.
“제게 감사하다고 하는 것만큼 저도 여러분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 말에 귀족들의 얼굴에 활짝 핀 미소들이 지어졌다. 역시 유렌 록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기쁘고 좋은 날이오. 지금부터 파티를 시작하겠소!”
국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쪽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라시스만이 아니라, 지금부터 전 대륙에서 축제가 열릴 거다.
펑!
퍼어엉!
성 밖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렌 공작. 두 영지를 잘 부탁하네.”
내가 추가로 받은 영지는 둘 다 백작령이다. 가이린를 포함하면 크라시스의 그 누구보다도 넓은 땅을 가지게 되었다.
“록스 영지까지 관리하려면 힘들겠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버지도 은퇴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곧 영지 4개를 관리하게 생겼다. 그래도 유능한 부하들이 많고, 사천상회로 돈을 굴리면 되니, 관리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믿고 있네.”
국왕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유렌님!”
“반갑습니다!”
“전에 뵈었죠. 이오칼의 할리엔 백작입니다.”
“공작님. 전 아인스 제국의...”
국왕이 물러나자마자, 내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이 파티장에 있는 모든 귀족이 단 번에 몰려든 것 같았다.
난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모두 받아 주었다.
**
움브라가 죽고, 전쟁이 끝난 후 1년이 지났다. 대륙에 평화가 찾아오고 모두에게 일상이 돌아왔다.
나도 세 영지를 운영하며 나름 바쁘게 지내고 있을 때 꿈에 럭스가 나와서 요정의 숲으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바로 요정의 숲으로 향했다.
-으윽, 유렌 록스.
“빽!”
오랜만에 날 본 기린이 움찔 거리고 뒤로 물러났다. 기린은 빽빽이에게도 기를 펴지 못했다.
“오늘은 널 패러 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날 팬다고? 내가 옛날과 같다고 생각하면...
“오랜만에 한 판 할까? 서열 정리 좀 해줘?”
-그, 오늘은 내가 컨디션이 별로라...
내가 똑바로 쳐다보자, 기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피식 웃고 열려있는 요정계로 들어갔다. 기린은 찡얼거리며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후후, 여전하시네요.”
요정여왕 렐리아가 방긋 웃으며 나를 맞이해주었다.
“렐리아님. 도움을 받았는데 찾아오는 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바쁘신 거 잘 알고 있어요.”
렐리아가 상큼하게 웃어주었다. 언제 봐도 순수한 의미만이 담겨 있는 미소다.
“제가 라시드를 만날 걸 예측하고 계셨나요?”
“사실 정확하게 보이진 않아요.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었죠.”
“그렇군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라시드를 살리는 데는 렐리아의 도움이 정말 컸다. 그녀가 여섯 잎 클로버를 주지 않았다면 라시드는 완전히 죽고 움브라의 거죽이 되었을 거다.
“그냥 오신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럭스 아시죠?”
“네. 알고 있어요.”
“그 분이 저를 이곳으로...”
파아아앗!
요정계에 환한 태양빛이 내려왔다. 오로라처럼 일렁거리던 황금빛 아래에 럭스가 나타났다.
“빽!”
“럭스님!”
-허억!
렐리아나 기린은 럭스가 나타날 줄 생각도 몰랐는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오랜만이에요. 유렌님.”
1년하고도 한 달 만에 본 럭스는 많이 변해 있었다. 몸에서 선명한 황금빛을 발하는 것을 보니, 많은 힘을 되찾은 것 같았다.
“이 요정계가 제가 나타나기 가장 쉬운 곳이라 이곳으로 불렀어요.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제 애완동물도 봐서 좋았어요.”
그 말을 하며 기린의 뿔을 만졌다. 기린은 이를 악물었지만 얻어맞을까봐 반항은 하지 못했다.
“오래 걸렸죠?”
“아뇨. 1년 정도야 뭐.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거죠?”
“이제 힘이 모였어요.”
럭스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태양 그 자체가 웃는 것 같았다.
“유렌. 선택을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