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훈련 종료
“으음...”
크라시스 왕국의 이왕자 그웬 브라이어드는 자신의 궁 앞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초조한 사람처럼 자신의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아!”
이왕자가 자신의 오른손 손톱들을 모조리 뜯고, 왼손을 입으로 가져가려 할 때 행정관 한 명이 이왕자 궁으로 달려왔다.
“이왕자 저하!”
달려온 행정관은 이왕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그딴 건 됐고. 어떻게 됐어? 빨리 말해!”
이왕자는 예를 취하는 행정관을 거칠게 일으켜 세운 뒤 빨리 말하라며 어깨를 내리쳤다.
“유, 유렌 록스가 자신의 이름을 건 무술대회 개최를 받아들이겠답니다.”
“그래? 확실해?”
“네. 놈이 동의서를 보낸 것을 확인했습니다.”
“큭큭. 그렇단 말이지.”
이왕자는 언제 초조했냐는 듯 이를 드러내며 잔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알겠다. 수고했어.”
“네!”
행정관을 돌려보낸 뒤 이왕자는 궁으로 들어갔다. 그는 시종들의 인사를 대충 받으며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헉!”
방문을 연 이왕자는 방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방에 있던 사람은 회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붉은 입술만 보이고 있었다.
“놀라게 해드렸군요. 이왕자 저하.”
회색 로브 안에서 맑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니. 괜찮소. 별로 놀라지 않았으니.”
이왕자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옷을 정리했다. 그는 주변을 살펴본 뒤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에블린. 당신에게도 정보가 들어간 거요?”
“네. 저도 유렌 록스가 대회 개최에 동의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로브를 입고 나타난 여성은 에블린이었다. 그녀는 이미 유렌이 무술 대회 개최에 동의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 망할 놈을 죽일 수 있는 거요?”
“물론이에요.”
에블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며 손을 흔들었다.
“왕자 저하께서 다시 저희의 손을 잡아주셨으니, 유렌 록스를 죽이고, 당신을 이 나라의 왕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으음...”
이왕자는 에블린의 확정적인 말에도 걱정이 되는지 얇은 신음소리를 냈다.
“유렌 록스. 처음부터 그놈만 없었으면...”
최근에 일왕자가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세력을 모으고 인망을 쌓고 있다. 그 모든 일의 원인은 유렌 록스다.
일왕자 본인의 능력보다 유렌이 그의 뒤에 있다는 이유로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 믿으셔도 됩니다.”
“그 소리는 리자드맨킹 때도 했소.”
“아뇨. 그 때와 지금은 달라요.”
에블린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이왕자를 마주보았다.
“다르다?”
“네. 이번에는 저희 쪽에서 가장 강한 분이 나서거든요.”
에블린은 크리티스를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그라면 상대가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유렌 록스는 현재 대륙 최강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그랜드 마스터라는 소리까지 들리는데 정말 가능하겠소?”
“가능해요. 유렌 록스가 정말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그분을 이길 수는 없어요.”
“저, 정말이오?”
“네. 왕자님께선 저희만 믿고 계시면 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믿을 수밖에 없지.”
이왕자는 에블린에게 믿겠다고 말하며 웃었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유렌 록스와 세피로스 놈들이 싸우면 둘 중 살아남은 놈들도 큰 상처를 입을 거야. 그때를 노려야 해.’
이왕자는 세피로스와 유렌 록스가 싸우고 나서 살아남은 쪽을 공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을 위해서 누구도 모르게 암살자 단체를 고용해서 궁에 숨겨놓은 상태다.
“이번엔 저도 직접 움직일 테니, 믿어주세요. 대회가 진행되면 유렌을 죽임과 동시에 왕위에 오를 실 수 있을 겁니다.”
“왕위는 어떻게 해줄 생각이오? 당신이 나설 거요?”
“아뇨. 제가 준비한 비밀병기가 있어요.”
“비밀병기?”
에블린은 비밀이라는 듯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그녀의 머릿속에 검은 검을 든 남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날이 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음, 그럼 내가 뭘 해줘야 할 것은 없소?”
“왕자님은 도와주셔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어요.”
“그게 뭐요?”
에블린은 매력적인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지금부터 왕자님은...”
**
“끄으으윽...”
유렌이 만든 흑철기사단의 기사 칼론은 눈앞이 허옇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팔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떨리고,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아아악!”
“주, 죽겠어. 정말...”
“커허헉!”
칼론만이 아니라, 흑철기사단 대부분이 연무장 바닥을 기고 있었다. 제대로 서있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빨리 안 일어나?”
유렌의 목소리를 들은 기사들은 호랑이 앞 토끼가 된 것처럼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쯧...”
유렌이 혀를 차자, 기사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지난 두 달간 저 소리가 들렸을 때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겪어봤기 때문이다.
“자, 다시 시작한다. 전부 덤벼.”
유렌은 자신 앞에 선 92명의 기사들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장난스러운 모습을 본 기사들은 이를 갈았다.
“그래. 그 분노를 나한테 풀라고.”
유렌은 2달 동안 기사들에게 대련만 지시했다. 기사들끼리의 대련이 아닌, 유렌 본인과의 대련이었다. 그는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만 철저하게 공략했다.
유렌은 낮의 대련을 통해 기사들을 아주 철저하고 고통스럽게 조져버리고, 밤에 약점을 보완할 시간을 주었다.
다음날 기사들이 약점을 보완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나타나면 새로운 약점을 찾아서 완벽하게 밟아버렸다.
이 훈련이 2달 동안 계속 반복되었으니, 기사들은 악만 남았을 수밖에 없었다.
“으드득...”
무표정이 패시브인 아린마저 어금니를 악물고 유렌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이번만큼은 이긴다!”
“이야야아!”
기사들은 각자 악이 담긴 함성을 지르며 유렌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마음에 든다는 듯 방긋 웃으며 목검을 내뻗었다.
“아...”
칼론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유렌의 목검을 보며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기껏 밤을 새서 오른쪽 허벅지의 약점을 보완했건만 옆구리로 날아오는 이 목검을 피하거나 막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꾸엑!”
칼론은 유렌의 목검에 옆구리를 얻어맞고,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바닥을 기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옆구리 약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2달간의 훈련의 효과였다.
퍼억! 퍽! 빠각!
유렌은 칼론을 팼듯이 다른 기사들도 모조리 때려 눕혔다. 87명의 기사를 처리하는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아린과 크라이드, 브리카였다.
“너희도 와야지?”
“으으, 갑니다!”
브리카가 양손으로 검을 든 채 유렌에게 돌진했다. 그의 이전 약점은 발목이었는데, 어느새 약점을 메꿔버렸다. 수호자의 특성상 약점이 잘 보이지 않지만 유렌에겐 소용없다.
퍽!
브리카는 옆을 찌르는 척하며 정면으로 쇄도하는 유렌의 목검을 막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자, 다음.”
“크아아아아!”
크라이드가 버서커를 발동시킨 후 유렌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앙!
유렌은 그 매서운 공격을 여유롭게 막은 후 연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검에는 지독한 패기가 실려 있었다.
“크으윽...”
버서커 상태인 크라이드의 검력이 유렌의 목검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건 크라이드의 이성을 유지시키고, 더 강한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훈련이었다.
“우하학!”
유렌의 목검에 전신을 얻어맞은 크라이드는 버서커가 해제 된 채로 뒤로 자빠져서 숨을 몰아 쉬었다.
“마지막이네. 아린. 와라.”
“하앗!”
아린이 자신의 검을 꽉 쥐고 오러를 날렸다. 유렌은 그녀의 날카로운 검기를 모조리 흘려버린 뒤 자세를 잡았다.
“괜찮군.”
이번 훈련으로 가장 큰 성장을 이룬 사람은 아린이다.
그녀의 특성 명경지수는 이런 훈련에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아린은 흑철기사단에서 가장 강했으면서도 가장 많은 약점을 지웠다.
샤아악!
아린의 검은 번개처럼 몰아쳐서 유렌을 압박했다. 검에 담긴 오러줄기가 얼음을 간 것처럼 날카로웠다.
“좋다!”
유렌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모든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아무리 그녀의 검술이 성장 했다고 해도 현경에 오른 입장에선 걸음마하는 아이로 보인다.
“다만...”
아린과 수십 합을 부딪치던 유렌은 정지된 것처럼 느릿하게 검을 찔렀다.
“아...”
느릿한 검이지만 아린은 그의 검을 막아내지 못 하고 자신의 검을 놓쳐버렸다.
“피, 피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느린데...”
“그게 정검(靜劍)이다. 네 쾌검과는 정반대의 속성이지.”
유렌은 아린에게 아주 작은 힌트만 주었다. 그 이후는 아린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전부 모여라.”
“으윽...”
“끄응...”
“아악...”
기사들은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유렌의 앞에 줄을 맞춰서 섰다.
“오늘로 너희와 내가 훈련을 한 지 딱 2달이 되었다.”
“어?”
“저, 정말입니까?”
“벌써 두달이라니...”
“그래.”
기사들은 그동안 얻어맞고, 약점을 지우는 일만 매일 반복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2달이 지났다는 말에 전부 멍한 표정이 되었다.
“2달간 훈련을 따라오느라 수고 많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브리카의 선창에 기사들이 연무장이 떠나갈 정도의 함성을 질렀다. 자신들만큼 유렌이 고생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기사들은 유렌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마스터에 오른 무인이 훈련을 봐준다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얻기 힘든 기회다.
이번 훈련으로 흑철기사단은 실력만이 아니라, 유렌에 대한 충성심도 미친 듯이 올라갔다. 이들 92명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유렌을 위해 웃으며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만 상대하느라, 자신들의 실력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파악하지 못했을 거다.”
유렌은 시작할 때 기사들의 수준을 모두 적어놓았다. 이들 모두는 최소 2단계에서 많게는 4단계까지 수준이 올라갔다.
특히 아린 같은 경우 마스터 직전의 수준이다. 한 번의 깨달음만 넘으면 마스터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깨달음은 유렌이 도와주기 어렵다. 스스로 해야 한다.
“오늘까진 훈련 날이니, 이후에 명상으로 약점을 극복할 방법을 생각하도록.”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5일간 휴가를 줄 테니, 알아서 쉬고.”
“우와아아아아!”
휴가라는 말에 기사들이 손을 들어 올리며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금지했던 개인훈련과 대련도 해제해주마. 다만 너희들은 너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해졌다. 아마 힘조절이 잘 안 될 거야.”
유렌의 입에서 강해졌다는 말이 나오자, 기사들이 꿈을 꾸는 표정이 되었다. 그의 칭찬에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다.
“대련을 할 땐 무조건 아린이나 크라이드, 브리카를 참관시키도록.”
“알겠습니다!”
유렌은 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기사들을 한 번씩 쳐다본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 번 내 훈련을 따라오느라 수고 많았다.”
말을 마친 유렌은 등을 돌려 연무장 출구를 향했다.
“감사합니다!”
“제 인생 최고의 영광입니다!”
“목숨을 바쳐서 가이린을 수호하겠습니다!”
“유렌님께 제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유렌의 등 뒤로 진심을 담은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유렌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 때 까지 계속 되었다.
**
“유렌님! 저 5성에 올랐어요!”
페루는 너무 기뻐서 노크조차 하지 않고 집무실 문을 열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 5성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페루는 기사들처럼 대련으로 실력을 올리기 힘들기 때문에 독공의 수준과 독의 종류를 늘리게 만드는데 주력했다. 덕분에 사용할 수 있는 독의 종류를 20개로 늘렸고 독공은 5성에 올랐다.
“전부 유렌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저 감사하다는 말 요즘 미친 듯이 들었다. 자신들의 수준이 엄청나게 오른 것을 깨달은 기사들이 매일매일 찾아와서 내게 무릎을 꿇고 감사인사를 해왔다.
부하들의 진정한 존경을 받는 것은 무공의 수준이 오르는 것과는 또 다른 희열이 있었다. 왜들 그렇게 충성심 강한 부하를 얻으려 하는지 이해가 갔다.
“아, 그리고 본선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페루가 말하는 날짜는 딱 하나 뿐이다. 내 이름을 건 무술대회다. 훈련 동안 예선이 끝났고 곧 본선이 벌어질 거다.
“이제 본선이 벌어지니, 유렌님도 왕궁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그럼 흑철기사단을 소집해.”
“네? 기사단을요?”
페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번 대회 조용히 끝날 리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