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구원자 (9)
“아...”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 어둠을 지워버리자,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대체 저기 뭐가 있어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공포는 더욱 심해졌다. 저 깊은 숲에 있는 게 뭔지 예상되질 않았다. 악마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일리아님.”
이레아가 비틀 거리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숲 안쪽에서 나오는 지독하고 끈적거리는 마기에 몸이 떨리는 것이다.
“일리아님. 성녀님.”
둘이 불안한 눈빛으로 유렌이 있는 곳을 보고 있을 때 아린이 흑철기사단과 함께 나타났다.
그 뒤로 로디엔과 엘프들, 페루와 카이젤이 뒤따라 왔다.
“으음...”
“가, 갈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깊은 숲의 코앞에서 들어가질 못하고 있었다. 안에서 나오는 마기가 너무 지독해 단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모르겠어요. 여기서 한 발도 나아갈 수 없어요.”
로디엔와 이레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깊은 숲을 쳐다보았다. 그 안에서 싸우고 있을 유렌이 걱정되는 것이다.
“괜찮아요.”
“그래.”
아린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고, 일리아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지는 싸움은 하지 않으세요. 적이 누구든 끝까지 싸워서 이기실 거예요.”
“맞아. 걔가 언제 지는 거 봤어? 상대가 누구든 신나게 패고 올 거야.”
일리아가 아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둘의 말에 용기를 가질 때 였다.
[우오오오오!]
숲의 안에서 거대한 포효가 모두를 휩쓸었다.
“뭐, 뭐야...”
“이게 대체...”
“으허헉...”
포효들 들은 사람들이 다시 주저앉았다. 무력이 약한 사람들은 아예 기절해서 쓰러졌다.
“끄으윽...”
“허억!”
포효는 지옥에서 올라온 사자의 외침 같았다. 듣는 것만으로 전신에 힘이 빠지고, 공포에 질려 손 끝 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크윽...”
“유렌!”
마스터인 후라켄 공작과 사이온 후작도 포효를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절망 어린 눈빛으로 숲을 쳐다보았다. 유렌이 아무리 강해도 저 절대적인 마를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카이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말이 되질 않았다. 세상에 저런 존재가 있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렌이 저런 경계를 벗어난 괴물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저런 게 세상에 나오면 인간, 몬스터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이 멸망할 거다. 그야 말로 종말이다.”
볼카누이스가 이를 갈면서 숲을 노려보았다. 할 수만 있었다면 올라가서 브레스라도 쏘고 싶었지만, 방해만 될 거다. 자신의 검을 익힌 인간을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으윽!”
일리아는 당장이라도 엎드리고 싶은 몸의 외침을 이겨내고 숲 앞에 섰다.
“유렌. 제발!”
**
콰아아아아!
신살의 힘을 담은 만천화우가 움브라가 만들어낸 마기의 구슬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캬갸갸갸걍!
움브라를 감싸던 마기의 구슬이 조각나서 깨져버리고,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움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놈에게서 전해지는 느낌은 좀 전까지와 천지차이로 달랐다.
“뭐지...”
신살의 기운을 품은 광화가 몸에 박혔는데도 움브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놈의 몸에 흐르는 마기가 신살의 광화를 밀어내고 있었다.
저벅.
깨진 마기의 구슬을 밟으며 움브라가 걸어 나왔다.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꺼지는 것 같았다.
“눈이...”
움브라의 눈자위는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눈알은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흑백이 역전된 놈의 눈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저 존재는 좀 전까지 나와 싸워왔던 움브라가 아니다. 움브라의 껍질을 입은 다른 무언가다.
“제기랄!”
움브라가 광기로 미쳐 날뛰는 악(惡)이었다면 저건 그냥 악이다. 다른 어떤 단어도 들어가지 않는 순수하고 진정한 악이었다.
저벅.
움브라가 한 발 앞으로 걷자, 놈이 밟고 있던 땅이 아예 사라져버렸다. 지우개로 지우듯 말 그대로 사라졌다.
“미친...”
저건 파괴가 아니라, 삭제 그 자체다. 저 놈은 이 세계를 삭제하고 있었다.
스윽.
움브라가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놈의 손에서 한 줄기 검은 선이 나오더니 앞과 옆에 있던 폐허들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세상이 지워지고 있었다.
파아앙!
연위결을 사용해서 내 뒤에 떠 있던 열 개의 비수를 날렸다.
스으윽.
움브라가 손을 들어 올려서 검은 줄기를 뽑아내자, 비수가 사라져버렸다. 막고, 뚫는 게 아니라, 그냥 사라지니,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샤아악.
움브라가 손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놈의 손끝에서 검은 줄기가 나와 당천위에게 날아갔다.
“유렌. 막지마라! 무조건 피해라!”
당천위의 다급한 음성에 고개를 끄덕이고 어둠의 줄기를 피했다. 검은 선은 내가 서 있던 땅을 아예 없애버렸다.
“크윽!”
전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와 달리 제약이 있는 당천위는 놈의 어둠을 완전히 피해내지 못했다. 그의 왼쪽다리가 지워졌다.
“젠장!”
급히 연위결을 사용해서 당천위를 잡아끌었다. 왼쪽 다리는 잃었지만 다른 곳은 무사했다.
“대, 대체 저건 뭐냐. 이런 말도 안 되는!”
“모르겠습니다. 아까 그 놈과는 완전 다른 놈입니다.”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났다. 움브라는 나를 쫓기보다 자신의 주변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나나 당천위를 죽이기보다, 이 세상을 지워버리는 것이 저 놈의 목적인 것 같았다.
“빽.”
“어?”
마나 폭풍에 휘말렸던 빽빽이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유렌님.]
빽빽이에게서 럭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럭스?”
[벨로아를 통해서 유렌님께 제 말을 전하고 있어요.]
빽빽이가 뭔가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럭스의 지시였던 모양이다.
“대체 저게 뭡니까! 움브라가 맞긴 한 겁니까?”
[움브라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를 흡수해서 세계를 지워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정신도 달라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움브라는 딱 한줄기의 혼만 남기고, 모든 정신을 파괴로 채웠어요. 세상을 모두 지워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정신이 단순하다고 해도 싸울 수가 없습니다. 접근이 불가능해요.”
움브라에게 자아가 없다고 해도 놈은 가까이 오는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이대론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이 아이 덕에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네?”
[당신의 정령수는 특별해요. 이 아이를 통해 세계수를 연결해 세상에 퍼져있는 제 힘을 보내드릴게요.]
“빽!”
빽빽이의 기똥찬 울음과 함께 순수한 자연의 기운이 내 몸으로 밀려들어왔다. 자연의 기운은 자석이라도 된 것처럼 내 몸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세계수의 뿌리에서 얻은 모든 기운을 당신에게 전하고 있어요.]
자연의 기운이 끝도 없이 내 몸에 몰려들어서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만약 내 몸 전체가 단전화 되지 않았다면 진작에 터져버렸을 거다. 다만 이 힘이 있어도 저 움브라를 어떻게 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도 전해주마.”
“네?”
당천위가 내 손을 잡았다. 분신이 사라지더니, 그가 다시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암왕님?”
-괜찮다. 받아들여라.
당천위의 부드러운 말이 끝나자, 그의 막대한 내력과 깨달음이 동시에 전해졌다. 그가 전해주었던 두 번의 전투경험이 하나로 뭉쳐서 새로운 깨달음이 내 무리에 녹아들었다.
새로운 무공의 경지 속에서 럭스가 전해준 자연의 기운과 나와 당천위가 쌓은 만독자전신기가 미친 듯이 회전했다.
치이이잉!
두 기운의 강렬한 회전은 하나의 원을 만들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마지막인 일원(一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의 힘이 내 안에서 만들어졌다.
번쩍!
그 순간 내 머릿속을 막고 있던 어떤 벽이 터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거대해 평생가도 깨지 못할 산이 무너졌다.
[만독자전신기가 극성에 이르렀습니다.]
[일시적으로 생사경(生死境)에 도달하셨습니다.]
무공의 마지막 경지라는 생사경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스스로 얻은 힘이 아니다.
아주 잠시 혹은 찰나의 순간에만 도달 한 경지다. 지금 이 신과 같은 능력을 가졌을 때 끝을 내야한다.
지금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힘도 끌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몸에 시리도록 선명한 태양의 빛이 서렸다. 나의 기와 자연의 기다. 모든 것이 묶인 하나의 힘이다.
저벅.
움브라를 정면으로 보았다. 놈은 이미 깊은 숲의 절반을 지워버렸다. 놈에게서 퍼져나가는 기운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제 보이는군.”
움브라의 검은 선이 어떻게 세상을 지워버리는지 이제야 보이고 있었다.
사아악.
움브라가 나를 노리고 보낸 검은 기운에 비수를 던졌다.
파아악!
내 기운이 담긴 비수는 움브라의 검은 기운을 꿰뚫어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비수에 담겨 있는 내력의 격이 달라졌고 움브라가 가진 기운의 허점을 노렸기 때문이다.
기기기긱.
움브라의 목이 틀어졌다. 이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게 끝이다.”
머리 위로 두 개의 천판과 귀왕살을 띄우고 양손으로 흑왕검을 잡았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기를 네 개의 무기에 나누어 보냈다.
쿠구구구.
움브라가 실처럼 내뿜던 검은 기운을 원처럼 뭉쳤다. 이곳을 단숨에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쿠와아아아!
움브라의 검은 구슬이 부풀기 시작했다. 흡사 검은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저게 이 땅에 내려오는 순간 이 공간 자체가 사라질 거다. 하지만...
“상관없어.”
앞으로 달려가며 두 개의 천판을 개화시켰다. 귀왕살엔 뇌기를 뭉쳐 광뢰를 사용했다.
“만천화우 광화!”
두 개의 만천화우와 광뢰를 전력으로 사용하면서 놈을 향해 달렸다. 내 몸은 광뢰와 비슷한 속도로 움브라에게 쇄도했다.
“천마.”
제왕검의 마지막 초식 천마를 사용했다. 하늘의 의지가 흑왕검에 휘몰아쳤다.
두 개의 만천화우 광화와 광뢰, 제왕검의 천마.
내 모든 것을 담은 마지막 공격이다.
쿠구구구.
내 힘과 움브라의 마기가 격돌하며 대지가 녹아내렸고, 공간이 찢어졌다. 천공에 구멍이 뚫려 암흑이 휘몰아쳤다.
찌지지직!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추는 빛과 모든 것을 잠재우는 어둠이 격돌했다.
빛이 어둠을 찢어발기고, 어둠이 빛을 씹어 삼켰다.
모든 것이 지워지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
-허어억...
움브라는 자신의 모든 것이 지워지기 직전 정시에 남겨놓은 한 줄기 혼을 빼낼 수 있었다.
-제기랄! 유렌 록스!
모든 힘을 잃었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유렌에게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놈의 뼈를 잘근잘근 씹어버리고 싶었다.
-아니야. 힘은 다시 모으면 돼. 분명 근처에 있어.
움브라는 숲의 주변을 날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찾았다.
움브라가 찾은 사람은 라시드였다. 한때 자신의 그릇이 될 만큼 파장이 잘 맞는 몸이다. 놈의 몸에 숨으면 유렌 조차 찾지 못할 것이다.
스으윽.
움브라는 라시드의 영혼으로 파고들었다.
“흐윽!”
라시드는 무언가가 자신의 몸에 들어온 것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항하지 마라. 넌 처음부터 나의 것이었다!
움브라는 라시드의 정신의 벽을 갉아서 깨뜨리기 시작했다. 라시드가 간신히 버티며 포메라를 붙잡았다.
“크으윽. 포메라. 놈이 왔다! 어서 날 그분에게...”
“알겠다.”
라시드의 손을 잡은 포메라가 자신의 팔찌를 깨뜨렸다.
-뭐? 네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번쩍이는 빛과 함께 둘은 공간을 이동했다.
-허억! 유, 유렌!
라시드가 이동한 장소엔 유렌이 있었다. 그는 비수를 돌리며 나타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다, 당신의 말대로 놈이 왔소.”
“그래. 잘 참았다.”
유렌이 빙긋 웃으며 비수를 세웠다.
“역시 거기로 갔군. 움브라.”
유렌은 처음부터 움브라가 도망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놈에게 미끼를 내어주기 위해서 라시드를 데려 온 거다. 움브라는 완벽하게 유렌의 함정에 걸렸다.
-유, 유렌 록스! 날 죽이면 이놈도 죽는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유렌의 눈에 아직 라시드의 정신을 깨부수지 못한 움브라의 작디작은 혼이 보였다.
“아그네스.”
-알겠어.
“심의.”
아그네스와 함께 쓸 수 있는 심검. 심의가 라시드의 정수를 향해 날아갔다.
-아, 안 돼! 제발!
“못 간다!”
움브라가 도망치려했지만, 라시드가 놈을 놔주지 않았다.
“내 세상에서 꺼져라.”
유렌과 아그네스의 심의는 라시드에게 잡힌 움브라의 혼을 남김없이 제거했다.
마지막 남은 하늘의 어둠이 그쳤다.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던 그림자의 신이 최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