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니벤 산
모카건은 이틀이 지난 뒤 내가 머무는 숙소로 찾아왔다. 눈 밑이 시꺼먼 것을 보니 이틀 동안 잠도 못자고 일만한 것 같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피곤핸 보였지만 모카건 얼굴은 밝았다. 계획했던 일들을 모두 이루고 온 것 같았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스친 상처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600명과 싸우고도 상처하나 없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모카건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미소 지었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올라갔다.
“밖의 상황은 어떻게 됐죠?”
“유렌님이 예상했던 대로 입니다. 제국 수사대가 나와서 다스 상회를 압수 수색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다스의 정체와 언데드를 봤기 때문에 수사대의 조사는 살벌할 정도입니다.”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단순히 아다스만 잡은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덫을 깔았던 거다. 일이 예상대로 흐르는 것에 묘한 희열감이 들었다.
“잘 됐군요.”
다스 상회의 주축들은 아다스가 도플갱어고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다스 이상으로 인간성을 버린 놈들도 많기 때문에 놈들이 당하는 것에 속이 시원했다.
“지금 밖은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요?”
“네. 마법사들의 조사를 통해서 아다스의 정체가 도플갱어 킹이라는 것을 밝혔거든요.”
“그래서 난리가 났다는 거군요.”
“아뇨. 그게 아닙니다. 분신을 600명이나 소환하는 도플갱어 킹을 잡고 사라진 영웅이 누구냐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하하하!”
모카건이 재미있다는 듯 큰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점은 그 영웅의 후보에 유렌님이 올라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꽤나 높은 순위로요.”
“음, 그렇겠죠.”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아그네스가 아직 자고 있기 때문에 나는 조금의 변장밖에 하지 않아서 나를 알아보는 자가 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유렌님외에 다른 유력한 후보에는 예전에 수도에 나타났던 빛의 기사도 있었습니다.”
“빛의 기사라...”
빛의 기사 역시 나다.
예전에 엔비를 상대 할 때 빛의 기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유력한 후보 두 명이 모두 나라는 사실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제국에서 아다스를 죽인 영웅에게 큰 보물을 내린다고 하는데 정체를 밝히지 않으실 겁니까?”
“큰 보상이 끌리긴 하는데 이미 지났으니까요. 그리고 좋은 것도 얻어서...”
“그런 욕심은 버리기 어려운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모카건이 빙긋 웃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크게 감탄한 얼굴이다.
“상회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네. 다른 상회들이 망해가는 다스 상회의 영역을 먹으려 했지만, 저희가 한참 전부터 준비했기 때문에 앞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모두 유렌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카건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내게 최고의 예를 표했다.
“갑자기 왜 이래요. 일어나세요!”
“이번 일을 잘 이용하면 저희 사천상회가 10대 상회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회도 열어주시고, 이번 일도 도와주시고. 전부 유렌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카건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서 자신의 진심을 내게 전했다. 그가 나에 대한 의리를 보여준 것만큼 나도 그를 도와준 것뿐이다.
짧은 시간에 사천상회를 거대 상회로 만들어서 자신이 한 말을 지킨 모카건은 충분히 도와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고마우면 제게 한 약속을 지키세요.”
“약속이요?”
“10대 상회만이 아니라, 대륙 최고의 상회를 만들겠다고 했잖아요. 그 말 지키셔야죠.”
“아, 그렇죠!”
모카건이 차렷 자세를 한 채로 머리에 손을 올렸다.
“꼭 지키겠습니다. 대륙 최고 상회를 만든 후 사천상회의 진짜 주인이 유렌님이라고 밝히겠습니다.”
“좋네요. 그렇게 합시다.”
“하하하!”
언젠가는 모카건의 말대로 사천상회가 대륙 최고의 상회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상회니,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뭐죠?”
“제국 수사관이 가져간 다스 상회의 비밀자료들의 복사본을 받아봤는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모카건이 품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 서류는 다스 상회의 자금흐름을 나타나는 자료입니다. 여기 보면 제국을 벗어난 북방 쪽에 많은 자금이 흘러갔는데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장소만 적혀 있습니다.”
“흠...”
“아다스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가져왔습니다.”
모카건이 가져온 서류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북방에 있는 산에 많은 자금이 흘러갔건만 어떠한 내용도 적혀 있지 않았다.
원작에서 이런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평범한 일에 사용된 돈은 아닐 거다.
“확실히 좋은 일은 아니겠군요.”
“네. 이런 식으로 돈을 쓴 것을 적어놨다는 건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모카건이 가져온 서류를 다시 읽어보았다.
“여기 한 번 가봐야겠어요.”
“역시.”
내 말을 들은 모카건이 씩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문 뒤에는 처음 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유렌님이라면 분명히 이 장소로 가실 거라 생각해서 미리 사람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
“이쪽입니다.”
“그래.”
모카건이 데려온 남자는 사린이라는 청년으로 고향이 북방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북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서 북방지리에 빠삭해 내게 소개 시켜주었다고 한다.
제국 수사대의 자료를 빼온 것도 사린이고, 자료가 이상하다는 점을 발견한 것도 사린이었다. 듣고 보니, 꽤나 다재다능한 친구인 것 같다.
“어, 어디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됐어. 신경 안 써줘도 돼.”
사린은 나를 거의 신처럼 대하고 있었다. 계속 편하게 대하라고 말해도 내 앞에서 폴더처럼 허리를 접고 있었다.
“니벤 산까진 얼마나 걸리지?”
“내일 저녁 안에 도착 할 수 있을 겁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삼일이 걸리겠지만, 제가 살던 마을 바로 옆이라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네가 살던 마을 옆이라고?”
“네. 그 장소는 마을 옆에 있는 산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지?”
“저도 안간지 2년 정도 돼서, 잘은 모르지만 대략 100명 정도 일겁니다. 작은 마을이죠.”
사린이 살던 마을이 100명이 넘는 마을이었고, 아다스의 자금이 흘러들어간 산 옆에 있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불안함이 등골을 스쳤다.
“속도를 높여야겠다.”
“아, 네. 달리겠습니다.”
“아니, 업혀.”
“네? 어, 어떻게 유렌님께 그런 불경을 저지릅니까! 절대...”
“됐고, 빨리 업혀.”
“아...”
내 심각한 얼굴을 본 사린이 표정을 굳혔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파악했는지 녀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내 등에 업혔다.
“저쪽 숲으로 가주세요!”
“좋아. 계속 길을 안내해.”
“알겠습니다!”
“좀 빠를 거다.”
사린이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뇌인신법을 극성으로 발동해서 고속으로 이동했다.
뇌인신법의 속도와 사린의 길눈 덕분에 저녁이 되기도 전에 사린이 살았던 마을에 도착했다.
“저, 저기입니다. 저 마을이 제가 살던 곳입니다.”
사린은 내 속도에 질려서 덜덜 떨면서 말했다.
“일단 마을에 들리자.”
“알겠습니다.”
내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마을로 향했다. 멀리서 본 마을은 아주 조용했다.
“음...”
마을 입구에서부터 느낌이 왔다. 지금 이 마을에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령 마을처럼 아무 것도 없었다.
“왜, 왜 사람들이 없지?”
내 등에서 내린 사린은 텅 빈 마을을 보고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그는 가장 앞에 있는 집의 현관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뭐, 뭐야! 다 어디 갔어! 페이! 라엔!”
사린이 다른 집의 문을 열며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당연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젠장...”
틀리기를 바랐던 내 불안한 예감이 맞아버렸다. 왜 항상 이런 감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음...”
앞에 보이는 집에 들어가서 바닥과 가구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반항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어. 대략 2달에서 4달 정도인가...”
집안의 상태를 보니, 이 집에서 사람이 사라진 시간은 2달 정도 인 것 같았다.
“유렌님!”
사린이 눈물을 흘리며 내가 있는 집으로 달려왔다. 웃음 가득했던 그의 표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힘이 빠졌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크흑...”
난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직 울 때가 아니야. 그 산으로 가자.”
격동하는 가슴과 다르게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로 사린을 보았다. 녀석은 내 눈을 보다가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직은 아니죠. 가요. 가장 빠른 길을 알려드릴게요.”
**
사린과 함께 니벤 산에 들어왔다. 산 입구에서부터 기막을 씌워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아주 조용히 움직였다.
“이 산에서 사람들이 숨을 곳은 딱 두 군데밖에 없어요.”
“두 군데?”
“네. 정상에 있는 동굴과 산의 중턱에 있는 동굴이에요.”
니벤 산은 높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낮지도 않았다.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정상까지 가는 것도 일이니, 분명 중턱에 있는 동굴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먼저 중턱에 있는 동굴로 가자.”
“알겠습니다.”
사린의 안내를 받아서 중턱에 있다는 동굴로 향했다.
“이 언덕을 넘으면 동굴이 보일 거예요.”
“잠깐.”
“네?”
언덕을 오르려는 사린을 붙잡아서 도로 내렸다. 언덕너머에서 많은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가 놈들의 소굴인 모양이다. 들킬 수 있으니, 넌 여기에 있어.”
“유, 유렌님. 제발, 제발 저희 마을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전부 착한 사람들이에요!”
마을 사람들이 죽었는지, 어떻게 됐는지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하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남기고 은신을 사용한 뒤 언덕을 올랐다.
“음...”
동굴 앞의 공터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마법진의 중앙에는 수십 개의 나무상자가 쌓여있었다.
“역시 저 놈들인가.”
상자 옆에는 활과 검을 들고 있는 다크 엘프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마법진 밖에는 라이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이번 일에는 역시나 세피로스 놈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설마 사람들이 저 상자에 있는 건가?”
기감을 넓고 얇게 펼쳐서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느껴보았다. 상자 안에서 아주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미친 놈들...”
세피로스 놈들은 저 상자 안에 사람들을 집어넣은 것이다. 작은 숨소리가 여러 개 들리는 것을 보니,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쑤셔넣은 것 같았다.
“큭...”
당장 라이칸과 다크 엘프를 죽이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상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고, 저 동굴 안에도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니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포메라.”
구슬을 꺼내서 포메라를 소환했다.
“음, 여긴 또 어디요? 뭘 해야 하오?”
포메라는 이제 왜 불렀냐는 말도 하지 않고 뭘 해야 하는 지를 묻는다. 정말 교육이 잘된 부하다.
“저기 보이지. 저 안에 사람들이...”
포메라에게 현재 상황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남들은 평생 동안 한 번 겪기 힘든 일들을 주인은 왜 수시로 겪는 거요? 도플갱어 킹을 죽인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소.”
“나도 몰라. 어쨌든 난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저 사람들을 지켜줘.”
“음...”
“저기 마법진은 이동 마법진 맞지?”
“멀어서 장소는 보이지 않지만, 워프 마법진이 확실하오.”
포메라는 상자 밑에 그려진 마법진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마법진 들키지 않게 지워버려.”
“들키지 않게 지우라니, 라이칸과 다크엘프 앞에서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어? 7서클이 그것도 못해?”
“무, 무슨 소리요! 할 수 있소!”
“그럼 됐네. 난 간다. 사람들 잘 지켜줘.”
“으...”
속았다는 표정을 하는 포메라 앞에서 칼의 검은 쥐와 은신을 극성으로 사용했다.
“어때?”
“오! 눈앞에서 사라졌건만 보이지 않소.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
“그럼 부탁한다.”
“하아, 알겠소.”
포메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뱉은 말은 지키는 녀석이니 무슨 짓을 해서든 상자의 사람들을 지켜 줄 것이다.
역시 알아차리지 못하는군.
칼의 검은 쥐는 감각자체를 지우고, 은신으로 기척과 존재감을 지웠기 때문에 라이칸이나 다크 엘프들도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놈들을 지나서 동 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내부는 확장을 했는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안쪽은 개미굴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지하로 향하는 길로 들어갔다.
“이 상자...”
지하에는 밖에서 보았던 상자와 완전히 똑같은 상자들이 쌓여있었다.
트드득.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기막을 씌운 뒤 상자를 뜯어보았다. 안에는 예상대로 사람들이 구겨져서 들어가 있었다.
“뭐야. 이 사람들...”
사람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흐리멍텅하게 풀려있었고, 좀비처럼 얼굴에 푸른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해보려고 할 때 누군가가 내가 있는 장소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아는 듯 미친 듯이 빠른 속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