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자아의 서 (216/241)
  • 216화 자아의 서

    책과 아티펙트가 모여 있는 오른쪽 구석에서 붉은 아우라를 발산하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책 옆에 있는 화려한 보물들이 각자의 빛으로 자신을 뽐냈지만 내 시선은 처음 본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걸어가서 책을 잡았다. 책의 겉표지에 어떤 표식이나 글씨도 적혀있지 않은 것을 보니, 마도서는 아니었다.

    “마도서도 아닌데 이런 느낌이라니.”

    손에 든 책에서 뭔지 모를 기운이 전해져왔다. 이 책은 역시나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자아의 서.]

    펼치면 진정한 자신과 만날 수 있는 환상의 책이다. 자기 자신과 만나 원하는 것을 이룰지, 자신에게 막혀서 폐인이 될 지는 소유자의 정신력에 달려있다. 자아의 서는 펼치는 순간 발동되며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린다.

    “자아의 서라...”

    자기 자신과 만나게 해준 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리스크가 있지만, 얻는 것도 있다는 건가?”

    현재의 내 무공은 조화경의 극의에 도달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목표는 다음 단계 현경에 도달하는 것이다.

    “단 한 발 남았지만, 너무 멀어...”

    조화경의 다음 단계인 현경까지 하나의 벽만 남았지만, 그 벽을 평생 동안 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무공 경지의 상승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음...”

    성장할 만큼 성장한 내 예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내가 현경에 오르는데 이 자아의 서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난 내 예감을 믿고 테이블 위에 놓아둔 자아의 서를 다시 잡았다.

    “음!”

    좋은 선택을 했을 거라 믿고, 몸을 돌리려고 할 때 원작의 내용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라시드가 이 제국 보고에 들어오는 일이 있다. 라시드는 보고에서 무기도, 갑옷도, 나처럼 책을 고르지도 않는다. 그가 선택한 것은 작고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그게 있었지. 엘릭서가.”

    고개를 돌려 가운데 테이블에 올라가 있는 작은 유리병을 보았다. 바다를 담은 듯 투명한 유리병 안에 있는 액체는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엘릭서]

    죽지만 않았다면 어떤 심각한 상처라도 완벽하게 치료해주는 환상의 물이다. 단순히 상처만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라, 체력과 마나 역시 완전히 회복시켜 준다. 심지어는 피로와 정신력마저 만전의 상태로 만들어준다.

    “아쉬운데...”

    설명만 봐도 엘릭서의 능력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처 치료로는 떨어진 팔도 붙일 수 있을 정도고, 몸통에 난 머리통만한 상처도 메울 수 있다.

    단순 상처치료만이 아니라, 체력과 마나, 정신력까지 완벽하게 회복 시켜주니, 사기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회복류 중 최고의 아이템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아의 서도 끌리지만, 엘릭서도 정말 탐이 난다.

    프라이드는 자신을 강화시키고 있고, 키르아가 죽은 이상 크리티스도 이제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 할 거다.

    끊임없이 나를 공격하는 에블린과 글러트니까지 있으니, 앞으로의 전투는 내 예상 이상으로 거칠어 질 거다.

    이런 때에 엘릭서가 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분의 목숨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단한 안점감은 덤이고.

    탁.

    엘릭서 옆에 자아의 서를 놓았다. 둘 다 필요한 물건이라, 하나를 선택하기 정말 애매했다.

    “흐음...”

    입술을 깨물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황태자가 걸어왔다. 그는 내 앞에 있는 두 물건을 한 번 씩 쳐다보았다.

    “이 두 개 중에 고민을 하는 것이오?”

    “둘 다 제게 필요한 물건 같아서 고민이 되는군요.”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엘릭서와 자아의 서를 확인했다.

    “그럼 둘 다 가져가시죠.”

    “네?”

    황태자는 우물에서 물이라도 떠주는 것처럼 아주 가볍게 말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라 멍한 표정으로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 안 됩니다!”

    호위 기사들과 보고를 지키는 기사들이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제국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들이 저렇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 다 가져가라는 황태자의 반응이 오히려 예상 외다.

    “황태자 저하.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잠시 고민할 시간만 주시면 하나를 고르겠습니다.”

    “아니오. 유렌 후작은 이곳에서 두 가지 물건을 가져가실만한 자격이 있소.”

    “황태자 전하!”

    “모두 들으라.”

    황태자는 나에게 안심하라는 미소를 보여주고서 뒤를 돌아 기사들을 보았다. 그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진중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유렌 후작은 우리 제국에서 두 가지 일을 해주었다. 수도 중앙에서 날뛰는 도플갱어 킹을 잡아주었고, 400명이 넘는 납치 된 사람들을 구해냈다. 납치된 사람들을 치료한 건 덤이지.”

    “음...”

    황태자의 말에 동의하는 듯 기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알겠지만 황제 폐하께선 공을 쌓은 만큼 보상을 주기로 유명하셨다. 그분이 건강하셨다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나? 유렌 후작에게 보물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는 가져갈 자격을 주셨을 거다.”

    “그렇다 치더라도 황태자 전하의 자격으로 들어왔으니,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 뿐...”

    “내가 책임진다.”

    황태자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일로 문제가 생기는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겠다. 내가 직접 폐하께 보고를 드리겠다.”

    황태자의 당당한 말과 표정에 기사들이 말을 잃었다. 그들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황태자에게서 이런 위엄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유렌 후작.”

    “예.”

    “내가 허락하겠네. 둘 다 가져가게.”

    황태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단단한 바위를 보는 것 같았다.

    유약하고 귀가 얇은 황태자가 나를 동경해서 자기 자신을 바꾸고, 이제는 내게 도움을 주는 지금 상황에 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에게서 운명의 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금 그의 말을 거절하는 것은 오히려 실례가 된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다만...”

    “응?”

    “저도 그냥 받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니, 황태자님께서 도움을 요청하시면 한 번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황태자가 내게 보여준 일방적인 믿음과 스스로를 변화시킨 그 정신이도 마음에 들었다. 한 번은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다.

    “사람의 길을 벗어나거나, 제가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워!”

    황태자가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의 맑은 미소만큼이나, 내 마음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스스로를 변화시킨 황태자라면 글러트니와 프라이드만 제거하면 좋은 황제가 될 것이다.

    “앞으로 크라시스 왕국과 아인스 제국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네!”

    **

    “잘 다녀오셨습니까?”

    황궁에서 엘릭서와 자아의 서를 챙긴 뒤 사천상회의 건물로 돌아갔다. 내가 온 것을 확인한 모카건이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상회는 어떤가요? 잘 돌아가나요?”

    “네. 아주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너무 잘 되서 죽겠습니다. 아주. 하하하!”

    모카건의 눈 밑은 검게 변해서 피곤해 보이지만, 입가엔 우러나오는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다스 상회가 가지고 있던 상로의 40%를 저희가 얻었습니다. 정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이득입니다. 크하하하!”

    “모카건님의 얼굴만 봐도 어느 정도인지 알겠네요.”

    “그런가요? 흐흐흐.”

    모카건은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모양이다. 하긴 대륙 최고 상회의 상로 40%를 먹었다면 숨쉬는 것만으로 기쁠 것이다.

    “잘 됐네요. 아,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어요.”

    “네? 어떤 소식이죠?”

    “황궁에서 황태자 전하와 만나고 왔는데, 그 분이 사천상회에 몇가지 혜택을 주신다더군요.”

    “네? 정말입니까!”

    모카건이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 되었다. 그는 너무 놀랐는지 자신의 볼을 당기고 있었다.

    나와 사천상회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에 황태자는 사천상회에 몇 가지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알아서 도움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어서 고맙게 받아들였다.

    “유렌님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뭘 이정도 가지고.”

    모카건은 감동을 받았는지 눈이 글썽거렸다.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빙긋 웃었다.

    “이곳의 일도 해결됐으니, 이제 가이린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벌써 가신다구요?”

    “벌써가 아니죠. 예상보다 훨씬 오래 있었잖아요.”

    “아, 그렇긴 하군요. 사람들까지 구해오셨으니...”

    모카건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얼굴을 보니, 내가 수도에 계속해서 있어줬으면 하는 표정이다.

    “사람들 눈이 있으니, 한동안 직접적인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주의하시구요.”

    “명심하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언제라도 가이린으로 찾아오세요.”

    “음...”

    모카건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사막에 이어, 이번에도 유렌님께 목숨을 구함 받았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이 걸리더라도 갚아나가겠습니다.”

    “당연히 갚으셔야죠. 아주 큰 것으로.”

    “네?”

    모카건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가 내가 장난을 친다는 것을 알고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물론 갚아야죠! 사천상회를 꼭 대륙 최고로 만들겠습니다. 그거 맞죠?”

    “잘 아시네요.”

    우리는 서로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와 앞으로의 일을 상의한 후 가이린으로 돌아갔다.

    **

    “우와! 성자님 아니십니까!”

    “큭...”

    가이린에 돌아오자마자, 페루가 나를 성자라고 불렀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알았냐?”

    “저야 유렌님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알아야죠. 라고 말하고 싶지만 왕국 전체에 소문 다 났어요. 유렌님의 활약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걸요.”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퍼지다니, 무슨 소문이 나보다 빨리 움직이는 지 어이가 없다.

    “소문이 너무 빠르다 생각하시죠? 그럴 수박에 없는 게 유렌님은 너무 엄청난 일을 하셨어요.”

    “엄청난 일?”

    “제국의 수도에서 도플갱어 킹을 잡아서 사람들을 구하고, 납치된 사람들을 데려오고 치료까지 해주셨잖아요. 제국의 영향을 미친 건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과 마찬 가지에요. 거기다 유렌님의 힘은...”

    페루는 흥분했는지 침까지 튀겨가며 내가 한 일들을 칭송했다. 난 민망해서 손을 올려서 녀석의 말을 끊었다.

    “많이 들었던 말이니까. 일이나 가져와.”

    “아직 멀었는데...”

    “빨리 서류나 가져와. 인마.”

    “으윽, 알겠습니다.”

    페루는 강아지가 앓는 소리를 내고서 자기 몸통만한 서류뭉치를 가져왔다.

    “조, 좀 많네?”

    “저희 영지 발전 중이잖아요.”

    “내가 말 끊었다고 삐져서 이러는 거 아니지?”

    “그, 그렇게 치사하진 않거든요.”

    페루가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떨었다.

    “저, 저도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금방 끝낼 수 있을 겁니다.”

    “큭큭. 알겠어.”

    피식 웃고, 녀석과 함께 밀린 일을 처리했다. 반나절 동안 모든 업무를 끝낸 뒤 빽빽이와 내 개인 연공실로 들어갔다.

    “빽.”

    “선물이다.”

    빽빽이에게 제국에서 사온 멜론을 잘라 주었다. 녀석은 꼬리를 버둥거리며 멜론 반쪽에 코를 박았다.

    멜론을 전부 잘라서 빽빽이가 먹기 좋게 한 곳에 놓아두었다.

    “이건 뇌물이야. 나 잘 지키라고.”

    “빼액!”

    빽빽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기똥찬 울음을 터트리고 다시 멜론에 머리를 박았다. 마음에 드는지 멜론 반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빠 미소를 지으며 빽빽이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작해볼까.”

    가부좌를 틀어서 내 몸 상태를 다시 점검했다. 제국에 가기 전 보다 내공의 양이 늘었고, 연위결의 성취가 굉장히 높아졌다.

    지금은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상태다. 정말 현경까지 한 걸음 남았다. 평생 걷지 못할 수 있는 걸음이지만.

    “이게 도움이 되겠지.”

    주머니에서 자아의 서를 꺼내들었다. 자아의 서 옆으로 퍼지는 붉은 아우라는 지금도 보이고 있었다.

    “그럼...”

    긴장을 풀고, 자아의 서를 펼쳤다. 책은 담배연기처럼 순식간에 증발해버렸고, 나는 익숙한 곳에서 정신이 들었다.

    “여긴... 제 4연무장?”

    록스에서 내가 수련했던 장소, 제 4연무장이다. 다만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꼭 정신세계에 들어온 기분이다.

    저벅.

    등 뒤에서 처음 들어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너무 놀라서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왜? 왜 저 모습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