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라시드
에블린이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국왕과 왕족들에게 많은 몬스터들이 붙었다. 평범한 몬스터들만이 아니라, 대형 몬스터들에 라이칸과 다크엘프까지 그들을 추격했다.
“폐하를 지켜라!”
근위기사단장인 알포스 후작의 지시에 기사들이 국왕과 왕족들을 벽처럼 둘러싸고 몬스터들과 치열한 전투를 개시했다.
콰아아앙!
알포스 후작은 오러 블레이드를 개방해서 자신의 앞에 있는 몬스터들의 벽을 일격에 깨부쉈다.
“젠장!”
알포스 후작이 아쉬움이 담기 욕설을 내뱉었다. 홀로 나서서 몬스터들을 전부 해치우고 싶지만, 뒤에서 기회를 노리는 다크엘프와 라이칸들 때문에 국왕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냐. 마법 방어는, 기사들은...”
“아버지. 정신 차리셔야합니다!”
일왕자는 혼란에 휩싸여 있는 국왕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형님의 말이 맞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셔야합니다! 아버지!”
이왕자도 국왕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국왕이 입술을 깨물며 경기장을 보았다.
“백성들이 저곳에 있지 않나. 어떻게 나만 안전한 곳으로 간단 말이냐!”
“경기장엔 유렌 후작과 그의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믿으셔야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납치되시면 나라 자체에 문제가 생기고 유렌 후작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멀리, 멀리 보셔야 합니다!”
이왕자가 충혈 된 눈으로 국왕에게 호소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은 이왕자의 깊은 생각과 카리스마에 반했고, 국왕의 눈빛에도 힘이 돌아왔다.
‘저 자식...’
일왕자는 이왕자의 행동이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본인이 나라를 이 꼴을 만들어놓고, 저런 행동을 하다니 안 좋은 쪽으로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으니,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던 거겠지.’
일왕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놈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폐하! 몬스터들의 숫자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아버지. 제 궁은 작고, 뒤편이 막혀있어 수비하기에 좋은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몰라 몇 가지 방어 마법도 설치해 놓았으니, 제 궁으로 가시죠.”
알포스 후작의 말에 이왕자가 즉답했다. 일왕자는 이왕자의 저 대답이 미리 준비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대로 이왕자 궁에 가면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다.
“아버지! 이왕자 궁은 외벽이 약합니다. 왕궁 지하에 왕족들을 위한 수호의 방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으로 가야합니다.”
“음...”
일왕자의 말에 국왕이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일왕자는 여기서 쇄기를 박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호의 방엔 밖으로 향하는 통로도 있으니, 문제가 생기면 도망칠 수 있을 겁니다! 이왕자 궁은 방어에 좋지만 밖에서 공격당하면 궁이 무너져 전멸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웬. 네 말이 맞다. 왕궁으로 가자!”
일왕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왕자가 준비해 둔 것은 분명히 이왕자궁 안에 있을 테니, 왕궁으로 간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다.
“전열을 갖춰라! 왕궁지하의 수호의 방으로 간다!”
“예!”
기사들이 자리를 잡고, 왕족들을 보호하며 왕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뿌드득...”
일왕자는 옆에 있던 이왕자가 이를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흘깃 보니, 녀석은 차가운 얼음이 된 것처럼 표정이 굳어있었다.
‘됐어!’
아서의 계략이 깨진 게 확실했다. 이제 유렌이 모든 상황을 처리하고 오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라면 분명히 아서가 이 일들을 꾸민 증거도 가져와줄 거다.
“그웬, 아서 뭣들 하는 거냐. 빨리 달려라!”
“알겠습니다.”
일왕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국왕의 뒤를 따라 달렸다. 이왕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뛰었다. 하지만 땅을 보는 그의 얼굴엔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미소가 피어있었다.
“큭큭...”
**
쿠쿠쿠쿵!
근위 기사들의 활약으로 왕족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왕궁 지하에 있는 수호의 방으로 들어갔다.
치이이이잉!
마법사가 수호의 방에 마력을 주입하자, 방 외부와 내부에 보호마법이 생성되었다.
“이제 안전할 겁니다.”
“그래. 모두 수고했네. 다만...”
국왕은 밖에 있는 백성들을 걱정되는지, 굳게 닫힌 수호의 문을 두드렸다.
“밖을 걱정하시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유렌 후작이 자신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저, 정말이냐?”
“단상을 떠나기 전 유렌 후작이 자신을 믿고 빨리 폐하를 모시고 도망치라 했습니다.”
단상을 떠나기 전이 아니라, 결승전이 벌어지기 전에 했던 말이지만 일왕자는 국왕을 안심시키기 위해 작은 거짓말을 했다.
“확실히 유렌 후작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는 정말 크라시스의 복이나 다름없어.”
“그렇죠. 정말 큰 복입니다.”
일왕자는 국왕의 마음을 풀어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렸을 때 국왕 몰래 온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수호의 방의 힘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서는 뭘 하고 있지?’
일왕자는 이왕자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왕자는 수호의 방 끝 벽에 있는 방패 문양을 만지고 있었다.
그 벽 뒤가 바로 비밀 통로기 때문에 그가 이상한 짓을 하는 지 감시하기 위해 다가갔다.
“형님.”
“응?”
“여기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이왕자가 벽에서 손을 떼고 일왕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엔 희열과 흥분, 살의, 그리움, 즐거움 같은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그, 그래. 아버지 몰래 너와 몇 번 왔었으니...”
“그래요. 여길 기억하고 있는 건 형님만이 아니라는 거죠.”
“뭐?”
이왕자가 중지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벽에 새겨진 문양에 가져다댔다.
“제가 처음부터 가고자 했던 곳은 바로 이곳 수호의 방이었습니다. 형님의 단순한 생각 따위는 진즉에 파악했죠.”
“아서 너...”
이왕자가 기괴한 웃음을 지음과 동시에 반지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검은 기운은 벽에 그려진 수호의 문양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뿌드드득.
수호의 문양이 갈라지며, 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벽은 모래로 지어놓은 것처럼 아주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아서!”
“너, 너 뭐하는 짓이야! 이 정신 나간 놈!”
“이왕자! 뭐하는 거요!”
국왕과 일왕자, 알포스 후작이 이왕자의 행동에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이왕자 곁에 근위기사들이 있었지만, 그가 이런 짓을 벌일 줄은 생각을 못했기에 말리지 못했다.
“원래 이렇게 됐어야 하는 일입니다. 망할 잡종 놈 하나 때문에 너무 늦어진 거죠.”
“뭐? 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국왕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들의 행동과 말이 이해되질 않았다.
“이왕자. 긴급 상황이므로 지금부터 당신을 포박하겠소.”
“포박이라... 할 수 있다면 해보도록.”
알포스는 이왕자의 비웃음을 무시한 채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왕자는 웃음을 유지한 채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도망쳐봐야...”
치이이잉!
알포스가 이왕자에게 손을 올릴 때 무너진 벽 뒤에 있는 비밀통로에서 다시 한 번 검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뭐, 뭐야...”
검은 기운에서 나오는 지독한 기세에 알포스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촤아악!
검은 기운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젊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엔 소름끼칠 정도로 색이 새까만 검이 들려있었다.
“왔구나.”
나타난 검사는 이왕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아아...”
“어, 어떻게 이런 기운이...”
고작 한 명의 검사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압도적인 기세에 근위기사들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기세만으로 목이 달아날 것 같았다.
“음...”
알포스 후작마저 근육이 위축되고, 숨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앞에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검사는 그가 여태까지 상대했던 그 누구보다 강한 상대였다.
“아서. 너 설마 저자를 믿고 이일을 벌인 것이냐?”
“아뇨. 한 단체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친구는 그곳에서 빌려준 친구죠.”
“그럼 설마 밖의 저 습격도...”
“그렇습니다. 그것도 제가 허락했죠. 경기장 주변에 전송마법을 위한 보석설치도 제가 했습니다. 후후.”
이왕자는 뒷짐까지 지며 여유롭게 말했다. 그의 얼굴엔 평생 본 적 없는 사이한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아서!”
“조용히 말하셔도 됩니다. 저 귀 안 먹었습니다.”
“네가 어떻게! 네가!”
“아서. 이 개자식!”
이왕자의 능청스러운 말에 국왕과 일왕자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근위기사들도 분노로 이를 악물었다.
수호의 방에 있는 모두는 이왕자 앞에 있는 검사만 아니었다면 당장 달려가 그를 때려잡았을 거다.
“그러게 리자드맨 킹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형님. 그때 뒤졌으면 아버지와 여기 기사들도 살아서 나를 모셨을 거 아니야. 응?”
“서, 설마 리자드맨 킹이 나타난 것도 너와 관련이 있던 것이냐?”
“그때 형님이 죽었으면 아버지는 뒤로 물러나셨을 겁니다. 항상 호통을 치시지만 아버지는 형님을 좋아하시잖아요. 계획대로 됐다면 지금 쯤 제가 왕이 되었을 텐데 정말 아까워요. 뭐 이젠 상관없지만. 하하하하!”
“아, 아서...”
국왕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앞에 있는 건 수십 년간 봐온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괴물 같았다. 그의 웃음 소리에 속이 울렁거렸다.
“너, 너는 인간이 아니야! 너는 악마다! 아니, 악마보다도 못해! 너는...”
일왕자는 가슴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할 수 만 있다면 아서 놈을 죽을 때 까지 두들겨 패고 싶었다.
“알포스 후작.”
“예. 폐하.”
“저 녀석을 잡아와주게. 저 놈은 평생 감옥에 가둬둬야겠어.”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국왕은 차마 처형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그 명령 완수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이왕자를 보호하는 저 젊은 검사는 마스터입니다. 그것도 저 보다 강한...”
알포스는 이왕자의 말을 들으면서도 앞에 있는 젊은 검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렸다간 그의 검에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모두 죽이는가?”
검은 머리 검사에게서 묵직하고 감정이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말만한다면 당장이라도 이곳의 모두를 죽여 줄 것 같은 사신의 목소리였다.
“흐흥...”
이왕자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가락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전부 43명인가? 혹시 살고 싶은 사람 있어?”
“미친놈!”
“형님은 미안하지만 안 돼. 물론 아버지도. 아! 혹시 알포스 후작은 내게 올 생각 있나? 나를 따르면 작위를 공작으로 올려주지.”
한 번 드러낸 이왕자의 광기는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밖에 있는 악마보다 더한 사기와 광기가 함께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전혀 몰랐소. 이왕자.”
“인간에겐 누구나 남들이 모르는 얼굴이 있잖아? 나도 그런 거지. 어쨌든 거부로 알겠어. 마스터가 아깝지만 어쩔 수 없네. 큭큭.”
이왕자는 사람들에게 방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누구도 살려줄 생각은 없었어. 이곳에서 나만 살아남아야 비극의 왕이 될 수 있으니까. 큭큭큭. 다른 왕족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아 크라시스를 다스리는 아서 브라이어드. 이 얼마나 멋진가!”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
“큭큭. 이제 됐어. 전부 죽여라. 라시드.”
이왕자의 앞에 있던 젊은 검사는 소설의 원 주인공 라시드였다. 유렌이 찾던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검을 세워 알포스 후작을 겨누었다.
“하아앗!”
알포스 후작이 오러 블레이드를 발동한 채 라시드에게 돌진 했다. 라시드의 검에도 검은색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올랐다.
콰앙!
두 마스터가 전력으로 부딪치자, 방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커헉!”
알포스 후작은 라시드와의 첫 번째 격돌에서 바로 피를 토했다. 같은 마스터지만 지닌 실력의 차이가 극심해 내상을 입은 것이다.
“아...”
실력이 훨씬 떨어지는 일왕자가 봐도 알포스 후작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당한다면 이곳의 누구도 살 수 없다. 전멸이다.
거기다 라시드라는 놈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일왕자는 자신의 팔찌에 박혀있는 사각형 보석을 뽑았다. 가이린에서 열린 축제 때 유렌이 주었던 팔찌다. 목숨이 위험한 일이 생기게 되면 팔찌의 보석을 뽑으라고 했었다.
“제발!”
이 일을 해결해줄 사람은 세상에서 딱 한 명 유렌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파아아악!
보석이 깨지며 방안을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일왕자는 그 빛에 손을 모아서 기도를 올렸다.
“제발, 제발 와줘! 유렌! 제발! 어...?”
푸른빛이 가라앉았지만 방에선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단순한 라이트 마법이 켜졌다 꺼진 것 같았다.
“아아, 이게...”
“뭐야? 형님 또 무슨 머저리 짓을 벌인 거요? 큭큭. 여전히 멍청하군.”
푸른빛에 긴장했던 이왕자가 여유를 되찾고 일왕자를 비웃었다.
“라시드. 뭐해! 그 영감 죽여 버려.”
빛 때문에 뒤로 물러섰던 라시드가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크으으...”
알포스 후작도 검을 세웠지만 눈이 풀려있었고, 검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다음 격돌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파아앗!
라시드가 알포스에게 쇄도하는 순간 일왕자의 보석에서 다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죽여!”
“알겠소.”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알포스 후작의 목에 검을 날렸다. 알포스 후작은 그 검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에겐 검을 움직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
“안 돼!”
“단장님!”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라시드의 검은 알포스의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찌지지직!
모두가 알포스의 죽음을 확신하고 절망에 빠질 무렵 푸른빛이 찢어지고 그 안에서 붉은 단검을 든 남자가 튀어나왔다.
캬아앙!
알포스 후작에게도 막힌 적이 없었던 라시드의 검이 가볍게 튕겨나갔다.
“크으윽!”
“무, 무슨!”
라시드의 무표정이 경악으로 변하고, 이왕자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아아!”
절망에 휩싸였던 국왕과 일왕자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피어났다.
“딱 맞췄나.”
“유렌!”
“유렌 후작!”
최악의 상황을 깨버린 남자 유렌은 뒤를 돌아, 국왕과 일왕자에게 믿음직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