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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니벤 산 (2) (210/241)

210화 니벤 산 (2)

발걸음 소리는 분명 라이칸이었지만, 놈이 자연스럽게 내뿜는 기파는 밖에서 본 놈들보다 훨씬 거대했다.

“음...”

놈이 보이자마자 공격을 할까했지만, 실패하면 상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신중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 열었던 상자를 다시 닫은 뒤 모서리를 살짝 만져서 열었던 흔적을 지워버렸다.

“이대로가 낫겠어.”

라이칸은 누군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난 은신을 사용하지 않고 약간의 존재감만 지운 상태를 유지했다.

“후...”

놈의 반응에 따라 대응을 달리하기 위해서 상자 앞에 서서 앞으로 일어날 상황들을 예상해보았다.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에 동굴 안에서 사람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에 내가 이곳에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을 거다.

라이칸의 걸음 속도는 빠르지만 다급한 느낌은 아니다. 나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을 잘 고르면 속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턱.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키가 2.5m는 되는 라이칸 중에서도 큰 놈이었다.

회색? 회색이라고?

라이칸의 머리색과 피부가 회색인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다.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가고, 등 뒤에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회색 머리카락과 피부를 가진 라이칸은 딱 두 놈 뿐이다.

라이칸들의 왕, 야왕 크리티스와 그의 오른팔 키르아.

크리티스와 키르아는 라이칸의 상위 종인 브리콜라카스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둘만 회색 머리색과 피부를 가지고 있다.

두방망이질 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창조주의 눈을 켜보았다.

[이름: 키르아]

[특성: 브리콜라카스, 자각.]

[호감도: 0 (중립) ]

[현재 기분: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건지 의문을 가지고 있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나타난 라이칸은 키르아였다. 크리티스라면 나를 본 순간 바로 죽였을 거다.

키르아의 정보창을 보니, 아직 나를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이 동굴에서 일하는 세피로스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지하에 있는 것 같아서 와봤는데, 넌 뭐지? 못 보던 놈인데.”

키르아가 자신의 목을 긁으며 다가왔다. 나는 깜짝 놀란 척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너 뭐냐고 물었다.”

“사, 상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숫자를 세?”

키르아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키르아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지금 당장 공격을 해야 할지, 아니면 참아야 할지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머리가 복잡했다.

아니야. 아직 아니다.

키르아는 분명 짜증이 가득 나있는 상태였지만, 창조주의 눈으로 보는 호감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놈은 내가 아니라 다른 것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년이 나가면서 시킨 거냐?”

“그, 그렇습니다.”

키르아는 고맙게도 내가 나갈 탈출구를 열어주었다. 그년이 누군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년! 상자 안의 인간을 세고, 상자를 세고 언제까지 숫자만 쳐 셀 건지! 아주 답답해 뒤지겠어!”

키르아는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했는지 벽에 주먹을 휘둘렀다.

퍼어엉!

놈의 손짓 한 번에 벽에 깔끔한 길이 뚫려버렸다. 한 곳에 힘이 집중됐기 때문에 주변이 무너지거나 갈라지지도 않고 구멍만 뚫렸다.

손을 휘젓듯이 가볍게 휘두른 주먹에 새로운 굴을 만들다니, 정말 미쳐버린 힘이다.

“아...”

나는 키르아의 힘을 보고 겁먹은 척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 전에 연기를 해서 그런지 연기가 자연스럽다.

“큭큭.”

키르아는 내가 겁에 질린 것으로 보고 주먹을 털고서 피식 웃었다.

“그래서 숫자는 다 셋나?”

“아, 네! 이곳에 있는 상자는 전부 54개입니다.”

바로 상자의 개수를 대답해주었다. 미리 상자의 개수를 세어놨던 게 도움이 되었다.

두두두두.

내가 대답을 하자마자, 입구 쪽이 분주해졌다. 키르아의 주먹 소리를 듣고 동굴 안에 있던 라이칸들이 우르르 내려온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냐!”

“내가 했다.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너희 할 일이나 하도록.”

“키, 키르아님!”

“아, 알겠습니다!”

라이칸들은 키르아의 말에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위로 올라갔다. 이제 보니, 키르아는 참 도움이 되는 녀석이다.

“근데 상자 안은 왜 열었지?”

키르아는 자신의 특성을 이용해서 상자가 열리는 아주 작은 소리를 듣고 이곳에 왔다. 기막을 뚫고 상자 소리를 들은 놈에게 바로 들킬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아, 그것이...”

“설마 그 망할 여자가 상자들도 전부 열어서 확인하라고 했나?”

키르아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서 몇 가지를 파악했다.

키르아는 굉장히 단순하고 간단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 하는 가벼운 성격이고, 놈이 욕하는 여자는 하나하나 세세하게 확인 하고 조사하려는 꼼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상한 여자의 성격을 바탕으로 키르아에게 대답을 하자,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콰앙!

키르아가 짜증이 난다는 듯 땅을 내려찍었다.

쾅!

키르아의 발 구름에 땅이 두부처럼 푹푹 파였다. 땅 전체를 흔드는 것보다 저렇게 일부분만 파는 것이 훨씬 힘든데도 숨 쉬는 것처럼 가볍게 하고 있었다.

“아, 짜증나네. 너 가서 그 망할 여자에게 전부 조사했다고 해.”

“네?”

“전부 확인했다고 하라고! 인간들을 상자에 넣을 때 이미 확인했잖아! 전부 666명!”

“그, 그렇지만...”

키르아가 고개를 까딱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나는 몸을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그 여자 말을 들으면 내일 밤이 되어서야 여길 나갈 수 있을 거다.”

키르아의 말을 들어보면, 놈이 욕하는 여자는 최소한 키르아와 동급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밖에는 라이칸 말고도 다크 엘프가 있었으니, 그 여자는 분명 다크 엘프 일거다.

다크 엘프 중에서 키르아와 비슷한 위치를 가지는 사람은 딱 한 명 다크엘프 수호자 실리나 밖에 없다.

“저 그런데...”

“뭐지?”

“지금 바로 올라가면 실리나님이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차리실 겁니다.”

“맞아. 그 깐깐한 여자라면 시간을 세고 있을 테니, 그렇겠어. 하, 정말 답도 없어.”

키르아의 반응을 보니, 내 예상이 맞았다. 놈이 나를 의심하지 않았던 건 실리나 쪽에서 데려온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잠시만 시간을 보내다가 실리나님이 의심하지 않으실 시간이 되면 올라가겠습니다. 저도 사실 조금 귀찮았거든요.”

“하하하! 그렇지! 너 마음에 드는구나!”

“하하...”

키르아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녀석에게 일부러 어색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너 이름이 뭐지?”

“저, 저는 포메라라고 합니다.”

당장 생각나는 이름이 포메라라서 그 이름을 그대로 뱉었다.

“포메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키르아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놈이 크리티스의 부하다 보니, 포메라가 사라진 것을 들었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급히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인간 쪽에서 꽤나 흔한 이름입니다.”

“그래? 근데 너 왜 다크 엘프의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거지?”

키르아가 코를 찡긋 거리며 한 말에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랐다.

“아, 저는 암살자 출신이라, 항상 제 몸에 있는 체취를 지우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네 존재감이 희미했던 거군. 어쩐지 느낌이 흐리다했다.”

급하게 생각난 대로 말했는데 잘 먹혔는지 키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아는 이곳에 적이 나타날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내 말이 잘 먹혀들고 있었다.

사실 나라고 해도 아다스가 잡힌 지 이틀 만에 누군가가 이 장소로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다. 정말 우연의 일치였으니까.

“알겠다. 네 말대로 적당히 때가 되면 올라가서 그 숫자에 미친 여자에게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키르아는 내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고 출구로 나가버렸다.

“휴우...”

놈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한 숨을 내쉬었다.

“먼저 공격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여기가 완전히 무너져서 사람들이 전부 죽었을 거야.”

키르아에게 있는 자각 특성 때문에 놈에겐 기습이 통하지 않는다. 놈의 인식 자체를 다른 곳에 돌려야 기습이 먹힌다.

트드득.

기막을 아주 두껍게 설치한 뒤 다시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 있는 여섯 사람은 여전히 눈을 멍하니 뜨고 있었고, 전신에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이봐요. 내 말 들려요?”

말을 걸어도 내 쪽을 전혀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의 몸을 만져보자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고 굳어있었다.

“마법은 아니야.”

사람들에게서 마나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이 아니라, 약물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마네킹처럼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일단은 계획을 다시 짜야겠어.”

다시 상자를 닫았다. 칼의 검은 쥐와 은신을 극성으로 사용한 뒤 동굴을 빠져나갔다.

동굴 밖에서 실리나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방심은 하지 않았다. 그녀라면 분명 근처에서 동굴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포메라가 있는 언덕으로 돌아갔다.

“포메라.”

“주인. 어떻게 됐소. 안에도 있소?”

“안에도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그것보다 저기에...”

포메라에게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주인은 정말 간도 크구려. 나라면 심장이 떨려서 기절했을 거요.”

포메라는 내가 키르아를 속인 이야기를 듣고 감탄해서 입을 쩍 벌렸다. 나를 무슨 괴물 보듯이 보고 있었다.

“마법진 수정은 어떻게 됐어?”

“일단은 해놓았소. 다만 아주 조금만 수정해놓아서 고치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조금 더 시간을 주면 내가 확실하게 망칠 수 있소.”

“아니야. 충분히 잘했어. 그만해도 돼.”

“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조금만 하면...”

“아까 말했던 다크엘프 수호자가 이 주변에 숨어 있을 거야. 그녀에게 들키면 모든 게 망해.”

“아...”

포메라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조심스럽게 움직여준 덕에 아직 들키지 않았을 거다.

“대신 다른 계획이 있다.”

“계획?”

“그래. 이따가 회색 피부와 머리색을 가진 덩치가 나오면...”

**

포메라에게 계획을 알려주고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 주변을 살펴보니, 동굴 안에는 라이칸과 인간들만 있어서 이들도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로 내려갔다가 은신을 풀고 위로 올라왔다. 기감을 펼쳐서 키르아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놈이 자신의 힘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서 찾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키르아님을 찾아왔습니다.”

허리를 세우고 당당하게 걸어서 키르아를 찾는다고 하니, 라이칸도 날 쳐다보기만 할 뿐 멈춰 세우지 않았다.

철퍽.

키르아가 있는 방에 들어갔을 때 얕은 물을 밟는 소리를 듣고 바닥을 보았다.

“아...”

바닥은 붉은 피로 웅덩이가 만들어져있었다. 마른 침을 삼키고 옆을 보니, 방 여기저기에 인간의 신체부위가 조각나서 떨어져 있었다.

“어? 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나를 발견한 키르아가 가까이 오라는 듯 피로 흥건한 손을 흔들며 웃었다. 뜨거운 김을 내는 피는 놈의 피가 아니라, 좀 전에 죽은 사람들의 피다.

저 괴물은 나와 대화를 끝낸 뒤 이 장소에 와서 사람들을 죽인 거다.

처참한 시체들의 상태를 보니, 이유는 단순하다. 스트레스 해소 혹은 장난.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에 오히려 냉정해졌다. 저 놈은 원래 저런 놈이다.

절대 살려둘 수 없는 놈.

“포메라입니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미소를 지으며 놈에게 다가갔다.

“아! 맞아. 포메라.”

“이제 실리나님에게 가도 될 시간 같아서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딱히 내게 말 할 필요는 없는데. 큭큭.”

키르아는 자신의 손에서 떨어지는 더운 피를 핥으며 말했다. 당장 놈의 주둥아리를 날리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다만 지금 실리나님에게 말씀드려도 이곳을 떠나지 않으실 겁니다.”

“뭐? 왜!”

“마지막으로 실리나님이 직접 상자와 사람의 개수를 확인하실 겁니다. 항상 그러셨으니. 확실합니다.”

“아, 정말 그 년이...”

키르아의 불편한 감정이 기파가 되어 쏟아졌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 뒤에 있던 라이칸들이 신음을 내뱉었다.

“에블린님의 얼굴을 보고 참는데도 한계가 있지. 그 망할 년!”

키르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의 주먹에서 바위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리나는 지금 어디 있지?”

“동굴 밖에서 대기하고 계십니다.”

키르아는 이를 갈면서 밖으로 향했다. 놈이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실리나!”

키르아는 동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산이 떠내려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실리나. 나와!”

키르아가 두 번째로 실리나를 부를 때였다.

화아아악!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와 함께 사람들이 들어 있는 상자들 앞에 아이스 골렘 여섯 마리가 소환 되었다.

“뭐야!”

키르아의 모든 감각이 아이스 골렘들에게 집중된 그 순간.

번쩍.

이 동굴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 손에 잡혀있던 비수가 허공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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