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구원자 (4)
후우웅.
필로세 숲의 가장 깊은 곳, 고대신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 그림자를 휘날리는 움브라가 서있었다.
유렌에게 잘렸던 손은 새로 돋아나 있었고, 귀왕살에 찔렸던 가슴의 상처도 아물어 있었다. 움브라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죽인 인간의 숫자는 천 단위를 가볍게 넘었다.
“인간들이 숲 밖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곧 공격해 올 겁니다.”
눈자위 전체가 검게 물든 인간이 움브라에게 무릎을 꿇었다. 동쪽 대륙의 마스터이자, 최악의 악인으로 이름 높은 홍열귀 오르카다.
“그래. 느껴지는구나.”
오르카가 말해주지 않아도 숲 밖에 모여 있는 기사들과 그들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전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지 대륙에 이름이 있는 강자는 전부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인간만이 아니라, 엘프와 드워프들도 있습니다.”
움브라가 미소를 머금었다. 엘루나와 마르투스 포지, 드래곤인 카이젤이 온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상관없다. 너는 네가 할 일을 하도록.”
“알겠습니다.”
움브라의 말에 오르카가 고개를 꾸벅이고 숲으로 돌아갔다. 귀족과 왕족마저 죽였던 홍열귀 오르카는 주인 앞의 강아지처럼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유렌 록스. 네게 럭스의 힘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날 거다.”
잔인한 미소를 짓는 움브라의 뒤로 뿔이 3개 달린 거대한 괴물이 김을 내뿜고 있었다.
“크르르르...”
**
필로세 숲 앞은 이미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왼쪽 크라켄 기사단은 앞에 나서지 말고 전열을 갖춰라!”
“전열을 갖춰라!”
“오른쪽 백룡 기사단은 앞으로 좀 더 나오도록!”
“백룡 기사단 한 발 앞으로!”
필로세 숲은 몬스터들로 숲이 미어터지고 있었다.
밖으로 빠져나온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는 일이 어제만 10번이 넘게 일어났고, 지금도 숲을 벗어나는 몬스터들 때문에 전열이 어긋나고 있었다.
각조의 조장과 단장을 앞에 세우고 나서야 전열이 안정화 되었다.
“이제야 전열이 완성되었군.”
“전 대륙의 기사단이 한 곳에 모이다니, 다시는 못 볼 광경이네요.”
“그렇겠지.”
아린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대륙에서 모인 기사, 마법사, 엘프, 드워프, 용병들이 각자의 정해진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들 모두는 대륙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섰다.
“후...”
대륙연합의 이름으로 뭉친 용사들의 듬직한 뒷모습에 가슴에 불이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령관님. 전열 배치가 모두 끝났습니다.”
오랫동안 병력관리를 담당해서 내 부관이 된 키아논 후작이 병력 배치가 완료됐음을 알려주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직전의 순간이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이고 모두를 볼 수 있게 앞으로 나왔다. 병력들의 앞에 서 있는 조장과 단장들은 전부 내가 알고 있는 강자들이었다.
조장과 단장들에게 눈인사를 한 뒤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후...”
열기를 담고 있는 수천 개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모두를 쳐다 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고, 몬스터가 미쳐 날뛰었고,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로 오늘까지 당해왔다.”
내 말이 시작되자, 웅성이던 소음이 단숨에 잦아들었다.
“몬스터들과 악인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난 말을 멈춘 뒤 손가락으로 숲의 안쪽을 가리켰다.
“이 지랄 맞은 상황은 자신을 드러낼 용기도 없이, 저 숲에 숨어서 몬스터와 악인들을 조종한 추잡한 협잡꾼이 저지른 일이다!”
고오오오.
기사들의 분노가 하나의 기세가 되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숲 안에 있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가늠조차 할 수 없고, 들어보지 못한 괴물에 인간의 탈을 벗어버린 악귀들도 있을 거다. 누구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하고 또 위험한 상황이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기사들의 기세가 점점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싸운다! 이 대륙을 위해라는 거창은 말은 필요 없다. 옆의 전우를 지키기 위해, 고향에 있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너 자신을 위해 싸워라!”
“우와아아아아!”
손을 올리면서 외치자, 모두의 소리로 거대한 함성이 만들어졌다, 함성만으로 숲이 흔들리고 있었다.
고오오오.
서로 연결되지 않았던 기사들의 검기가 하나로 뭉쳐서 거대하고 날카로운 군기를 만들어냈다. 모두의 마음이 일치한 것이다.
“너희가 할 일은 간단하다. 내 앞을 지켜라! 몬스터들을 뚫어 길을 만들어라! 내가 모든 것을 끝내주겠다!”
“우와아아아아!”
“유렌 록스!”
“으아아아아아!”
“대륙을 위하여!”
“대륙을 위하여!”
마지막 말과 함께 앞으로 달렸다. 내 뒤에서 거대한 발구름 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모두가 내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낯 뜨거운 소리 잘도 하는 군.”
카이젤이 내 옆으로 날아왔다.
“처음은 내가 나서주마.”
카이젤의 손에 웅장한 마나가 뭉쳐들었다. 그의 손에서 태풍이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아아악!
카이젤의 손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바람의 칼날이 앞의 숲을 통째로 베어버렸다.
콰과과과광!
울창한 숲이 벌목을 한 것처럼 변해버렸다. 숲만이 아니라, 숲 안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까지 모조리 잘려나갔다.
“우와아아아아!”
“카이젤 님이다!”
“드래곤이 우리의 편에 섰다!”
카이젤이 드래곤인 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그가 첫 타자로 나서준 덕분에 사기가 물밀듯이 올라갔다.
“여긴 입구나 다름없다! 최대한 빠르게 통과해!”
“숲의 초입을 최대한 빨리 통과하라!”
숲의 초입은 말 그대로 시작점에 불과하다. 이곳에선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쿠구구구구.
카이젤이 바람의 칼날을 사용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더 빠르고, 쉽게 숲의 초입을 지나갈 수 있었다.
“가벼운데요?”
제니스가 벌판처럼 변한 숲을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여기가 시작점인데 당연히 가벼워야지. 지금부터니까 긴장해.”
숲의 초입에 있던 몬스터는 오크와 고블린정도 되는 최하급 몬스터였다. 중간 숲에 들어가는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쿠웅!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오우거다!”
5m가 넘는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 무리가 우리의 앞을 가로 막았다. 오우거는 단독행동을 하는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수십 마리가 함께 모여 있었다.
“크르르륵!”
오우거들의 눈자위에는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움브라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단!”
뒤를 보면서 손을 들어 올리자, 거대한 불꽃 뭉치와 얼음 뭉치가 동시에 날아왔다.
쿠와아아앙!
퍼퍼퍼퍼펑!
마법사들이 동시에 마법을 사용해서 앞에 있던 오우거들을 태우고 얼려버렸다. 수많은 마법이 작렬했기 때문에 오우거들의 벽이 단숨에 뚫려버렸다.
“키델론 후작!”
“알겠소!”
서부의 오우거들을 사냥하는 키델론 영지의 적색 기사단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창과 검을 사용해 오우거들을 유인하고 공격하며 길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간다!”
키델론 후작과 적색기사들에게 오우거들을 맡겨두고 나머지 기사들은 앞으로 달렸다.
“아오오오!”
오우거들의 벽을 넘자, 백 단위는 되어 보이는 베오울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루안 백작!”
“알겠습니다!”
이오칼의 백작인 일루안이 그의 보라매 기사단과 함께 베오울프에게 돌진했다. 그들이 베오울프와 가장 많은 전투를 해봤기 때문에 이곳을 맡기는 것이다.
“가자!”
일루안과 보라매 기사단은 검을 아래로 깔면서 베오울프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베오울프의 약점이 하체라는 것을 알고 밑을 공략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계속 전진하라!”
“계속 전진하라!”
일루안 백작에게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낸 뒤 앞으로 달렸다.
“전투 진행이 굉장히 빠르군.”
“이 전투는 그런 전투니까...”
옆에서 달리고 있는 카이젤을 보며 씁쓸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이 싸움은 내 힘을 최대한 소모시키지 않고 끝에 도달하게 해야 이기는 싸움이야. 미안하지만, 이 몬스터들을 모두 잡아도 절대 끝나지 않아.”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우리 쪽이기 때문에 뒤에 남은 사람들이 잘 버텨주길 바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내가 할 일이다.
“라미아입니다!”
라미아는 뱀의 하체에 인간의 상체를 가진 몬스터다. 강력한 독을 가지고 있고, 이동속도가 굉장히 빠른 상위 몬스터다.
“헤이렌 백작!”
“알겠습니다!”
“페루. 너도 도와!”
“넵!”
헤이렌 영지는 늪지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헤이렌 백작과 그의 기사단은 라미아에 대해 빠삭하다. 페루는 독을 해독하며 공격을 할 수 있으니, 이곳에 남기는 게 최선이다.
“페루라는 저 아이는 네 수족 아닌가?”
“맞아. 중요한 녀석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나를 보고 카이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곳에 놔둔다고? 죽을 수도 있지 않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싸우는데, 내 부하라고 배려를 해주다면 사령관 때려치워야지.”
“허...”
카이젤은 나를 다시 봤다는 듯 헛바람 소리를 냈다.
뒤를 돌아보니, 아린과 크라이드, 브리카 역시 아무 말하지 않고 따라오고 있었다.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페루는 강해. 절대 안 죽는다.”
**
그 이후로도 많은 몬스터들을 만났고, 그때마다 그 몬스터에 강점을 지닌 기사단이나 종족들에게 그 곳을 맡기고 길을 열어왔다.
현재 내 뒤를 따르는 기사들의 숫자는 확연히 줄어 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빠르게 숲의 끝에 도달해서 움브라를 죽이는 것 밖에 없었다.
“저 나무는...”
내가 숲의 방향을 파악할 때 사용했던 높게 솟은 나무가 보였다. 숲의 중심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예!”
지금까지 소모된 몬스터들의 숫자와 종류를 봤을 때 앞으로는 숫자는 적지만 강력한 네임드 몬스터가 나타날 거다.
두두두두.
작고,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 걸음 소리는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들이다.
“음...”
세 방향에서 세 무리의 인간들이 나타났다. 가운데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있었고, 왼쪽은 털 코트를 입은 권사들이, 오른쪽에선 시미터를 들고, 온통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는 암살자들이 나타났다.
“가운데가 홍열귀 오르카, 왼쪽이 얼음거인 렉시크인가? 오른쪽은 암살자 단체 체스로군.”
러스트에게 미리 정보를 들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공작님! 부탁합니다!”
오르카와 렉시크는 악인임에도 마스터에 오른 자들이기 때문에 마스터가 상대해야 한다.
“부탁할 필요 없네. 예전부터 저 놈은 내가 죽이고 싶었으니까.”
후라켄이 자신의 기사단과 함께 가운데로 돌진했다.
“사이온 후작님! 렉시크를 맡아주십시오!”
“물론이네.”
사이온 후작이 씩 웃으며 그의 기사단과 함께 왼쪽으로 빠졌다.
저들이 이곳에 있는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을 상대할 사람들은 미리 정해 놨었다.
“아린. 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아린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여주고선 암살자들이 있는 오른 쪽으로 달려갔다.
“유렌님.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기다리고 계십시오!”
크라이드와 브리카, 흑철 기사단이 아린의 뒤를 따라 적들에게 쇄도했다.
“후...”
뒤가 걱정되었지만, 생각을 하지 않고, 보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가슴에 새기며 앞을 향했다.
“음?”
기사들에게 뒤를 맡기고 5분정도 나아갔을 때 숲 전체가 울리는 묵직한 소음이 들렸다.
“뭐지?”
이건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소리였다.
쿠구구구구.
숲을 뒤흔들며 하늘 위로 거대한 몸체가 솟아올랐다.
“드, 드래곤?”
비늘이 검은 색으로 물든 거대한 레드드래곤이 나타났다.
“저 색은 뭐지? 그리고 뿔이 세 개?”
드래곤은 단일 색을 갖지만, 저 드래곤은 검은색과 붉은색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두 개여야 하는 뿔이 세 개가 돋아나 있었다.
“어, 어떻게 저 놈이...”
카이젤이 이를 악물며 손을 떨었다.
“아는 놈인가?”
“저 드래곤은 악마에게 몸을 빼앗긴 악룡 렉시스다. 로드가 봉인을 했을 텐데 어째서 여기에...””
“아...”
이제야 저 드래곤의 색과 뿔이 다른 건지 이해가 갔다.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카이젤. 저 놈 막을 수 있어?”
“미안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한다. 저놈은 이미 에이션트를 넘은 레드일족이고, 악마의 힘을 받아 더 강해진 상태다. 그래도... 최대한 시간은 끌어보마.”
카이젤의 굳어있는 얼굴을 보니, 목숨을 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전쟁 보단, 드래곤의 일로 다른 종족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나.”
카이젤을 잃은 수는 없고, 저 드래곤을 놔뒀다가 뒤에서 습격당하느니, 여기서 끝을 내는 게 낫다. 전력을 다한 만천화우 한 방으로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겠다.
[쿠오오오오!]
만천화우를 쓰기 위해 천판을 꺼내들려고 할 때 먼 하늘에서 심장을 울리는 거대한 포효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