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니벤 산 (5)
지금까지 내 몸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름 잃은 자의 파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몸 어디에 이런 기운이 숨어 있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름 잃은 자의 파편 발동 효과로 그림자 혼의 흡수가 가능해집니다.]
갑자기 나타난 알림 창은 그림자 혼을 흡수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쿠구구구.
내 몸속에서 개방 된 파편의 힘이 악실에 중독 된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는 것을 느끼자 그림자 혼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림자 혼...”
갑자기 먼 곳에 있는 그림자 혼을 흡수하라고 할 리는 없으니, 사람들을 저 상태로 만들어버린 악실의 마기가 바로 그림자 혼이다.
“그림자 혼? 그게 뭐죠?”
“당신도 모르는 건가?”
“네. 들어본 적 없군요.”
러스트도 그림자 혼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표정을 봐도 전혀 모르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이들을 구하기는 힘들겠어요.”
러스트는 앞에 있는 남자의 몸을 다시 훑어보고서는 무감정하게 말했다.
“늦어서 그런 건가?”
“그것보다는 이 인간들에게 퍼진 마기는 특별해요. 고위 신관의 신성력으로도 지울 수 없을 거예요.”
러스트는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으로 말했다. 그녀가 인간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당신이야 같은 인간이니, 이들이 안타깝겠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빨리 보내 주는 것이 나을 거예요. 표현을 할 수 없지만 이들은 지금도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어요.”
러스트의 시리도록 차가운 말을 들으며 남자의 등에 다시 손을 올렸다.
“생각보다 고집이 있으시군요.”
러스트는 내가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고집이라... 그래. 내가 고집은 좀 있지.”
피식 웃으며, 남자의 몸에 퍼지고 있는 그림자 혼을 파악해보았다. 그의 몸을 좀 먹고 있는 그림자 혼을 감지하자 내 몸속에서 끓어오르던 파편의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파편의 기운은 나만 들을 수 있는 폭포 같은 소리를 터트리며 남자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화아아악!
파편의 기운이 그의 몸속에 들어가자마자, 남자의 장으로 퍼져나가던 그림자 혼이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키이이이.
그림자 혼은 파편의 기운의 눈치를 보며 퍼져있는 자신의 기운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꼭 살아있는 생물 같은 움직임이다.
파편의 기운에 대응하려는 건가?
그림자 혼은 남자의 몸에 들어온 파편의 기운과 싸우기 위해 힘을 모은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싸우기는커녕 자신의 몸을 압축시켜서 파편의 기운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키이이이.
파편의 기운으로 남자의 몸속 전체로 퍼지자, 그림자 혼은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내 손을 향해 움직였다.
그림자 혼이 남자의 등에서 내손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난 반항하지 않고, 놈이 들어오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내 몸속엔 그보다 훨씬 거대한 파편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아아악!
그림자 혼이 내 몸속으로 전부 들어왔을 때 남자의 몸에 퍼져있는 파편의 기운을 회수해서 그림자 혼을 양각으로 둘러싸버렸다.
키이이익.
그림자 혼은 나만 들을 수 있는 비명을 내지르며 파편과 맞부딪쳤다. 아니, 부딪쳤다고 할 수도 없었다. 파편의 기운과 마주치자마자 그림자 혼이 녹아버렸으니까.
파편의 기운에 휩쓸려서 그림자 혼은 순식간에 내 몸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림자 혼을 흡수했습니다.]
[흡수된 그림자 혼으로 인해 내력과 오성이 상승합니다.]
[이름 일은 자의 파편이 강화 되었습니다.]
그림자 혼을 흡수하자, 단전의 내력이 약간 상승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머리가 맑아진 느낌도 들었다.
“으...”
그림자 혼이 사라진 남자의 입에서 아주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마네킹처럼 정지되어 있던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나?”
“아...”
남자는 아직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귀도 들리고, 사물도 인식한다는 뜻이었다.
“휴우...”
너무 늦었을 까봐 걱정했지만, 남자를 살려낸 것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방금 한 것처럼만 하면 이 남자만이 아니라, 이곳에 갇혀있던 모두를 구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내 행동을 지켜보던 러스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대, 대체 어떻게 한 거죠?”
러스트는 악실의 마기를 몰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자가 살아난 것을 보고 완전히 얼어버렸다.
“나도 잘 모르겠군. 고집 때문일지도.”
“아...”
“어쨌든 고맙군. 당신 덕분에 이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게 됐어.”
진심을 담아서, 러스트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림자 혼을 떠나서 러스트가 아니었다면 이 사람들을 절대로 구하지 못했을 거다. 실리나가 이들을 데리고 간 이후에서야 뒤늦게 찾아왔을 거다.
“거기다...”
이 사람들을 구하는 것과 동시에 난 그림자 혼을 흡수해서 한층 더 강해질 수 있다.
아주 조금의 내력과 오성이 상승하지만, 사람의 숫자를 생각해보면 합친 양은 최상급 영약을 먹은 것 이상으로 장난이 아닐 거다.
거기다 무공의 성취를 더 깨우칠 수 있도록 오성도 올려주니, 그림자 혼은 내게 단순한 영약보다도 훨씬 큰 이득을 줄 것이다.
“포메라.”
“왜 그러시오?”
“너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거나 회복을 시킬 수는 없지?”
“주, 주인! 당연한 걸 왜 물으시는 거요. 나 언데드요!”
포메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다.
“너 요즘 거의 신선 같은 느낌이 들어서 혹시나 해서.”
“내가 아무리 명상을 하고, 마음을 정화시켰다고 해도 본질은 언데드요. 언데드에게 버프를 주거나 되살린다면 모를까, 인간을 도와주는 마법은 없소.”
녀석이 요즘 보여주는 행동과 말이 성자나 현자 저리가라라서 물어본 건데, 일단 언데드라 어쩔 수가 없나보다.
“당신은?”
“미안하지만 저도 인간에게 도움을 줄 능력은 없어요.”
러스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긴 칠죄종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도 우습다.
“그럼 포메라 저 동굴 지하에 있는 상자들도 이곳으로 전부 들고 와줘.”
“알겠소.”
포메라에게 사람들이 갇혀있는 상자를 가져오라 지시한 뒤 나는 다음 사람의 그림자 혼을 흡수했다.
“다 가져왔소.”
포메라는 염동력을 이용해서 한 번에 모든 상자를 가지고 동굴을 나왔다.
“전부 가져 온 거야?”
“그렇소.”
상자의 개수를 세어보니, 지하에 있던 상자와 개수가 일치했다.
“수고했어. 그럼 이제 이 상자들을 한곳에 모아놔 줘.”
포메라는 그림자혼에 중독된 사람들이 들어있는 상자들을 한 곳에 쌓았다. 나는 그 옆으로 기절한 라이칸과 다크엘프, 인간들을 모아놓았다.
“뭐하려는 거요?”
“이 사람들에겐 조치가 필요해. 제국 수도로 돌아가야겠어.”
“수도 어디로 갈 거요?”
“사천상회의 앞마당.”
내가 그림자 혼을 제거한다고 해도 이들에게 치료가 필요하다. 수도로 돌아가서 이들을 회복시키고 쉴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곳은 알고 있소. 좌표를 따놓길 잘했군. 지금 바로 마법진을 그리겠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음?”
마법진을 그리려는 포메라를 멈춰세우고, 러스트를 쳐다보았다.
“러스트. 기왕 도와준 거 끝까지 좀 도와 줄 수 있겠소?”
“제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왠지 당신이라면 우리를 한 번에 바로 이동시켜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아니오?”
난 물론 러스트의 능력을 알고서 저 말을 한 거다. 그녀에겐 이곳에 있는 전부를 단숨에 제국으로 보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포메라가 이 많은 인원을 보내기 위한 마법진을 만들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러스트의 힘을 빌리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하다.
“당신은 정말...”
러스트는 복잡한 심경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파악한 내게 당황한 눈빛이다.
“글러트니의 말대로 당신은 정말 이해를 벗어난 인간이군요. 아까 일도 그렇고 정말 알 수가 없고 예상하기도 힘드네요.”
“글러트니?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소?”
“글쎄요.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를 않아서, 어쨌든 당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겠죠. 물론 제게도.”
거짓말은 아닌 듯 러스트는 찹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음...”
에블린만이 아니라, 글러트니도 원작과는 달리 움직이고 있다. 놈에 대한 대비도 준비를 해놔야 할 것 같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당신이 원하는 능력이 제게 있긴 해요.”
“그럼...”
“도와드리죠.”
러스트는 손가락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나와 납치된 사람들, 사람들이 들어있는 상자 밑에 검은 원이 그려졌다.
“이들도 데리고 갈 건가요?”
러스트는 라이칸과 다크엘프, 납치범들을 가리켰다. 평소의 나라면 이들을 전부 죽였겠지만, 이번 일은 너무 커졌다.
자칫 잘 못하면 나나 모카건이 납치범으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일의 범인들이 필요하다.
“그렇소. 이들도 같이 보내주시오.”
“알겠어요.”
러스트는 납치범들 발밑에도 검은 원을 만들었다.
“포메라. 도와줘서 고마웠다.”
“별 소리를 다하는군. 됐소. 나도 돌아가 볼 테니, 또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시오.”
“그래.”
내가 피식 웃자, 포메라도 마주 웃고선 사라졌다.
“당신은 절 믿나요?”
“지금은 믿소.”
러스트가 묻는 질문에 바닥에 있는 사린을 들어서 옆구리에 낀 후에 대답했다.
“지금이라...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요.”
러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의 원이 기둥처럼 올라와 내 몸 전체를 덮었다.
“다음에 또 보죠. 그땐 당신이 나를 도와주길 바랄게요.”
러스트의 웃음 섞인 마지막 말과 함께 검은 기둥이 다시 내려가자, 내 앞의 풍경이 완전히 변해있었다.
“대단하네.”
순식간에 니벤 산에서 사천상회의 앞마당에 온 것이다. 물론 나만이 아니라, 납치된 사람들과 라이칸놈들도 함께.
“유, 유렌님?”
뒤에서 들린 모카건의 목소리에 돌아보려다가 흠칫 멈췄다. 등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상인, 기사, 병사, 관료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렌? 설마...”
“유렌 록스!”
“유렌 록스 후작님이다!”
내 머리색과 외모 그리고 모카건이 부른 이름 때문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나를 알아보았다.
“아...”
모카건이 깜짝 놀라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사람들이 내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유렌 록스님 맞으시죠?”
“여기 오시다니, 역시 유렌님이 도플갱어 킹을 잡으신 겁니까?”
“자색 안개 속에서 유렌님의 오러색과 같은 하얀색 빛을 보았습니다. 전 유렌님이 도플갱어 킹을 잡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유렌님이 하신 거 맞으시죠!”
갑자기 다가온 기사들이 감동받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알아서 받아들인다.
“전 그날 유렌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인과 시민들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춰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다스와 싸운 날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인 모양이다. 관료들이나 기사들은 조사를 위해 나온 것으로 보이고.
“근데 이들은 무엇입니까? 늑대...가 아니라 라이칸!”
“이 놈들은 다크엘프야! 이게 대체...”
사람들은 내 뒤에 있는 라이칸과 다크엘프를 보고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 이 사람들은 상태가 이상한데? 꼭 좀비처럼 창백해서...”
“이 상자에도 사람들이 들어있어!”
“유, 유렌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군중들은 그림자 혼에 중독 된 사람들까지 보았다. 이제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의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서, 설마 이 사람들을 납치하신...”
“아니에요!”
내가 말을 하려고 할 때 어느새 일어난 사린이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납치는 저 괴물들이 했어요! 유렌님은 북방에 있는 저희 마을까지 가셔서, 이 괴물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해내셨다고요! 유렌님이 도플갱어 킹을 잡아서 사람들을 구했는데 납치 같은 소리를 하다니요! 이분은 영웅이라고요!”
사린은 내가 의심받는 게 억울했는지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내가 했던 일을 소리쳤다.
“허억!”
“죄,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저, 전 처음부터 유렌님이 납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납치범들을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린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감동을 받아서 황홀해 보이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역시...”
사람들은 보는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격동을 느낀 얼굴이 되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지만, 도플갱어 킹을 잡은 것보다 몇 배나 크게 내 이름이 퍼지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