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구원자 (5)
캬갸갸걍!
아린의 세검과 암살자의 시미터가 맞물려 불꽃을 토해냈다.
“큭...”
아린이 상대하는 암살자는 암살자단 체스의 수장 라이툰이였다. 그가 들고 있는 시미터에선 살을 아리게 만들 정도의 살기가 풀려나오고 있었다.
캬앙!
아린은 라이툰이 기사와 다른 방식으로 마스터에 오른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보다 빠르고 살기가 짙은 실전적인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린 계집이 제법이구나.”
라이툰의 입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저음이 흘러나왔다. 아린은 그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의 검의 궤도에만 집중했다.
‘조금씩 보이기 시작해.’
아린은 자신의 재능이 적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이툰의 검이 조금만 더 눈에 익는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싸우면서 발전하는 재능이라, 아주 개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군. 빨리 처리해야겠어.”
수장 자리를 주사위로 딴 건 아닌지. 라이툰은 아린이 자신의 검에 익숙해지는 것을 보고 전투를 빠르게 끝내기로 결심했다.
쾅!
카앙!
라이툰의 검에서 풍겨 나오는 살기와 위력이 2배는 강해졌다. 그 지독한 살검을 막는 아린의 세검이 부러질 것처럼 흔들렸다.
“으윽...”
아린은 입술을 깨물면서 한 순간 한 순간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단숨에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귀찮게 구는군. 유렌 록스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힘을 아끼려 했건만 일단 네년부터 끝내야겠어.”
라이툰의 검에서 아주 얇고 가는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올랐다. 힘을 아끼지 않고 아린을 베어버리려 하는 것이다.
‘아...’
아린의 라이툰의 검이 아니라, 그의 말을 듣고 이 상황이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의 괴물은 암살자다. 만일 자신이 그를 놓친다면 앞에서 달리고 있을 자신의 주인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절대 못 보내!”
아린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 자를 유렌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후우웅!
오러 블레이드에 둘러싸인 라이툰의 검이 아린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아린은 그 검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샤아악!
수비를 버리고, 라이툰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렀다. 자신이 죽더라도 라이툰을 죽이겠다는 필살의 의지였다.
“미친!”
라이툰은 그녀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검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부우웅.
아린의 검에 흐르는 오러가 뭉글뭉글 솟아오르더니, 눈부실 정도로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생성되었다.
“아...”
아린은 자신의 검에서 솟아오른 진정한 오러의 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렌이 아린의 훈련을 꾸준히 봐줬기 때문에 그녀는 마스터의 벽을 반쯤 넘어선 상태였다.
모자랐던 건 필사의 의지뿐이었는데, 유렌을 지키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발현되며 마스터의 벽을 부숴버린 것이다.
“무슨!”
라이툰은 아린의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 경악했고, 전율했다. 싸우면서 마스터에 오르다니, 듣도 보도 못했던 일이다.
“후우...”
아린은 자신의 손에 들린 마스터의 상징에 집중하며 라이툰에게 돌진했다. 놈이 당황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트드드드.
전투가 시작한 후 계속 밀렸던 아린의 검은 더 이상 막히지 않았다. 불도저처럼 라이툰의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네년이 감히!”
“그분에게 가겠다고? 절대 못 간다.”
아린은 라이툰의 검술의 대부분을 파악했다. 그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우며 예리했지만 그게 다였다. 파악만 되면 너무도 단순한 검술이었다.
“커헉...”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린의 오러 블레이드가 라이툰의 검을 가르고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망...할...”
라이툰이 쓰러지자마자, 아린은 다른 기사들의 상태를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버서커를 사용한 크라이드가 양떼 속에 들어간 늑대처럼 암살자들을 학살하고 있었고, 브리카는 기사들을 보호해주며 암살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후라켄 공작과 사이온 후작도 자신들의 상대들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이 장소는 어렵지 않게 정리 될 것 같았다.
“후...”
아린이 유렌의 무사를 바라며 살아남은 암살자들을 처리하려고 움직일 때였다.
쿠구구구.
숲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과 함께 숲 위로 거대한 몸체가 솟아올랐다.
“드, 드래곤...?”
붉고 검은 비늘을 가진 드래곤은 대회장에서 본 카이젤보다도 훨씬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유렌님...”
**
[크아아아아!]
먼 하늘에서 포효를 내질렀던 작은 점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어느새 내 머리 위에 나타나 있었다.
“저 드래곤은...”
내 머리위에 떠 있는 건 앞에 있는 악룡 렉시스만큼이나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었다.
“유렌! 영감이 왔다!”
“영감? 설마...”
카이젤이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네가 쓰는 검술을 만든 괴짜 카렉스 볼카누이스! 내가 조력자가 온다고 했지 않나!”
카이젤은 손가락으로 볼카누이스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저게 볼카누이스인가.”
내 검술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게 저 카렉스 볼카누이스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고오오오오.
대기가 볼카누이스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브레스를 쓰려고 숨을 들이 마시는 것이다.
쿠구구구구.
악룡 렉시스의 입에서도 공기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놈도 마찬가지로 브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친! 여기서 브레스를 쓰겠다고? 모두 뒤로 물러나!”
내가 다른 사람들을 뒤로 보내려고 할 때 카이젤이 손을 저었다.
“내가 할 테니, 걱정 마라.”
카이젤이 나를 포함한 모두를 보호막에 가둔 후 뒤로 날렸다.
“저 아저씨의 브레스는 특별해.”
카이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볼카누이스의 브레스가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아!
볼카누이스의 브레스는 다른 드래곤처럼 넓게 퍼지지 않았다. 레이저처럼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저렇게 힘을 집중 할 수 있다면 평범한 브레스보다 2배는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콰과과과과!
하지만 악룡의 브레스도 평범하진 않았다. 레드 드래곤의 파이어 브레스와 악마의 마탄이 동시에 뿜어져 몇 배로 강한 브레스가 솟아올랐다.
콰아아아앙!
두 에이션트 드래곤들의 브레스의 충돌에 대지가 갈라지고, 숲이 재로 변해버렸다. 대기가 타오르며 살같이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졌다.
화아아아악!
브레스가 맞부딪친 장소는 땅을 갈아엎은 것처럼 뒤집혀 있었고, 나무는커녕 풀뿌리 하나 남아나지 않았다. 무의 세계에 온 것처럼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아, 둘 다 정신이 나갔군. 어떻게 브레스가 저런 위력을 가진 거지?”
카이젤은 같은 드래곤임에도 볼카누이스의 브레스에 감탄했다. 그의 아이스 브레스에는 빙결이라는 특수 능력이 있지만, 저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어서 부러운 모양이다.
“흠.”
볼카누이스는 털끝하나 다치지 않은 악룡 렉시스를 보고 고개를 한 번 털고서 아래로 내려왔다.
번쩍.
볼카누이스는 본체 상태가 아닌, 붉은 머리의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바쁘다고 들었다만 잠시만 보고 가라.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볼카누이스는 정확히 나를 지목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 카이젤이 나에 대해 설명을 했거나, 내게서 제왕의 검의 흔적을 찾은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렉시스는 레드 일족이 해결해야 할 수치다. 너희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다니, 할 말이 없군.”
볼카누이스는 우리에게 사과를 하고 아직 건재한 렉시르를 올려보며 손을 뻗었다.
빠지지직!
그의 손아래에 있는 공간이 찢어지면서 검은색 검이 솟아올랐다.
“네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마.”
검을 잡자, 볼카누이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그 자체가 한 자루의 검이 된 것 같았다.
“전에 말했지. 저 영감이 천년정도 검만 수련했다고.”
“그래.”
“그게 아니었어. 말을 들어보니, 거의 4천년동안 검에 시간을 쏟았다더군. 나보다 더 미친 용이야.”
볼카누이스의 검에 아릿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의 검에 밤이 담긴 것 같았다. 많이 본 현상이다. 다만, 내 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검에 담겼다는 게 다를 뿐이다.
“네 검술과 똑같군. 다만 조금 더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 같은데.”
“그래.”
카이젤의 말대로 볼카누이스의 제왕의 검은 내 검보다 더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마왕.”
볼카누이스의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검이 렉시스에게 향했다.
콰아아아!
마왕은 렉시드의 양 손에서 나온 마나와 마기의 광선을 밀어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두 힘은 브레스때와 마찬가지로 막상막하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파멸적인 두 힘의 충돌로 숲 전체에 태풍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스윽.
마왕이 막힌 이후 볼카누이스가 검을 아래로 내렸다. 잊혀진 제왕의 검의 두 번째 마신이다. 그의 검에 천하를 덮을 어둠이 담겼다.
“크아아아아!”
마신의 앞에선 악룡조차도 여유를 부릴수 없었다. 드래곤 하트의 마나와 악마의 마기가 렉시스의 앞에 거대한 원의 구슬을 만들었다.
“마신.”
제왕의 검의 두 번째 초식 마신이 렉시스의 다크 사이져와 격돌했다.
콰아아아앙!
마신에 담긴 절대적인 검력이 렉시스의 마기와 마나를 뚫어버리고 있었다.
“크르르르.”
렉시스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울림이 나왔다. 자신이 가진 마나의 대부분을 쏟아부었건만 검 한 자루에 밀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퍼어어어엉!
두 힘의 충돌에 새하얀 빛이 터지고, 마나의 폭풍이 몰아쳤지만, 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콰아아아아!
두 괴물들은 세 번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렉시스는 다시 한 번 브레스를 준비했다. 하루 3번 사용할 수 있는 브레스 두 방을 한 번에 몰아 쓰려 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볼카누이스는 검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그의 검에 하늘 그 자체의 의지가 담겼다. 나도 모르는 제왕의 검의 세 번째 초식이 분명했다.
“천마.”
조용히 중얼거리는 볼카누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식의 이름 그대로 그의 검엔 하늘의 의지 그 자체가 담겨 있었다.
화아아아아!
잊혀진 제왕의검 마지막 초식 천마와 렉시스의 브레스가 격돌했지만 충격파나, 굉음은 들리지 않았다.
“아...”
그건 그저 하나의 선이었다. 하늘 끝에서 땅 끝에 이른 하나의 선이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버렸다.
쿠우웅!
렉시스의 그 거대한 몸체가 땅에 떨어졌다. 놈은 내가 보았던 검의 선과 똑같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져있었다.
[잊혀진 제왕의 검 마지막 초식 천마를 보셨습니다.]
[잊혀진 제왕의 검 연계를 본 효과로 마지막 초식 천마가 개방 됩니다.]
“허억, 허억!”
볼카누이스는 땅에 검을 박아 넣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에게도 천마라는 초식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보았나?”
“보았습니다.”
“할 수 있겠나?”
“모르겠습니다.”
개방 된 것과 사용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실제로 쓸 수 있을지 없을 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하하하! 그런가?”
내 대답을 들은 볼카누이스가 주저앉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거면 됐다.”
볼카누이스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은색 검을 내게 던졌다. 검을 잡자,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걸 왜...”
“잊혀진 제왕검을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검이다. 연속으로 펼치는 3개의 초식을 버틸 수 있다.”
“아...”
“검술을 남겨놓긴 했지만, 누구도 익히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해지다니. 기분이 좋군.”
볼카누이스는 나를 보고 순수함이 담긴 웃음을 지었다. 대견하고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이 심술쟁이 영감아! 그렇게 능글맞게 숨겨놓으니 못 찾지.”
“넌 닥쳐. 렉시스에게 쫄아서 얼어붙은 놈이 입만 살아서.”
“끄윽...”
카이젤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술만 깨물었다.
“이제 가라. 나중에 만나지.”
“좋은 술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좋아. 기다리지.”
볼카누이스에게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자.”
볼카누이스를 뒤로 하고 앞으로 달렸다. 이제 깊은 숲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놈을 만날 수 있을 거다.
“야. 유렌.”
“왜?”
“가지고 간다는 좋은 술이 우리가 먹었던 크로노스는 아니지?”
“맞는데?”
“야! 그건 나랑 먹어야지.”
**
데스 나이트와 언데드들이 나왔을 때 이레아와 일리아가 빠졌고, 다크엘프와 라이칸이 길을 막았을 땐 로디엔과 카이젤이 길을 열어주었다.
“후우...”
필로세 숲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을 때 내 곁엔 출발할 때 있던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포메라와 라시드, 빽빽이가 새로 나타났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으음, 그런데 내가 도움이 되겠소?”
“그거야 모르지.”
움브라가 힘을 개방하면 이들만이 아니라, 숲에 있는 누구도 버티지 못한다. 내가 라시드와 빽빽이를 데려온 건 도박과도 같은 이유다.
“여긴 도서관처럼 조용하군.”
“그래. 아예 길을 열어놓았어.”
라시드의 말대로 깊은 숲엔 아무 것도 없었다. 길을 따라 그림자 투견을 잡았던, 고대신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역시 여기 있었군. 움브라.”
동상의 자리엔 동상 대신 움브라가 바람에 날리며 서있었다. 내게 다쳤던 상처들은 모두 치유되어 있었다.
“이제 끝을 내자. 미친 그림자 새끼야.”
“끝? 그래. 끝을 내야지.”
움브라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놈의 팔 밑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가 갇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