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현경
자아의 서의 설명을 읽고 나서 나 자신을 만나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런 모습의 내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 저 모습이...”
170후반대의 신장, 짧은 흑발, 적당히 운동한 몸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나는 과거의 나, 현실에서의 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로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현실의 나는 화난일이 있는 것처럼 무표정이었다. 내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후우욱.
안개 낀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지며 현실의 내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풍선처럼 몸이 부풀었고, 머리카락 더 길어졌으며, 피부색이 밝아졌다.
“아...”
기사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돼지처럼 뒤룩뒤룩 살이 찐 모습,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들어왔을 때 망나니 유렌 록스의 모습이다.
화아악.
자아의 서에서 나온 가짜의 모습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이번엔 연무장에서 운동을 해서 살이 빠져 통통한 모습이 되었다.
놈의 외모는 끊임없이 바뀌고 있었다.
여의지주를 먹어서 천무지체를 얻었을 때 크게 변했고, 천무지체는 점점 그의 몸을 완벽에 가까운 신체로 만들었다.
자아의 서에서 나온 가짜 유렌은 지금의 내 모습과 완벽히 똑같아졌다. 난 저 녀석의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나와 같은 경험을 얻은 가짜라는 건가.”
자아의 서에서 나온 유렌 록스는 내가 겪은 모든 경험을 똑같이 겪고 나서 내 앞에 섰다. 놈은 지금의 나와 완벽하게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조화경의 극의라는 무공 경지를 이룬 상태다.
“후...”
눈앞에서 보는 조화경 고수의 기세가 이 정도라니, 내 앞에선 적들이 왜 그리 떨었는지 이해가 갔다.
“허, 웃어?”
자아의 서에서 나온 가짜 유렌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만들었다. 내가 적들에게 보여주는 비웃음과 완전히 똑같다.
챠앙!
놈이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들었다. 기라녹스가 만들어준 흑철의 비수다.
“무기까지 똑같다는 건가.”
놈은 비수를 역수로 잡고 나를 겨누었다. 한 판 붙자가 아니라, 날 죽일 기세다.
“대화하고 싶은데 그건 안 되는 건가?”
말을 할 수 없는지 놈은 비웃음을 유지한 채 비수만 겨누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저 가짜놈과 전투를 벌이는 건 예상한 바였기 때문에 나도 비수를 꺼냈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가짜 유렌을 향해 앞으로 돌진하며 직사를 사용해서 비수를 날렸다.
공기를 꿰뚫는 소리와 함께 비수가 날아갔다. 반대편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놈도 비수를 날린 것이다.
쩌어엉!
나와 가짜 유렌의 중간 지점에서 거센 충돌음과 함께 두 비수가 깨져버렸다. 완벽하게 같은 힘이 실렸다는 뜻이다.
피이이잉!
가짜 유렌의 손에서 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았다. 닿는 순간 몸에 구멍이 뚫리는 혈화접이다.
일단 혈화접이 궤도에 오르면 피하기 힘들다. 난 같은 혈화접 대신 둥근 구슬을 꺼냈다.
파아앙!
빛의 파편처럼 날아간 백광환이 날개를 다 펼치지 못한 혈화첩을 추락시켜버렸다.
촤르르르!
공중에 열두 개의 비도를 흩뿌렸다. 연위결을 운용해서 바로 십이 비도를 날렸다.
캬갸갸갸걍!
놈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허공에서 스물네 개의 비도가 맞물렸다. 똑같은 힘끼리 격돌한 비도들이 낙엽처럼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스르르릉!
난 허리춤에 꽂아 넣은 귀왕살을 빼들었다. 귀왕살의 칼날에 강환을 두른 뒤 그대로 놈을 내리쳤다. 가짜 유렌 역시 귀왕살에 강환을 담아 나를 향해 올려쳤다.
콰아아아앙!
강환과 강환이 부딪친 영향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과 함께 내가 있는 공간이 찌그러졌다.
“아직 안 끝났다!”
난 물러나지 않고, 귀왕살을 양손으로 잡은 뒤 하늘을 떠받치듯 위로 들어올렸다.
고오오오!
귀왕살을 덮은 강환이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제왕검 일 초식 마왕의 등장이다.
“허, 이것도 따라한단 말이지? 좋아. 그대로 짓눌러주마!”
놈이 들고 있는 귀왕살에도 검은 기운이 덮이고 있었다. 나와 같은 마왕을 사용하는 것이다.
...!
두 마왕이 부딪치자, 밤이 찾아온 것처럼 모든 것이 어둠으로 변했다. 귀가 멀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
3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청각이 돌아왔다. 폭풍이 불어오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것이 터져나갔다.
“크으윽...”
천근추를 사용해서 몸을 무겁게 만들어도 마왕이 충돌한 여파 때문에 뒤로 사정없이 밀려버렸다. 가짜 유렌 역시 뒤로 쭉 미끄러졌다.
“쿨럭...”
속에서 구역질이 나왔다. 내상까진 아니어도 큰 충격을 받은 건지 장기가 흔들렸다.
“독도 효과가 없는 건가.”
난 싸우는 도중에 놈에게 여러 가지 독을 뿌렸다. 오도단혼독부터 역혈곡, 단장독, 해곤사창, 절맹귀산에 혼연적마까지 사용했지만 모두 먹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놈은 나와 똑같이 천독불침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저 독 모두에 내성이 있다. 먹힐 리가 없다.
[천독불침이 오보단혼독을 무효화 시켰습니다.]
놈을 노려보고 있을 때 상태창이 나타났다. 가짜 유렌 역시 내게 독을 사용했던 모양이다.
“재밌네. 어디 끝을 보자고.”
주머니에서 천판을 꺼내들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을 쓸 생각이다.
우우웅.
천판을 띄우며 만독자전신기와 연위결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만천화우. 광화.”
**
결론만 말하자면 가짜 유렌은 나와 완벽하게 같은 위력의 만천화우를 사용했다.
2000개의 광화가 맞부딪쳤을 땐 정말 이 공간이 찢어질 것처럼 일렁거렸다. 똑같다는 것을 알아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렇게 보니 내가 사기는 사기였군.”
나와 똑같은 능력을 가진 놈을 상대하고 있으니, 솔직히 말해서 토가 나올 정도로 답이 없다.
천무지체 때문에 몸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천독불침 때문에 독은 통하지 않으며, 내공은 바다처럼 끝이 없다.
잡으려고 하면 뇌인신법을 사용해서 도망가 버리고, 근접거리에선 전뢰상권을 사용해서 맞부딪치고, 원거리는 암기를 쓴다.
나 자신에게 하는 욕이 될 수 있겠지만, 저 자식 정말 개같이 싸우고, 좆같이 쎄다.
“흐음...”
잠시 멈춰서 숨을 돌렸다. 이렇게 싸우다간 끝이 없을 거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한다.
“변하는 모습을 그냥 심심해서 보여주진 않았을 거야. 분명 이유가 있겠지.”
생각을 하고 싶지만 망할 놈의 가짜 유렌이 도와주질 않는다. 뇌익을 사용해서 미친 듯이 돌진해온다.
“그러고 보니 현경에 대해 말해주셨는데...”
놈의 공격을 회피하면서 당천위가 했던 말들을 생각해보았다. 당천위는 내가 조화경에 올랐을 때 몇 가지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다.
“자기 자신을 찾으라고 했었지.”
어떻게 보면 당천위의 그 조언이 영향을 발휘해서 내가 자아의 서를 선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파아아앙!
내가 가만히 있어도 가짜 유렌은 내게 모든 기술을 퍼부었다. 직사와 곡사같은 간단한 암기술부터 만천화우까지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을 사용했다.
“이번엔 광뢰인가?”
난 놈이 사용하는 내 기술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놈은 모든 무공을 사용하고 마지막으로 광뢰를 사용했다.
빠지지직!
놈이 사용한 광뢰가 내 심장에 도달하기 직전, 내가 익히고 있는 모든 무공의 구결이 파도처럼 섞이기 시작했다.
“아...”
머릿속으로 무공의 해일이 밀어닥쳤다. 암기술만이 아니라, 12개의 검술, 독술, 권법, 신법까지 모든 것이 뭉쳤다.
가짜 유렌과 광뢰가 사라지고, 내 앞에 나뭇가지처럼 수많은 갈래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길은 내가 여태까지 이뤘던 무공의 길이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익혔던 무공들의 길.
난 이 길의 끝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 가려면 내 모든 무공들을 사용해야 한다. 난 걸음마다 내가 익힌 무공들을 증명하며 걸어갔다.
퍼어엉!
길의 끝에 도달한 순간 머릿속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나를 조화경에 묶어두었던 거대한 벽이 깨져나간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조화경의 극의를 넘어 새로운 경지 현경에 도달한 것이다. 숨이 가빠질 정도의 희열이 몰려들었다.
지지직!
정신을 차리자, 내 심장으로 다가오는 가짜 유렌의 광뢰가 보였다. 난 손을 쓰지 않았다. 내 의지를 담은 연위결로 광뢰를 멈춰버렸다.
후웅.
광견처럼 적을 물어뜯어야 할 광뢰가 내 앞에서 순한 강아지처럼 얌전해졌다.
“...!”
가짜 유렌이 처음으로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하는 눈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저 유렌은 나와 모든 것을 똑같이 겪었지만 난 놈과 싸우며 새로운 경지로 올라가버렸다. 단 한 걸음을 걸었을 뿐이지만, 그 한 걸음은 하늘과 땅차이보다 크다.
우우웅.
다시 한 번 천판을 띄웠다. 놈 역시 나를 따라 천판을 띄웠다.
파아아아!
두 천판은 순식간에 개화하여 하늘에 광화를 피워냈다. 놈의 만천화우가 나를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이젠 소용없어.”
난 뒤늦게 만천화우를 움직였다.
옆에서 보면 이미 늦었다고, 살아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늦게 발동되었지만, 내 만천화우는 좀 전과는 전혀 다른 기술이 되었다.
천개의 광화들은 단순히 어검의 묘리를 담은 암기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검술의 최고 경지 이기어검과 동일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내 만천화우는 이기어검을 다루는 무인 천 명과 싸워도 밀리지 않는다. 홀로 대륙 전체를 상대할 수 있는 힘이다.
쩌어어어엉!
내 의지를 가득 담은 만천화우는 놈의 만천화우를 모조리 부숴버리고 가짜 유렌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
놈은 자신을 죽일 만천화우가 아니라,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콰아아아앙!
포탄이 터져버린 소리와 함께 놈이 이 공간에서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
가볍게 눈을 뜨자, 내 연공실이 눈에 들어왔다.
[만독자전신기가 구성에 도달했습니다.]
[현경(玄境)을 이루셨습니다.]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일원(一原)을 이룬 효과로 내력의 질과 양이 크게 상승합니다.]
[연위결이 구성에 도달했습니다.]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당가십독 - 무형지독(無形之毒)이 개방되었습니다.]
[당가십독 - 의투형독(意鬪衡毒)이 개방되었습니다.]
“하하하!”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현경인가.”
사실 현경에 도달하려면 한참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자아의 서 덕분에 조화경의 벽을 뚫고 단숨에 현경에 이뤄냈다.
내가 가짜 나와 계속 싸우려고만 들었다면 그 장소에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해도 내게 큰 행운이 따랐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메시지가 많기도 하고 내용도 장난이 아니네.”
현경에 도달한 효과로 내 몸 전체가 하나의 단전인 일원이 되었다. 지금 당장 내공이 상승한 것과 기의 순도가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가십독도 개방됐군.”
당가십독도 두 개나 개방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무형지독이다. 무협지에서 당가최후이자 최강의 독으로 나오는 무형지독이 드디어 개방되었다.
마지막에 가짜 유렌을 꺾는데 사용했던 이기어검마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검술 아니, 무인이 꿈에 그리는 경지를 이뤄낸 것이다.
“그런 다가 아니야.”
단순히 눈에 보이는 저 메시지의 화려한 내용만이 아니라, 내 기본 무리와 무위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상승했다.
현경에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이지만 지금의 나는 조화경에 극의를 이뤘던 과거의 나 3명이 동시에 덤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빽?”
내가 눈을 뜬 것을 본 빽빽이가 내게 달려들려다가, 공중에 멈춰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도 내 변화를 느낀 것 같았다.
“나 맞아.”
“빽!”
피식 웃으며 손을 벌리고 나서야 빽빽이가 내 품에 안겼다. 난 녀석을 쓰다듬으며 주머니에서 도플갱어 킹의 보주를 꺼냈다.
도플갱어 킹의 보주를 얻었을 때부터 분신을 사용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올랐지만, 현경에 오른 이후에 사용하려고 여태까지 꾹 참아왔다.
“드디어 분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