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진정한 제왕의 검
“이프리트!”
내가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본 건 풍선처럼 자신의 몸집을 부풀리고 있는 이프리트였다.
쿠구구구.
이프리트의 크기는 거의 20m 가까이 커져 있었다. 놈은 에블린의 마력을 흡수해서 자신의 특수능력 중 하나인 불지옥을 사용하려 하는 것이다.
“엘라임! 제발 버텨! 이레아님!”
“알겠어요!”
로디엔은 남아있던 모든 마나를 엘라임에게 전해주어서 탈진하기 직전의 상황이었고, 이레아도 화염을 막기위해 신성력을 넓게 흩뿌려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빼액!”
빽빽이 역시 자신의 모든 정령력을 사용해서 성속성의 물을 이프리트에게 퍼붓고 있었다.
콰아아아!
엘라임과 빽빽이가 강력한 물을 끊임없이 퍼부었지만, 이프리트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불이 물과 이레아의 신성력을 잡아먹고 있었다.
화르르륵!
로디엔과 빽빽이의 정령력보다 에블린이 이프리트에게 전해주는 마나가 훨씬 더 거대했기 때문이다.
“일단 저 덩어리부터 먼저 처리해야겠군.”
신살은 정령에게도 치명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는 특성이다. 신살의 천판을 사용해서 만천화우를 쓰면 이프리트를 단숨에 역소환 시켜버릴 수 있을 것이다.
파아앙!
눈 깜짝 할 사이에 천화를 피워낸 후 바로 만천화우를 사용했다.
“만천화우!”
폭풍에 지는 꽃잎처럼 천개의 천화가 이프리트에게 쏟아져 내렸다.
-인간 따위가 감히!
이프리트는 자신에게 떨어지는 만천화우를 모조리 태워버릴 생각으로 손에서 화염의 용오름을 내뿜었다.
“이프리트. 안 돼!”
만천화우를 본 에블린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신살의 천판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소리를 질렀겠지만 이미 늦었다.
“끝났어!”
샤아아악!
떨어져 내린 만천화우는 이프리트의 회오리 불꽃을 갈라버리고 놈의 몸을 사정없이 뚫어버렸다.
-크아아아악!
만천화우에 직격당한 이프리트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놈은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20m가 넘게 커져있던 이프리트의 몸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신살의 특성 때문에 에블린에게 받은 정령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푸우욱.
이프리트의 모습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되고 있었다.
-크허헉, 망할 인간이 감히! 내가 너를...
이프리트는 마지막 말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정령계로 역소환 되었다.
전력을 발휘하는 정령왕조차도 내 만천화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정령왕이라, 첫 개시치고는 나쁘지 않군.”
신살의 천판으로 처리한 첫 번째가 이프리트라니, 괜찮은 시작이었다.
“이제 빠르게 처리해볼까.”
신살의 천판을 집어넣고, 비수를 꺼내 손에 쥐었다. 비수를 한 번 튕긴 후 바람처럼 움직이는 크리티스를 향해 날렸다.
“광뢰.”
파아앙!
한줄기 번개처럼 터져나간 비수가 내 분신과 치열하게 싸우던 크리티스의 오른쪽 허벅지를 노렸다.
“크윽!”
크리티스 앞에서 내 분신이 귀왕살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놈은 피하기보다는 신화의 위엄을 허벅지에 집중해 견디려고 했다.
푸칵!
크리티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비수는 놈의 신화의 위엄과 가죽을 종이처럼 찢어버렸다. 왼쪽 허벅지를 뚫고도 힘이 남아 오른쪽 다리에도 상처를 입혔다.
“크아악!”
크리티스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평범한 비수라면 놈의 신화의 위엄을 뚫지 못했겠지만, 내가 던진 비수는 기라녹스가 만들어준 신살의 비수다. 이 비수로 뚫지 못할 것은 없다.
“유, 유렌 록스!”
한쪽 팔이 잘린 와중에도 내 분신의 공격을 버티던 크리티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푸칵!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내 분신이 돌진해서 크리티스의 오른쪽 발목을 베어버렸다.
“크어어억!”
크리티스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놈은 신살의 무기에 베인 상처의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웅!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에 하늘을 보자, 카이젤이 악마를 발에 잡은 채로 하강하고 있었다. 악마가 도망치려고 버둥거리며 카이젤을 공격했지만, 그는 끝까지 악마를 놓지 않았다.
콰아아앙!
대지가 폭발하고, 지축이 뒤흔들렸다. 결국 카이젤이 악마를 땅에 깔아뭉갠 것이다.
“더러운 도마뱀이 어디서!”
“네놈이 있어야 할 시궁창으로 꺼져라!”
악마를 내리누른 카이젤의 입에서 거대한 마나가 소용돌이 쳤다. 한 점에 집중한 아이스 브레스를 쏘려고 하는 것이다.
“브레스가 네놈들만의 전유물인지 아느냐!”
아래 깔린 악마의 입에서도 대기를 가를 것 같은 마기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악마가 가진 특수능력 중 하나 마탄이다.
저 둘의 힘이 충돌하며 이 땅이 완전히 날아갈 것이다. 두 브레스가 마주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팔랑.
카이젤을 억지로 밀어내는 악마를 향해 두 마리의 혈화접을 날렸다. 물론 기라녹스가 만들어준 신살의 혈화접이다.
“이 따위!”
악마는 자신에게 펄럭거리며 날아가는 혈화접에 마기의 화살을 날렸다.
화아악!
혈화접은 마기의 화살을 타고 올라가 더 빠르게 악마에게 날았다. 악마는 혀를 차고선 고개를 돌렸다. 혈화접을 견디고 카이젤의 브레스에 대비하려는 생각이었다.
“끝났군.”
하지만 그건 놈의 생에서 최악의 선택이다. 크리티스가 왜 땅에서 기고 있는지 봤다면 저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이 잘못 된 선택으로 악마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퍼어억!
악마의 옆구리와 허벅지에 닿은 혈화접에서 검은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놈이 견뎌줄 거라 생각한 역혈의 피부는 나비의 이빨 앞에서 처참하게 찢겨졌다.
“크아아아악!”
극심한 고통을 느낀 악마는 비명을 쥐어짰다. 악마는 당연하게도 신살의 무기에 굉장히 취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놈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을 정도의 격통을 느꼈을 거다.
“끄으으으....”
악마의 입에서 생성되던 마탄이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마기를 집중할 정신력을 잃은 것이다.
“후우욱...”
카이젤은 내게 눈짓을 주고서 놈에게 아이스 브레스를 쏟아 부었다.
콰아아아아!
악마는 상처의 고통 때문에 제대로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브레스에 직격 당했다. 놈의 전신은 천천히 얼어붙다가 조각나서 깨져버렸다.
“이제 하나 남았군.”
라시드, 이왕자, 이프리트. 크리티스에 악마까지, 에블린이 준비했던 모든 수가 내 앞에서 모조리 박살나버렸다. 이제 남은 건 에블린 뿐이다.
“드디어 만났군.”
로브를 입은 채로 공중에 떠 있는 에블린을 보았다. 나와 내 분신, 카이젤, 로디엔, 아린, 이레아와 일리아까지 경기장에 남은 강자들이 모두 에블린을 둘러쌌다.
“...”
에블린은 로브를 펄럭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우우웅.
공중에 원형으로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동과 전송 금지 마법진이다. 아무리 저 여자가 9서클 마법사라고 해도 도망치지 못할 거다.”
카이젤은 용언을 사용해서 이 공간 자체에 어떤 이동 마법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시를 하지 않아도 딱딱 움직여주니, 아주 편했다.
“고마워.”
“빽!”
“그래. 너도 수고했다.
어깨에 내려앉은 빽빽이를 쓰다듬어 준 뒤 다시 에블린을 노려보았다.
“에블린. 크리티스, 이왕자, 라시드, 이프리트에 악마까지 네가 준비한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내려와라. 너만큼은 내가 죽을 때까지 직접 패주마.”
내 말에도 에블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직접 끌어내리려고 할 때 에블린이 후드를 벗었다.
“후...”
아름다운 얼굴에 뾰족한 귀, 회색 피부까지 전형적인 다크엘프였다.
“뭐, 뭐야...”
“무슨...”
에블린의 얼굴을 본 로디엔의 목소리가 떨려나왔고, 아린이 눈을 치켜떴다.
그녀들이 이렇게 놀란 이유는 에블린의 외모가 엘루나의 족장인 아르시아와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피부색만 아니라면 아르시아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어, 어떻게...”
엘루나에서 아르시아와 대화를 할 때 세필리아가 예뻐했다는 아르시아의 자매가 바로 저 에블린이다. 에블린은 타락한 엘프 지도자이자, 아르시아의 동생이다.
“어떻게 저렇게 닮을 수가...”
로디엔이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에블린의 정체를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니,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너만큼은 곱게 못 죽인다.”
연위결을 이용해서 에블린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녀는 연위결의 힘에 거부하지 않고 바닥으로 끌려내려왔다.
화아악!
에블린에게 의형투독을 뿌리면서 걸어갔다. 그녀는 내가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치지지직!
내가 에블린에게 닿기 직전 그녀의 얼굴과 몸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보라색 머리를 가진 인간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뭐야...”
에블린이, 겹쳐진 인간의 얼굴이 고개를 틀고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라시드의 일까지 해결 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 큭큭큭.”
에블린의 목소리가 처음들어 본 여자의 목소리와 겹쳐서 들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두 여자가 그림자에 겹쳐 있는 모습이라 기괴함 그 자체였다.
“넌 뭐야...”
에블린에게 저런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뭔지 모르겠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에블린]
[특성: 길을 벗어난 자, 마나의 지배자, 성좌예지, 공간장악lv5, 정령친화lv5...]
너무 많은 재능으로 인해 에블린의 특성이 한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건 분명히 에블린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과 목소리는 여전히 보라색 머리카락의 인간과 겹쳐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창조주의 눈을 끄려고 할 때였다. 에블린의 상태창이 지지직거리더니, 새로운 글씨들을 만들었다. 그건 내가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이름: 글러트니(Gluttony)]
[특성: 칠죄종-식탐(gula)]
글러트니?
지금 왜 글러트니가 나온 거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에블린을 보고 있었는데 왜 글러트니가 나온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저 여자...”
에블린과 겹쳐보이는 보라색 머리카락의 여자는 글러트니가 인간으로 위장할 때 사용하는 아카사라는 존재다.
글러트니와 에블린은 서로 싫어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이인데 둘이 겹쳐 보인다니, 이건 내가 짜놓은 설정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치지지직!
에블린과 글러트니의 상태창이 합쳐지더니,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
???
이건...
이 상태창은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필로세 숲의 가장 깊은 곳에 가서 그림자 투견을 봤을 때 그때와 완전히 동일한 상태창이었다.
“유렌 록스. 넌 항상 내 예상을 뛰어넘는군. 이번엔 정말 놀랐어.”
겹쳐 들리던 에블린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졌다. 그 목소리는 여태까지 들었던 그 누구와도 달랐다. 고요하고, 기괴했으며, 찐득하고, 소름이 끼쳤다.
“아아악!”
“크아악!”
“무, 무슨!”
에블린의 아니, 무언지 모를 존재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귀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사람만이 아니다. 엘프인 로디엔과 드래곤인 카이젤도 마찬가지였다.
“빼애...”
빽빽이도 내 주머니로 들어가서 날개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이 땅에 제대로 서 있는 건 나와 내 분신밖에 없었다.
“이 상태는 분명히...”
빽빽이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그림자의 투견, 그 놈을 봤을 때의 포메라나 빽빽이와 같은 상태였다.
“넌 대체 뭐야!”
“잠시 후에 알게 될 거야.”
“큭...”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에블린을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독을 사용하고 비수를 들었다.
“내가 네게 당한 건 사실이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아직 하나 남았지.”
“뭐?”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는 존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달인의 검에 겨누어진 것처럼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후우욱.
빙굴에 들어온 것처럼 소름이 돋아 오르게 만드는 감각은 왕궁의 입구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고오오오.
숨쉬기 거북할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 솟아올랐다.
화아악!
한줄기 선처럼 얇고 서늘한 빛이 번쩍였다.
빛에 닿은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갈라졌다.
난 이 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제왕의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