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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화 원한은 철저하게 (227/241)

227화 원한은 철저하게

“으음...”

허무로 가득 차있던 라시드의 눈은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저 눈만 봐도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라시드?”

“가, 감이 이상하군. 내가 내 몸을 조종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라시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손가락을 하나 씩 까딱 거렸다. 그의 얼굴엔 어색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돌아왔군.”

“네 말대로 모든 것이 하얀 세상에서서 겉의 인격과 싸웠다. 네가 마지막에 마음의 힘이 중요하다고 말해줬던 게 큰 도움이 됐어.”

라시드는 내가 준 힌트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던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지만 아직 확인해야 할 게 남았다.

겉의 인격이 날아갔으니, 그림자의 그릇이 없어졌는지 확인을 해봐야 한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라시드]

[특성: 검신(劍神), 발전하는 재능, 마법저항lv5, 상태이상저항lv5.]

“없어졌어.”

라시드의 특성 중 마지막을 장식하던 그림자의 그릇이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 에블린이 라시드를 이용해서 저지르려는 계획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제 에블린의 계획은 깨진 것이냐?”

“그래. 그 망할 여자가 너를 이용하려던 계획은 무너졌다. 아주 제대로 엿을 먹였지.”

에블린이 분노에 휩싸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 분명히 말이 안 나올 정도로 화를 내고 있을 거다.

“그럼 이제 난 죽어도 되는 건가?”

“아니, 죽으려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죽어라. 그때가 되면 네가 죽든 혹은 반성을 하며 봉사를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런가? 그래. 그래야겠지.”

라시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포메라의 혼의 구슬을 꺼내서 녀석을 불렀다.

“주인. 분신만 남기고 어딜 갔던 거요?”

포메라는 만마의 창으로 땅을 내려찍으며 나타났다.

“상황은 어떻게 됐지?”

“주인의 분신이 크리티스의 팔을 베어버렸으니, 금방 잡을 수 있을 거 같소. 분신도 그렇게 강하다니, 주인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소.”

조금 걱정했는데 분신이 제 역할을 해준 모양이다.

“주인이 뿌린 독 덕분에 경기장 내부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정리가 끝났소.”

“카이젤하고 악마는 어떻게 됐어?”

“둘은 아직도 천공에서 싸우고 있소. 거의 막상막하인 것 같소. 다만 새로운 적이 나타났소.”

“적?”

“그렇소.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나타났소.”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를 소환 할 수 있는 사람은 에블린 딱 한 명이다. 드디어 그녀가 앞에 나선 것이다.

“주인을 따르는 엘프 여자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소환해서 이프리트와 싸우고 있소.”

로디엔이다. 로디엔이 엘라임을 소환해서 이프리트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에블린과 로디엔은...

“그럼 시간이 별로 없군.”

“언데드?”

포메라를 본 라시드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내가 언데드인 포메라와 관련이 있는 것에 놀란 것이다.

“이 인간은 누구요?”

“너희 둘은 비슷하다. 둘 다 에블린에게 인생이 잡아 먹혔으니까. 포메라는...”

난 간략하게나마 둘의 사연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 그렇군. 당신은 나보다 더 심했구려.”

“아니, 당신은 인간을 잃어버리지 않았소. 당신도 만만치 않소.”

“그래도 난 주인에게 구원을 받았잖소.”

“그건 그렇군...”

“정은 나중에 쌓고, 지금은 할 일이 있어. 포메라.”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포메라와 라시드를 갈라놓았다.

“할 일?”

“라시드의 몸에 혹시 추적 장치 같은 게 있나?”

“흠...”

포메라는 라시드의 몸을 스캔 한 후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것도 없소.”

“역시 그렇군.”

내 눈으로 봤을 때도 없고, 포메라도 찾지 못했으니, 추적 장치는 없을 거다. 에블린은 자신의 세뇌를 너무 믿었거나, 그림자의 그릇으로 라시드를 추적했을 거다.

“그럼 라시드를 숨기고 나서 다시 와.”

“그렇군. 라시드 형제는 이제 아무런 힘도 사용하지 못하니...”

“형제? 벌써 형제가 됐어? 어쨌든 맞아. 빨리 갈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알겠소. 내 동굴과 연결되어 있으니 바로 보내 줄 수 있소. 그럼 주인은 다시 나갈 거요?”

“아니, 난 꼭 처리해야 할 놈이 있어.”

**

“헉! 허억!”

이왕자는 유렌이 라시드가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통로를 통해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제, 제기랄!”

지금 그에겐 뒷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유렌 록스의 눈빛과 그에게서 나오는 패도적인 기세만으로도 온 몸의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유렌 록스. 그 망할 놈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어! 모든 게!”

그 놈만 오지 않았다면 형과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다. 누구도 의심받지 않게 왕위를 받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유렌 때문에 모든 계획이 깨졌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랑 무슨 원수라도 진거냐고!”

이왕자는 자신이 먼저 유렌을 죽이려 한 것도, 아버지와 형을 죽이려고 한 것도 잊고 그저 유렌이 자신을 괴롭힌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과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른 괴물이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야해.”

이왕자는 자신이 고용한 암살자들을 숨겨둔 자신의 궁으로 향했다. 아직 몬스터들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헉! 헉!”

이왕자는 자신의 궁으로 들어가서 암살자들이 모여 있는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곳엔 자신의 심복들과 암살자들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희가 움직일 때입니까?”

“계, 계획이 바뀌었다. 왕자 궁에 있는 모든 재물을 챙겨서 주머니에 담아. 왕궁을 빠져나가야 해. 암살자들만 움직여. 저 놈들을 사용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일왕자는 뒤에 있는 암살자들이 듣지 못하게 자신의 심복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는 암살자를 방패로 쓴 뒤 왕궁을 빠져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시가 급해. 빨리.”

“저, 저기 왕자님...”

“뭐야! 급하다고!”

이왕자는 급한 상황에서 자꾸 시간을 끄는 자신의 심복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엔 빠릿빠릿하면서 오늘 따라 참 이상했다.

“아, 아니 뒤에 그...”

“뒤?”

뒤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빙굴에 들어온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오싹한 느낌이 온 몸을 덮었다.

“어...”

이왕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엔 그가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인물이 빙긋 웃고 있었다.

“여기가 네 최후의 보루로군.”

“으아아아아악! 아아악! 크아아아!”

유렌을 본 이왕자가 뒤로 자빠졌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바퀴벌레처럼 기어갔다.

“유, 유렌 록스! 여길 어떻게 온 거냐! 대체 넌 뭐야!”

“왕족이 무슨 비명을 그렇게 촌스럽게 질러대.”

유렌이 지하실의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왔냐고! 분명 싸우고 있었잖아!”

“냄새로 따라왔지.”

“내, 냄새?”

“그래. 시궁창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모를 수가 있나.”

유렌은 단순히 이왕자를 놀리기 위해서 냄새라고 말 한 것이 아니었다. 이왕자가 도망을 칠거라 예상하고 놈에게 미리 만리추종향을 발라 놨다.

포메라에게 라시드를 맡긴 후 만리추종향의 냄새를 따라 이왕자를 따라 온 것이다.

“좀 많네. 아주 단단히 준비했어.”

“으으...”

이왕자는 유렌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이빨이 덜덜 떨렸다.

“내가 맞춰볼까? 나와 세피로스를 싸우게 한 뒤 남은 쪽을 공격하기 위해 이들을 준비 시켰겠지?”

“억!”

“헉!”

이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기사들의 반응만 봐도 유렌의 말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지금은 저 암살자들을 버리는 패로 쓴 다음 도망치려 했겠지. 참 너 답다. 아서 브라이어드.”

“아...”

이왕자와 새로운 계획을 들었던 그의 심복이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그들의 생각은 완벽하게 유렌에게 읽히고 있었다.

“넌 뭐야! 넌 뭐냐고! 이 악마 같은 놈!”

“악마는 너고.”

“왜 날 방해하냔 말이다! 너만 없었으면, 너만 죽었으면! 내가, 내가 왕이 되었는데!”

이왕자가 자신의 입술을 뜯으면서 절규가 담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럴 거면 정당한 방법을 썼어야지. 그리고 먼저 칼을 뽑은 건 네놈이다.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거면 뽑지도 말았어야지.”

유렌은 귀를 후비며 그를 비웃었다. 자신은 그렇다 치고 피를 이은 가족들을 죽이려 들어놓고 저런 반응이라니, 놈에게 구역질이 나왔다.

“네가 생각한 게 얼마나 허무한 것들이었는지 보여주마.”

유렌이 앞으로 한 발 나왔다.

“뭐, 뭣들 하느냐! 저 악마 같은 놈을 죽여! 방금 싸우고 와서 힘이 빠졌을 거다!”

이왕자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검을 빼들었고, 암살자들이 낫과 단검, 비수들을 꺼냈다.

“으음...”

암살자와 기사들은 유렌의 명성을 알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오지 않는 군. 너희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끝났다.”

유렌이 한 발 더 앞으로 나왔다.

“지랄하지...”

“내가 죽...”

“어...”

유렌에게 달려들려던 암살자, 기사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었다. 힘이 빠진 듯 사지를 떨었고, 오공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모, 몸이 움직이질 않아.”

“사, 살려줘.”

유렌은 인간의 의지를 꺾어버리며 지독한 고통을 주는 당가십독 중 하나 의형투독을 사용했다.

의형투독은 칠보단혼독보다 치사성은 약하지만 고통은 몇 배로 심하다. 유렌이 가지고 있는 독 중 가장 지독한 고통을 느끼게 해주는 독이다.

“아아악!”

“크아아악!”

암살자와 기사들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지옥의 고통을 느끼곤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며 죽어갔다.

“아...”

유렌은 이들을 훨씬 쉽고 빠르게 죽일 수 있음에도 일부러 의형투독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이왕자에게 더욱 큰 정신적인 고통을 주기 위해서였다.

“으아악!”

이왕자는 독에 중독되지 않았음에도 옆에 있는 기사의 칼을 들어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 했다. 유렌은 연위결을 사용해서 그 검을 자신에게 불러왔다.

“아아...”

“이제 네 차례다.”

유렌은 이왕자의 혈도를 제압한 뒤 분근착골을 시전 했다.

“헉, 으아아아아악!”

이왕자에 입에서 피를 토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유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의형투독까지 중독 시켰다.

“컥! 커헉! 아악!”

두 개의 지독한 고통이 겹쳐서 이왕자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유렌은 의형투독의 고통만 남기고 생명을 죽이는 독성은 없애버렸다.

더욱 많은 고통을 길게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였다.

“내가 선 넘지 말라고 했지?”

“컥어억,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아니, 죽, 죽여줘! 제발!”

“인륜을 넘은 괴물에게 줄 배려 따윈 없다.”

“아아악!”

유렌은 굳은 표정으로 이왕자를 한 번 본 뒤 지하실을 나갔다. 지하실의 입구를 무너뜨려서 누구도 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이왕자는 지옥에 간 것보다 더 한 고통을 느끼다 누구의 관심도 느끼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에블린. 다음은 너다.”

**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유렌 록스에게 죽었어야 할 라시드가 연기처럼 아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에블린은 비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라시드...”

유렌에게 죽든, 힘을 모두 써서 죽든, 라시드가 어떻게든 죽어야 다음 단계가 벌어지는데 아예 사라져버렸다. 이런 상황은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유렌 록스. 또 그 망할 인간이 방해를 한 건가...”

자신이 계획한 일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유렌 록스밖에 없었다. 항상 그렇듯 그 미꾸라지가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됐으면, 그가 올 때까진 버텨야 해.”

에블린은 왕궁의 입구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프리트!”

-뭐냐. 에블린.

“시간 끌기는 됐어. 이곳을 불지옥으로 만들어.”

-큭큭. 좋다. 오랜만에 힘 좀 쓰겠어.

10M가 넘는 이프리트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에블린의 마력을 받아 자신의 본체에서 힘을 끌어오는 것이다.

-크윽, 로디엔!

“미안해. 엘라임! 이게 한계야!”

이프리트를 정면에서 막고 있던 엘라임이 힘겨운 신음소리를 뱉었다. 에블린과 로디엔의 마력 차이 때문에 이프리트에게 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로디엔. 너라도 도망쳐라! 얼마 버티지 못해! 저건 이프리트의 불지옥이다. 이 땅 전체가 불에 타오를 거다!

“으윽...”

로디엔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기장엔 아직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을 두고 홀로 도망칠 순 없었다.

“엘라임. 내 생명력을 써줘.”

-뭐? 그건...

“상관없으니까. 빨리!”

-너는 정말...

로디엔의 마음을 느끼고 그 부탁을 받아들이려던 엘라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꽃잎처럼 작은 수백 개의 그림자였다.

“아...”

둘은, 아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귀신에 홀린 것처럼 머리를 들어올렸다.

“저, 저건...”

하늘엔 벚꽃처럼 붉은 빛을 띄고 있는 천개의 천화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만천화우.”

유렌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신살의 만천화우가 건물만 해진 이프리트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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