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필로세 숲 (4)
여자의 목소리에는 나에 대한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예전에 소혼보주를 보상으로 줄 때도 미세한 감정이 담겨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목소리에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미안해요. 지금은 저에 대해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여성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했다. 말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지금은 말을 할 수 없다고 한 걸 보니, 어떤 제약이 걸려있는 것 같다.
“지금 말하지 못한다는 건 당신에게 무슨 제약이 있다는 겁니까?”
“정확해요.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내 예상이 맞은 모양이다. 여성의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갔다.
“그럼 부를 호칭이라도 알려주시죠. 나름 오랫동안 봐왔는데 계속 당신이라고 부르기에도 정 없잖아요.”
“...그럼 헬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여자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자신을 헬리아라 불러달라고 했다.
“예전엔 이 하얀 방 전체가 말라비틀어지고 금이 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군요. 이 방은 대체 뭡니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 방은 저 자신이에요.”
“네? 그렇다면...”
“저는 얼마 전까지 당신에게 말을 걸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그럼 이 방이 고쳐지면서 당신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었다는 거군요.”
“네. 맞아요.”
헬리아의 목소리에 조금의 안도가 담겨 있었다. 방 전체에 나 있는 금들을 다시 한 번씩 살펴보았다.
“큰 피해가 날수 있는 사건사고들을 유렌님이 바로 잡아 주셨기 때문에 이 방도 조금씩 복구되었어요. 지금 당신과 제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죠.”
“그래서 제게 힘과 능력을 계속해서 주셨던 거군요. 세상에 어그러진 일들을 고치라고.”
“그래요. 제 회복을 늦추더라도 당신을 살려서 강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음...”
“유렌님은 결국 이곳까지 오셔서 제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셨네요.”
헬리아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회복하기보다 나를 강하게 만드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요. 유렌.”
헬리아가 진심을 가득 담았기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려나왔다.
고맙다?
정말 고마운 건 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정말 감사한 사람은 접니다. 당신이 준 보상들이 아니었다면 전 진즉에 죽었을 겁니다.”
진심이었다.
헬리아가 주었던 능력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솔직히 말해서 그 능력들 대신에 목숨을 10개 줘도 모자랐을 거다.
능력을 개방해주고, 특성을 만들어주고, 마지막엔 당천위까지 연결시켜주지 않았나.
그녀에게는 갚을 수 없는 거대한 빚을 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를 여기까지 도와준 헬리나에게 진심을 담아서 고개를 숙였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정말 고마워요. 유렌 록스.”
헬리나에게서 다시 고맙다는 말이 들려왔다.
“당신은 이세계의 사람이 아닌데도 여기까지 해주셨잖아요. 너무 큰 피해를 받으셨는데, 정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네?”
잠시 동안 숨이 턱 막히고, 내 귀가 잘못 된 줄 알았다.
“제, 제가 이곳의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네. 알고 있었어요. 유렌 록스의 몸에 있는 당신이 유렌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요.”
“그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헤, 헬리나 대체 당신은...”
헬리나는 내가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 나도 모르게 사지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아...”
헬리나의 대답 없이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 담겨있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 지독한 감정이 그대로 내게 전달되었다.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건 제 동료가 한 일이에요. 아니, 그를 이젠 동료라고 부를 수도 없겠군요.”
“동료? 그게 누굽니까!”
“죄송해요. 그것도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 제한인가 뭔가 때문입니까?”
“네. 정말 죄송해요.”
“으득...”
이가 갈렸다.
이제야, 이제 서야 나를 이곳에 소환한 개자식을 알 수 있게 됐는데, 이렇게 막히다니, 너무 답답했다.
“저도 그가 왜 당신을 소환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정말 미안해요...”
슬픔이 스며들어있는 헬리나의 목소리를 듣자, 폭발할 것 같았던 분노가 진흙처럼 가라앉았다.
잠깐.
헬리나가 방금했던 말을 다시 되뇌었다.
나를 왜 소환했는지 모른다?
그 말은 헬리나는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세계를 만든 작가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똥물에 튀겨버릴 놈이 저를 왜 소환했는지는 전혀 모르시는 겁니까?”
“네. 그 똥물... 음,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그에게 배신당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당신이라는 존재를 알 수 있었죠.”
헬리나의 말들을 듣자, 상황이 조금씩 파악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여기까지 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헬리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완벽한 정보는 아닐지언정 대략의 상황을 깨달았다.
헬리나는 자신의 동료에게 당한 뒤 이 깨진 방으로 도망쳤고, 내가 이 세상에 소환 된 것을 알아 차려서 나를 돕기 위해서 자신의 남은 힘들을 쏟아 부었던 거다.
내가 강해지면서 이 세계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해결해서 그녀를 회복시킨 덕에 이렇게 대화가 가능해졌다.
간단히 말해서 나와 헬리아가 서로 상부상조한 덕분이었다.
“제게 중요한 정보를 말하지 못하는 제약이라는 것도 당신을 배신한 추잡한 기생충 때문에 걸린 건가요?”
“네. 당신이 아니라, 저 때문이에요. 제 동료였던 자는 정말 냉정하고, 준비가 철저하거든요. 제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저와 그가 상극이기 때문이었어요.”
“상극? 저...”
“이제 시간이 다 되가네요.”
헬리나에게 다시 질문을 하려 할 때 그녀가 말을 끊었다. 확실히 평소에 비하면 이곳에 굉장히 오래있었던 것 같다.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 다음엔 밖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럼 제가 죽지 않고 계속 힘을 써야겠군요.”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유렌.”
“아니에요. 그런 말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후.”
헬리나에게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선 계속 우울한 목소리만 나왔는데, 처음으로 난 웃음소리가 반가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선물은 드려야죠.”
“무리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무리는 소혼보주를 드릴 때 했어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죠. 후후.”
“아...”
이 세계 존재하지 않는 강자를 불러와 내게 강림시켜 줄 물건을 만들어줬으니, 그녀가 얼마만큼의 힘을 사용했을 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전 미래를 보는 능력도 잃었어요. 그때 당신에게 새로운 힘을 주지 않았다면 왠지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네. 맞아요. 죽었을 겁니다. 아니, 죽었어요.”
슬로스가 가이린을 습격했을 당시에 나는 놈을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당천위가 강림하지 않았다면 나도 죽고 가이린은 지도에서 사라졌을 거다.
“정말 고마웠어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을 하시는 건가요. 후후.”
그렇게 말해도 헬리나는 내 감사의 말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럼 먼저 그 아이부터 시작하죠.”
“네? 어?”
방 한쪽에서 반짝임이 흘러와 내 손목에 감겼다. 반짝임은 내가 손목에 차고 있는 아그네스에게 스며들었다.
“그 아이는 지금 굉장히 무리를 하고 있어요. 아마 당신을 위해서겠죠.”
“아그네스가요?”
“네. 이대로 놔둔다면 그 아이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깨어나지 못할 거예요.”
“아...”
간절한 눈으로 손목에 감긴 아그네스를 쳐다보았다. 나를 위해서 무리를 하고 있다는 말에 칼로 쑤시는 것 마음이 아팠다.
간단한 몬스터들은 비수 하나로 처리했고, 천판이 생기고 나서는 마무리로 만천화우만 사용했으니, 요즘 아그네스가 활약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녀석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많이 실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제 괜찮아졌으니까.”
“정말입니까?”
“조만간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변한 모습이 기대가 되는 군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하나...”
“네?”
헬리나에게서 다른 반짝임이 날아와 나를 휘감았다.
“앞으로 더욱 힘든 싸움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작은 힘이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
“다시 볼 때까지 조심하세요.”
그녀의 마지막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가 원래 있던 고대의 숲에서 정신을 들었다.
“주인?”
“빽?”
포메라와 빽빽이가 뭐하냐는 듯 고개를 틀어서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소?”
“괜찮아. 아주 좋아.”
어깨를 가볍게 풀며 대답했다.
“이제 몬스터들을 처리했으니, 주인이 찾는 다는 것을 수색할 거요?”
아그네스를 만지면 완전히 무너진 두 개의 석상을 보았다.
“아니. 찾을 것은 모두 찾았어. 돌아가자.”
**
영지로 돌아온 다음날 공방을 찾아갔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공방 밖에서 휴식을 취하던 대장장이들이 나를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기라녹스는 어디 있소?”
“공방에 있습니다. 요즘 뭔가를 만드는지, 한 번 들어가면 밤이 되어서야 나옵니다.”
“알겠소. 수고들 하시오.”
기라녹스의 공방에서는 다른 공방보다 훨씬 강한 열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기라녹스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쩡!
쩡!
얼마나 집중했는지 기라녹스가 치는 망치소리가 완벽하게 일정하다. 무인으로 생각해본다면 이미 신검합일을 이룬 단계다.
뒤에서 조용히 기라녹스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 유렌님! 오셨습니까?”
기라녹스는 쇠를 다시 용광로에 넣다가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녀석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가 방해했나보군.”
“아닙니다. 좀 쉬려고 했습니다. 하하!”
기라녹스는 쇠를 내려놓고, 목에 감긴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영주님 덕분에 축제 재밌게 즐겼습니다.”
“웃기고 있네. 너 공방에서 나오지도 않았잖아.”
“아, 알고 계셨습니까?”
기라녹스는 축제기간에도 쇠만 두드리고 있었다고 들었다. 다른 장인들이 놀자고 꼬셔도 오직 쇠만 두드렸단다.
“너 그러다 장가도 못 간다.”
“하하, 그럼 쇠랑 결혼하면 되죠.”
“후회할 걸? 또 뭐에 꽂혀서 나오지도 않고...”
기라녹스의 공방으로 안으로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을 떡 벌렸다. 녀석의 공방 내부는 셀 수 없이 많은 철 조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철 조각들은...”
“맞습니다. 천판의 조각입니다.”
“계속 만들고 있었던 거야?”
“저도 유렌님이 만천화우를 쓰는 것을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연습 삼아서 만천화우를 기라녹스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녀석은 천화만을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장관은 꿈에서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본 그 어떤 무기보다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기라녹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녀석의 어깨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유렌님의 예술 같은 기예에 비해 저희가 만든 천판이 어설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 만들었어. 기간을 생각하면 기적이나 다름없다.”
“그건 변명입니다. 실제로 천판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다시 만들 기회가 생긴다면 놓치지 않기 위해 연습하고 있던 겁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기라녹스의 눈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좋네. 좋은 눈빛이다.”
“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니까.”
말을 마치고 작업대 위에 반쪽 남은 신살수의 어금니를 올려놓았다.
“이, 이건...”
“이걸로 천판을 만들어줘.”
“아...”
귀왕살을 만든 후에 어금니 반쪽을 남겨둔 이유가 바로 천판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기라녹스의 자세와 열의를 보니, 지금이 바로 반쪽 남은 어금니를 맡길 때였다.
“이, 이어금니는 하나 밖에 없잖아요! 혹시 실패라도 하면 이 귀한 재료가...”
“괜찮아.”
어금니를 툭툭 치며 빙긋 웃었다.
“난 네 변함없는 자세와 마음을 믿는다. 혼자해도 되고, 네 스승과 해도 상관없어. 네 마음대로 해봐.”
기라녹스는 나와 뒷골목에서 만난 이후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하기는 했다. 더 열의 넘치고 성실하게.
혹시라도 기라녹스가 신살수의 어금니로 천판을 만드는데 실패하더라도 난 녀석을 절대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제가 뭐라고 이렇게 까지 믿어주시는 겁니까. 저, 정말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기라녹스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녀석에게서 방울진 눈물이 땅에 떨어졌다.
기라녹스는 장인으로써 마스터인 내게 인정받았다는 것에 큰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난 말없이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공방을 나왔다.
“절대,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뒤에서 기라녹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휴식을 취하던 대장장이들이 그 함성에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물론. 너를 믿는다.”
뒤를 돌아 기라녹스에게 미소를 지어주고서 집무실로 올라갔다.
“오늘일 끝났잖아. 왜 여기 있어?”
오늘 업무는 모두 처리했건만 페루가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렌님이 찾으셨던 그 분이 도착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