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구원자 (2)
러스트는 처음 보는 여행자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가이린으로 찾아왔을 때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러스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제가 잡혔을까봐 걱정 하시지 않았나요?”
“네가 잡혔다면 움브라가 바로 공격을 해왔을 테니, 걱정 할 필요도 없지.”
“너무 똑똑한 남자는 인기 없어요. 이럴 땐 걱정했다고 해야 점수를 받죠.”
“난 인기를 얻고 싶지도 않고, 점수를 받고 싶지도 않으니, 본론이나 시작하지.”
“후, 다른 분들이 고생 좀 하겠군요.”
러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작은 미소가 걸려있던 그녀의 표정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표정을 보니, 뭘 알아내긴 한 모양이군. 지금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어. 빨리 말해봐.”
내가 지키고 있는 가이린과 록스만이 아니라, 크라시스 전체, 이오칼 교국, 아인스 제국 등 대륙 전체가 몬스터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 때문에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큰 성으로 피난을 온 상태다.
“일단 우리 앞에 나타난 그 그림자가 움브라인건 확실해졌어요.”
“역시 그런가?”
“네.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외형, 신성으로도 공격 할 수 없는 특별한 아우라, 모든 존재의 그림자를 내리눌러 꼼짝도 못하게 하는 능력까지. 확실히 움브라에요.”
러스트가 말한 움브라의 특징들은 내가 싸워온 그림자의 특징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 놈이 그림자의 신 움브라가 맞았다.
“그걸 어디서 알아낸 거지?”
“글러트니와 에블린이 숨겨둔 자료를 얻었죠. 고대의 자료들도 찾았고.”
“그렇군.”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그 정도는 해낼 자신이 있어서 갔을 테지.”
“역시 당신은 재미가 없어요.”
난 러스트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놀라지 않은 거다. 정보를 알아내는데 그녀만한 능력자가 없다.
“고대신은 딱 두 명이에요. 태양의 신 럭스와 그림자의 신 움브라. 저희 칠죄종은 이 둘의 살과 힘을 나누어 받아서 태어났죠.”
“너희는 악이잖아. 태양의 신의 힘도 들어갔다는 건가?”
“맞아요. 저흰 악이죠. 하지만 럭스의 힘이 들어간 것도 사실이에요. 둘 사이에 어떤 관계나 거래가 있었을 거라는 게 제 추측이에요.”
러스트도 두 신의 관계에 대해서 정확히 알수 없었기 때문에 목소리에 힘이 좀 빠져 있었다.
“움브라가 나타났으니, 럭스도 나타나거나 현신해야 하는데,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러스트는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럭스가 있었다면 저 어중간한 하늘도 원래대로 돌아왔을 거예요. 두신의 힘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에 저런 하늘이 된 거죠.”
“럭스...”
사실 럭스가 누구인지는 이미 눈치를 챘다.
이 세계에 온 이후 나를 계속 도와주고, 여러 가지 지원을 해줬던 하얀 방의 헬리나, 그녀가 바로 태양의 신 럭스 일 것이다.
헬리나와 대화를 할 때 그녀는 동료에게 당했다고 했고, 동료와 상극이라고 했다.
헬리나의 말을 태양의 신 럭스와 그림자의 신 움브라로 연결해보면 완벽하게 일치한다.
럭스는 움브라에게 배신당해 아무 것도 못하고 방에 갇힌 상태가 되었던 거다.
“이 조사를 하면서 당신 때문에 놀랐어요.”
“나 때문에 놀랐다고?”
“네. 움브라를 공격 할 수 있는 건 그와 동급인 럭스의 힘밖에 없어요. 아무리 완벽한 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인간의 능력으론 그를 공격 할 수 없죠. 하지만 당신의 움브라의 팔을 베었잖아요.”
내가 얻었던 이름 잃은 자의 파편에서 이름 잃은 자가 바로 럭스다. 난 그녀의 힘으로 움브라의 팔을 베어버린 것이다.
“당신에겐 럭스의 힘이 있어요. 움브라를 잠재워서 이 세계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당신뿐이라는 거죠.”
“잠재운다고? 죽이는 게 아니라?”
“아쉽지만 고대신은 잊혀 지거나 약해지긴 해도 죽지는 않는다더군요. 어쨌든 럭스의 힘으로 그와 싸우면 저 하늘과 현재 상황은 해결 될 거예요.”
“미안하지만 그거 어떻게 사용하는지 나도 몰라.”
“아... 그, 그건 좀 뼈아프네요.”
러스트는 내 안에 있는 럭스의 힘만을 기대했었는지, 아쉬움이 가득 담긴 한숨을 뱉었다.
“연습을 해보셨나요?”
“계속했었지. 하지만 한 번도 발동 된 적 없었어.”
러스트가 떠난 후 시간이 날 때마다 파편의 힘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발동 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너에게 움브라는 아버지 같은 존재 아닌가? 내 쪽에 서도 되는 건가?”
생각에 잠겨 입술을 깨물고 있는 러스트에게 궁금했던 물음을 던졌다.
“칠죄종 중 친했던 건 엔비밖에 없어서 복수라는 말은 좀 우습고, 개념 없는 신에게 한 방 먹여버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남을 이용하면서 자신이 준 생명을 다시 뺏어가다니, 너무 제멋대로잖아요.”
움브라는 지금까지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남을 움직이기만 했었다. 러스트의 말대로 그림자의 신답게 개념 없고 지저분한 놈이다.
“생각을 좀 달리해야겠어요.”
“무슨 말이지?”
“움브라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았거든요.”
“뭐?”
러스트는 벽에 걸려 있는 대륙 지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에요. 이미 다녀오셨었죠?”
“필로세 숲!”
“네. 당신과 제가 갔다 왔던 숲의 깊은 곳 그곳에 움브라가 있어요.”
“몬스터가 있나?”
“많죠. 어마어마해요. 몬스터만이 아니라, 대륙에 숨어있던 흑마법사나, 살인귀들까지 있더군요. 역시 그림자를 지배하는 신다웠어요.”
러스트가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저렇게 반응 할 정도면 숫자나 질이나 보통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음기에 중독 된 몬스터와 인간들이 계속해서 그 숲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어요. 시간을 끌수록 더 많아 지겠죠. 빨리 끝내려고 바로 당신을 찾아 온 건데, 제 예상대로 움직이긴 힘들어졌네요.”
“내가 럭스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가?”
“네. 괜히 움직였다가 움브라에게 럭스의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들키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날 거예요.”
“음...”
러스트의 말대로 움브라는 내가 럭스의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바로 공격을 올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맞았다.
“아무 것도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건가...”
-유렌.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을 때 조용히 있던 아그네스가 날 불렀다.
‘왜?’
-나 그분 만난 것 같아.
‘그분?’
-그래. 네가 방금 얘기했던 럭스라는 분. 나 본 적 있어.
‘아...’
그러고 보니 필로세 숲에서 그림자 투견을 해치우고 하얀 방으로 소환 되었을 때 헬리나가 아그네스에게 무언가를 해준 적이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그분이 하신 말씀이 있었어.
‘뭐? 그걸 왜 지금 말해!’
-네가 아니라, 내게 한 말인 줄 알았으니까.
‘뭐라고 했지?’
-그림자가 있는 곳엔 태양도 있을 거라며, 겁먹지 말고 오라고 했어.
럭스가 저런 말을 그냥 남겼을 리가 없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확실했다.
“가야겠어.”
“네?”
“필로세 숲 말이야.”
“무, 무슨! 당신이 당하면 모든 게 끝나요! 정말 이 세상이 무너질지도 몰라요!”
멍하니 천장을 보던 러스트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이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어도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놈의 세력만 불리게 만들어 줄 거다. 그리고...”
손목에 걸린 아그네스를 한 번 쳐다본 뒤에 말을 이었다.
“방법이 있을 것 같아.”
**
“네? 이 일의 원흉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전하라고요?”
“그래. 모든 나라와 부족에 알려.”
“저, 정말 아시는 건가요?”
“그럼 내가 거짓말 하겠냐.”
러스트와 대화를 나눈 뒤 페루를 불러서 대륙에 있는 모든 실력자들에게 이 일의 원흉인 그림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고 알리라 했다.
“유렌님은 계속 저랑 같이 계셨잖아요. 어떻게 아신 거죠?”
“전에도 말했잖아. 나한텐 따로 정보통이 있다니까.”
“계속 모시고 있지만 유렌님은 따라갈 수가 없네요. 대단하세요.”
“내 찬양은 충분하니까. 빨리 가서 전하기나 해.”
“알겠습니다!”
페루가 고개를 숙인 뒤 바로 밖으로 나갔다. 똑 부러진 녀석이니, 이번 일에 도움이 될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나는 방을 나와서 성의 아래에 있는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카이젤.”
“왔나?”
“오셨어요?”
카이젤과 제니스는 함께 술을 만들고 있었다.
본인들은 재미로 술을 만들고 있지만, 남은 술을 병사와 기사들에게 보급해주어서 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있다. 둘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림자가 있는 곳을 찾았어.”
“음...”
“헉!”
카이젤이 침음을 삼키고, 제니스는 놀라서 술잔을 떨어뜨렸다. 직접 그 일을 겪은 자들에게 움브라는 공포 그 자체였다.
“도와줄 수 있지?”
“물론이죠!”
“그래. 다만 그놈 앞에 서면 난 도움이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러스트와 대화할 때 들었듯이 움브라를 상대 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카이젤이나 다른 사람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 할 거다.
“놈은 내가 상대 할 거야. 너는 그 전까지 길을 열어줘. 내가 최대한 힘을 쓰지 않게.”
난 최대한 힘을 소모하지 않고 움브라의 앞에 도착해야한다. 카이젤이 도와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드래곤인 내가 길을 뚫는 역할이라니 자존심이 상하는 군. 하지만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겠어. 그 놈은 너만 상대 할 수 있으니.”
카이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드래곤을 불러 올 순 없어?”
“전에도 말했지만 대부분의 드래곤은 이 세계가 멸망해도 상관하지 않을 놈들이다. 나나 볼카누이스가 특별한 거다.”
“역시 그런 건가.”
좀 아쉽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드래곤을 너무 게으르지 않게 설정할 걸 그랬다.
“그럼 나중에 작전을 짤 때 부르지.”
“그래.”
카이젤과 제니스에게 인사를 한 뒤 내 방으로 돌아갔다.
“포메라.”
포메라의 혼의 구슬을 꺼내서 녀석을 소환했다.
“오랜만에 부르는군.”
“네 집으로 가자.”
“지금 바로 말이오?”
“그래.”
포메라는 날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에게 할 말이 있나보군.”
거리도 짧고, 동굴에 워프장치도 있기 때문에 5분도 걸리지 않아서 포메라의 동굴에 도착했다.
“친구.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마나 응집이...”
해안 동굴에 도착하자, 가부좌를 하고 있는 라시드가 보였다.
“유렌 록스...”
“라시드.”
핏줄이 서있고 창백하던 모습과 달리 지금 라시드의 얼굴엔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그림자를 찾았다.”
벽에 기댄 채로 포메라와 라시드를 쳐다보며 이곳에 온 이유를 말했다.
“그, 그림자 괴물 말이오? 날 숨도 못 쉬게 만드는?”
“그래. 필로세 숲에 있다더군.”
“뭐 주워 먹겠다고 거기로 간 거요?”
“그건 나도 몰라. 다만 그곳으로 몬스터와 괴물, 악에 먹힌 인간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한다.”
“서, 설마 나 같은 흑마법사도 있는 거요?”
포메라가 깜짝 놀라서 바닥을 내리쳤다.
“그래. 흑마법사, 살인귀 등 인간들도 다양하다더군.”
“그럼 나도 놈에게 끌려가는 거 아니오?”
“넌 아니야. 갈 거면 진즉에 갔을 거다.”
마나 명상 덕분에 포메라는 신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신과 마나가 순수한 상태다. 움브라에게 먹힐 리가 없다.
“그럼 그 전투를 도와달라고 온 것이오?”
“그래.”
“물론이오. 언제라도 가겠소. 다만 성녀 옆자린 피해주시오.”
“아직도 무서운가보네. 그래. 알겠어.”
포메라는 8서클에 오르고 나서도 이레아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피식 웃고 조용히 있는 라시드를 보았다.
“나쁘지 않아 보이는 군. 살만한가?”
“내 몸을 내가 움직인다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소. 내겐 그럴 자격도 없지만...”
“친구. 자네도 나처럼 억지도 당했지 않나.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 말게. 어쩔 수 없던 일일세.”
“아니야. 그 악마의 유혹을 이겨냈어야 했어. 아니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어떻게든 도망쳐야 했지. 멍청하고, 의지가 약했던 내 잘못이야.”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포메라와 라시드는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 달 사이에 꽤나 친해진 것 같다.
“라시드. 혹시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이번엔 견딜 수 있나?”
“물론이오.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오.”
라시드가 주먹을 움켜쥐며 대답했다. 그의 눈빛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이 세상을 위해서 네가 해줄 일이 있다.”
난 움부라와의 전투 그 이후를 바라보기 위해 라시드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