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구원자 (3)
“유렌 후작. 밤이 계속되는 이 괴이한 일의 원흉이 어디에 있는 건지 정말 알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3일 후 대륙에 존재하는 왕과 고위귀족 대부분이 한 자리에 모였다. 물론 물리적으로 모인 건 아니고, 서로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게 개량된 통신 마법을 사용했다.
“그곳이 어디요! 당장 공격합시다. 빨리 이 괴현상을 끝내야하오!”
제국의 황태자가 책상을 내려치면서 크게 소리쳤다.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답게 이번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빨리 말해보시오. 대체 놈은 누구고, 어디에 숨어 있는 거요!”
“그 망할 놈을 당장 죽여 버려야 합니다!”
“그 악마 같은 놈 때문에 몬스터에게 죽은 국민들의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소.”
“희생한 병사와 기사들의 숫자도 셀 수가 없지. 너무 심각한 일이오.”
그림자가 하늘을 덮은 이후 수많은 몬스터들에게 습격당했기 때문에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엔 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국민들을 잃게 만들고 평범한 생활조차 할 수 없게 만든 자에게 극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일단 놈이 있는 곳은 필로세 숲입니다.”
“필로세 숲?”
“거기가 어디지?”
“그 숲은 몬스터들에게 지배되는 곳 아닌가!”
필로세 숲을 모르는 사람은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는 사람들은 인상을 팍 찌그러뜨렸다.
“하필 필로세 숲이라니...”
“그런 곳에 있으니, 들키지 않았군. 젠장!”
필로세 숲은 인간에게 지배되지 않은 몬스터들의 지역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답답해하는 것이다. 초입이나, 중간 숲은 몰라도 깊은 숲의 지리를 아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
“숨어도 더러운 곳에 숨었어!”
“으음...”
“휴우...”
왕들과 귀족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난 모두가 볼 수 있게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의 시선을 모았다.
“제가 필로세 숲의 지리를 알고 있습니다.”
“뭐?”
“정말이오?”
“그곳의 지리는 어떻게 아시는 거요?”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잠시 뜸을 들인후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 필로세 숲의 끝에 도달한 적이 있습니다. 완벽하진 않겠지만, 길잡이를 하는데 전혀 문제없을 겁니다.”
“오오!”
“역시 유렌 록스 후작이로군!”
“모르는 게 없오!”
“대단하오!”
왕과 귀족들의 탄성과 박수가 들려왔다. 내가 그 숲을 정복했을 줄은 상상도 못한 얼굴들이다.
“자네는 항상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군.”
“맞소. 정말 놀라운 사람이오.”
“매번 느끼지만 유렌 후작이 있는 크라시스의 국왕이 부럽소.”
“다만!”
왕과 귀족들의 말을 끊었다. 지금은 내 칭찬을 듣기 위해 모인 장소가 아니다. 적당히 끊어줘야 한다.
“그 숲에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과 악에 홀린 인간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으음!”
“그, 그게 사실이오?”
“몬스터야 그렇다 치고, 인간까지 모인다고?”
“네. 악에 중독 된 인간들이 그 숲으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전쟁에 승리한 것 같았던 회의 분위가가 단숨에 축 가라앉았다.
“대체 그 원흉이라는 놈은 뭐요? 다른 종족이오? 아니면 악마라도 되는 거요?”
“그 놈의 정체가 뭐 길래 몬스터에 인간까지 불러 모으는 건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에게 움브라의 정체를 알려주는 건 무조건 마이너스다. 전투에 참여할 사람들에게도 움브라가 신, 그것도 고대신이라는 사실이 퍼져나갈 것이다.
단순히 ‘몬스터와 싸운다.’와 ‘신과 싸운다.’는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아무리 움브라가 잊혀진 신이라고 해도 직접 싸워야 할 기사와 마법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기게 될 거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신이라는 것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자네도 모른다니, 그럼 아무도 모르겠군.”
“으음...”
“그놈의 정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놈이 대륙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이런 특이한 상황에서 모두의 의견을 모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여러 국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내가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필로세 숲에 모든 병력들을 모아야겠군.”
“맞소. 대륙 연합군을 조직해서 단숨에 끝을 내야하오.”
“각 국가에서 기사들을 차출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 군의 총사령관을 정해야하는데...”
갑자기 모두 말이 줄었다. 자신의 나라에서 그 사령관이 나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한숨이 나왔다.
정치 좋다.
평소라면 누가 사령관으로 결정되든 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총사령관은 제가 하겠습니다.”
손을 들어 올리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유렌 후작?”
“흐음...”
“조금 어리지 않나?”
몇몇 왕과 귀족들이 떠보는 것처럼 말을 얼버무리며 다른 사람들의 의중을 살폈다.
“크라시스는 당연히 찬성이오.”
국왕이 손을 들어 올리며 내게 힘을 실었다. 하지만 국왕은 나와 나라가 같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오칼 교국도 찬성이오.”
“후라켄 공작님!”
이오칼의 대표로 나온 후라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나를 보면서 한쪽 눈을 깜빡였다.
후라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벌써 두 분이 찬성하셨군. 뭐, 아직 많은 분들이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유렌 후작이 강하다고 듣긴 했지만, 직접 보질 않아서 뭐라 할 수가 없군.”
“가장 중요한 경험이 없지. 직접 전쟁을 하신 적도 없는 걸로 아오.”
“나이가 너무 어린 거 아니오?”
“하긴 유렌 후작의 나이는 아직 20대 초중반이오. 총사령관을 맡기엔 아직 어린 나이지.”
“마스터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실력도 그렇게 성숙되지 않았을 텐데.”
나와 접점이 없는 나라의 왕과 귀족들이 내 흠을 잡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바다.
“일리안 공작님. 제가 전쟁을 겪어 본 적 없다고 하셨습니까?”
“음? 그게...”
“대륙에서 인간의 국가끼리 전쟁이 일어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일리안 공작께선 대체 어디서 전쟁을 겪어보셨습니까?”
“아, 모, 몬스터하고의 전투도 전쟁이라고 하지 않나.”
“그게 전쟁이라면 저도 많은 전쟁을 했습니다. 록스에서 샤크라이 무리와 샤크라이 킹, 씨 서펜트, 레드오크와 오크투사, 리자드맨과 리자드맨 킹, 다크엘프에 라이칸까지 수많은 몬스터들이 제 손에 죽었습니다. 세세한 몬스터는 말할 수 없이 많죠. 공작께선 무엇과 전쟁을 하셨는지요.”
“크흠...”
일리안 공작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가 내 눈을 피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카보인 후작님. 제가 마스터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약하다 하셨습니까?”
“그게...”
“전 대륙에 존재하는 어떤 마스터가 와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카보인 후작님도 마스터로 알고 있는데 한 수 겨루어 보시겠습니까?”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건 내가 증명해주겠소. 유렌 후작은 나보다 강하오.”
제국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사이온 후작이 손을 올리고 나를 인정해주었다.
“나도 동의하오. 그는 나보다도 뛰어난 마스터요.”
후라켄이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올려서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후, 후라켄 공작?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난 유렌 후작의 기술을 보고 경지를 높였소. 그는 나보다 훨씬 앞서있는 무인이오.”
후라켄의 말에 카보인 후작이 입을 다물고 먼 곳을 응시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내 흠을 잡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입에 자물쇠를 단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총사령관이 결정되지 않는다면 지지부진한 회의를 며칠간 해야 할 겁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하지는 건 저쪽입니다. 빠르게 해결했으면 좋겠군요.”
말을 하면서 기세를 불러와 내 존재감을 높였다.
“저희 엘루나는 유렌님이 총사령관이 되신다면 전쟁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어요. 유렌님의 말대로 이 일은 빠르게 처리해야 해요. 재미없는 논쟁을 계속 보고 싶지도 않네요.”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엘루나의 족장 아르시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내게 힘을 실어주려 하는 것이다.
“맞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저희는 지치게 될 거고, 필로세 숲엔 더 많은 몬스터들이 모여 들겠죠. 놈의 세력이 완성되기 전에 쳐야합니다.”
자리에 일어나서 단호하게 말했다. 내 의지를 담은 말이 모두에게 퍼져나갔다.
“테스테인이 유렌 록스라는 인간은 믿을 수 있다고 했지. 저 인간이 사령관이 된다면 우리도 드워프들도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지.”
별 관심 없는 듯 귀만 파고 있던 드워프 대족장 마르툰이 자신의 책상을 내려치며 일어났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기라녹스의 스승인 테스테인이 내 이야기를 잘 해줬던 것 같다. 이곳에서도 내 인연의 끈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도 유렌 후작이 총사령관이 되는 것에 찬성하겠소.”
제국의 황태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찬성에 반대를 하려 하던 왕과 귀족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국조차 찬성을 했으니, 반대하기 애매한 것이다.
“아무 대가도 없이 우리 제국민들을 구해준 유렌 후작이라면 믿을 수 있소. 아인스 제국도 전쟁에 참여하겠소.”
“크흠, 크라시스 왕국, 이오칼 교국, 아인스 제국에 엘루나에 마르투스 포지까지 유렌 후작의 사령관을 지지했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국왕이 딱 좋은 타이밍에 치고 들어왔다. 역시 노련한 사람이다.
“...찬성하겠소.”
“우리도 찬성하오.”
결국 반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럼 이곳의 모두를 대신해서 내가 유렌 록스 후작을 대륙 연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겠소.”
국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주었다. 불만이 있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각 국가는 영지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모든 기사단을 5일후 정오까지 필로세 숲 앞에 배치하십시오.”
“오, 오일?”
“너무 빠르네. 보급과 식량문제가 있어!”
“아까도 말했듯이 이 전쟁 끌면 끌수록 저희에게 불리하니, 시간변동은 없습니다. 자세한 지시는 따로 메시지를 보내겠습니다.”
처음엔 반발했지만, 결국 내 지시대로 따르기로 결정되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5일 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라 지시한 후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유렌님!”
“기라녹스.”
기라녹스가 통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내 장비들이 들려있었다.
“모든 장비의 정비가 끝났습니다. 솔직히 좀 험하게 다루셨네요. 하하!”
“전투가 좀 많다보니...”
기라녹스가 내 무기들을 수리해서 가져온 것이다.
“고맙다.”
“에이, 이정도 가지고 뭘요. 대장장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아니, 네 스승에게 내 이야기를 드워프 대족장에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아, 그게...”
기라녹스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빙긋 웃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덕분에 훨씬 편하게 회의를 움직일 수 있었어. 정말 고맙다.”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수리도 고맙고, 네겐 도움만 받는군.”
“아, 아니에요! 유렌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전 아직도 뒷골목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었을 겁니다.”
기라녹스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난 미소를 지으며 받은 장비들을 챙겨 넣었다.
“조심하세요. 꼭 이기시구요.”
“축제 준비나 하고 기다려.”
“하하! 물론입니다.”
기라녹스를 돌려보내고 방에 들어가자, 카이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술 안 만드냐?”
“날이 거지같아서 그런지 아무리 만들어도 술맛이 거짓 같다. 쯧.”
카이젤은 시꺼먼 하늘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책장의 꼭대기에 있는 술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제니스가 가장 좋은 술이라면 내게 준 것이다.
“헉! 너 이거 전쟁 끝나고 먹겠다고 했잖아. 지금 먹을 거냐?”
“날이 거지같잖아. 싫어? 나만 먹을까?”
“아니! 무슨 소리를! 당연히 먹지!”
카이젤이 미친 듯이 달려와서, 아니 아예 날아와서 잔을 내밀었다. 피식 웃으면서 녀석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게 그렇게 좋은 술이야?”
“당연한 걸 뭘 물어.”
난 잘 모르지만 이 술은 몇 개 남지 않은 유니크한 물건이라, 돈을 아무리 줘도 구할 수 없단다.
“크으, 이 달달함 속에 미세하게 끼어있는 알싸함. 역시 크로노스야! 미쳤어!”
“그렇게 맛있냐? 난 잘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다. 어린애는 몰라.”
카이젤은 꼰대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잔을 삭삭 핥아먹었다. 드래곤치곤 참 품위가 없다.
“근데 여긴 왜 왔어?”
“아! 맞아.”
카이젤은 술을 마시느라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도 잊고 있었다. 이제야 생각난 듯 머리를 흔들었다.
“새로운 조력자가 올 것 같다. 아주 큰 도움이 될 조력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