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필로세 숲 (2)
“저 검노란 구슬...”
그림자 오크의 심장어림에 콩알 만 한 구슬이 노란빛을 내고 있었다.
구슬의 노란색은 그림자의 검은색에 물들어서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주, 주인. 저것 좀 빨리 좀 처리해줄 수 없소?”
“빽!”
포메라와 빽빽이는 그림자 오크에게 겁을 먹은 것처럼 잘게 떨기 시작했다.
어깨에 있는 녀석들의 진동이 손가락까지 닿고 있었다.
“기다려봐.”
그림자 오크를 죽이려면 구슬을 노려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오크의 머리를 뚫어버린 비수를 회수한 뒤 그림자에 먹혀버린 노란 구슬을 향해 쏘아냈다.
부그그그.
오크에게 붙어있던 그림자가 둥글게 솟아올라 내 비수를 막으려했지만, 그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기이잉!
평범하게 날아가던 비수가 드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비수에 전사경을 담은 것이다.
퍼어억!
전사경이 실린 비수는 회전력을 이용해서 그림자 오크의 방어를 뚫어버리고 그림자에 둘러싸인 노란 구슬을 깨뜨렸다.
콰아아!
구슬이 깨진 순간 오크를 감싸고 있던 그림자가 안개처럼 흩어지고, 오크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저, 저 괴물에게도 약점이 있는 거로군! 대단하오. 주인! 최고요!”
“빽!”
그림자 오크를 쓰러뜨린 것을 본 포메라와 빽빽이가 잘했다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들어올렸다. 물론 녀석들의 인사들 받기 위함은 아니었다.
우우웅.
오크의 몸속에 있던 깨진 구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노란빛이 올라와 내 손으로 들어왔다.
흡수된 빛은 아주 작은 따스함을 준 뒤 내 몸 속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이름을 잃은 자’의 파편을 획득하셨습니다.]
올라온 메시지를 보자, 내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이 노란빛은 엔비의 파편이었군.”
내 몸으로 들어온 작은 구슬은 칠죄종이 죽은 곳에서 나오는 이름 잃은 자의 파면이 맞았다.
노란색인 것을 보니, 엔비의 것이었고, 작은 이유는 이 숲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에게 나뉘어 들어갔기 때문일 거다.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타락하게 된다는 건가...”
지금까지 칠죄종이 죽은 이후 ‘이름을 잃은 자의 파편’은 많은 시간이 지나기 전에 내게 흡수 되었다.
이 숲이 이렇게 된 이유는 엔비가 가진 이름 잃은 자의 파편이 시간이 지나며 폭주했기 때문인 것 같다.
만일 이런 일이 가이린이나 록스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주인. 뭘 그리 혼자 중얼 거리는 거요? 뭣 좀 알아낸 거요?”
“혼자 중얼 거린다니. 말이 심하네. 어쨌든 이유는 알아낸 것 같아.”
“정말이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저게 대체 무엇이오?”
“나도 몰라.”
“엉?”
포메라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모로 틀었다.
녀석에게 이 일들을 설명해주려면 알려줘야 할 비밀이 여러 가지라 지금 말해주긴 힘들다.
“모른다면 모른다고 하지...”
“시끄러워.”
궁시렁거리는 포메라는 조용히 시키고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숲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르르...”
“카아악...”
오크와 홉고블린, 피렌트를 비롯한 하급 몬스터들이 숲과 나무를 부수며 우르르 나타났다.
“주, 주인. 이놈들 모두... 으으으...”
“그래. 똑같은 놈들이야.”
몬스터들은 그림자에 둘러싸여 통곡을 하고 있었고, 이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 본 오크만이 아니라, 그림자에 둘러싸인 놈들 모두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크르르르.”
“키아아아!”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그림자들이 내고 있는 기괴한 소리다.
“으으, 이상하오. 주인. 저 몬스터들에게서 퍼지는 기운이 너무 괴롭소...”
“빼, 빽!”
포메라와 빽빽이는 그림자 몬스터들에게 이상할 정도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평소의 녀석들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너흰 뒤에 있어.”
빽빽이와 포메라를 뒤로 보내놓고 몬스터들의 앞에 섰다.
“역시 있군.”
그림자 몬스터들은 처음의 오크와 마찬가지로 몸속에 작은 노란색 구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심장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곳저곳 다양하게 박혀 있었다.
우우웅.
몬스터들의 수가 20마리가 넘었지만 많은 비수를 쓸 필요도 없다.
가지고 있던 비수 하나를 공중으로 띄워 연위결을 운용했다.
파아앙!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비수가 가장 앞에 있던 홉고블린의 머리를 꿰뚫어 구슬을 깨버렸다.
고블린 머리에 있던 그림자가 뭉쳐서 막으려 했지만, 비수에 담긴 거력과 속도를 감당하지 못했다.
퍼퍼벙!
고블린을 쓰러뜨린 비수는 힘을 잃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오크의 오른 다리를 관통하고, 반대편에 있던 피렌트의 어깨마저 부숴버렸다.
퍼퍼퍽!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비수 하나가 스물이 넘는 그림자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처리해버렸다.
“대, 대단하오. 역시 주인이오!”
“7서클 마법사님이 왜 이렇게 쫄아 있는 거야?”
“나, 나도 잘 모르겠소. 저 몬스터들을 덮고 있는 그림자를 보는 순간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소. 공포에 질런 것처럼 말이오.”
“빽!”
빽빽이가 동의한다는 듯 날개를 퍼덕였다.
7서클인 포메라와 단순무식한 빽빽이가 움직이기조차 힘들 정도의 공포를 느낀다면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요?”
“그래. 별 느낌 없어.”
“주인이 대단한 것 같소. 솔직히 그림자 몬스터들을 마주보기도 힘드오.”
포메라의 말을 들어보니, 그림자 몬스터들은 내 생각 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야기 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눈에도 보이지 않고...”
여태까지 창조주의 눈에 누군가의 정보가 보이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간, 몬스터, 다른 종족, 세피로스, 칠죄종에 드래곤인 카이젤의 정보까지 보였건만 그림자에 휩싸인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는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드디어 접근한 거다.
처음부터 정해진 원작의 스토리가 아니라,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이유가 이 그림자들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화아악!
그림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쓰러진 몬스터들에게서 나온 노란빛이 하나로 뭉쳐서 내 손으로 흡수되었다.
[‘이름을 잃은 자’의 파편을 획득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이 숲에 있는 몬스터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핵을 뚫어야 잡을 수 있는 그림자 몬스터들의 특성상 독을 사용하는 대량 학살은 불가능하다.
“일단 숲 안으로 들어 가봐야겠어.”
“아,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소? 저곳으로?”
포메라와 빽빽이가 서로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지.”
“으음...”
“무서우면 너희는 돌아가도 돼.”
“아, 아니오!”
포메라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얼른 내 어깨에 붙었다. 빽빽이는 그보다 빠르게 내 어깨에 매달렸다.
내가 놔두고 갈까봐 겁에 질린 표정이다.
“후...”
둘의 모습에 평소라면 웃었겠지만,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포메라가 이 정도로 거북해하다니, 그림자들은 분명 평범한 존재들을 압박하는 어떤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꽉 잡아. 달려갈 거니까.”
“아, 알겠소!”
몬스터들을 다 잡으면 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단 러스트가 말했던 필로세 숲의 깊은 곳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
예전에 했던 것처럼 숲을 가로지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파아아앙!
전력으로 뇌익을 운용하자, 밟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공기를 터트리는 파공음과 함께 내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 엄청나군.”
포메라는 뇌익의 속도에 감탄했는지 입을 떡 벌렸다.
전력의 뇌익은 정말 날개를 단 것처럼 빨라서 순식간에 필로세 숲의 초입을 지나, 중대형 몬스터들이 있는 중간 숲에 도착했다.
“계속 갈 테니까. 마음 놓지 마.”
“알겠소!”
“빽!”
중간 숲 역시 빠르게 지나치려고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달렸다.
“으윽...”
달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포메라가 갑자기 억눌린 신음소리를 냈다.
“빽...”
빽빽이도 마찬가지로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왜 그래?”
중간에 있는 높은 나무에서 멈춰서 둘의 상태를 살폈다.
“아, 아까 그림자 몬스터들을 본 것처럼 몸이 떨리고 속이 울렁거리고 잇소.”
“뭐?”
“주인은 모르겠지만, 근처에 그림자 몬스터들이 있을 거요. 아까보다 더 강한 놈들이...”
포메라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허...”
내가 지나온 숲이 흔들리고 있었다.
숲에 있는 그림자 몬스터들이 모조리 나를 쫓아오고 있어서 숲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슨 추적기라도 단 건가?”
안력을 집중하자, 그림자 몬스터들은 정확하게 내가 있는 나무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쿵!
아래를 보니, 어느새 나타난 그림자 오우거가 내가 올라가있는 나무를 내려치고 있었다.
그 뒤로도 그림자에 뒤덮인 베어울프, 트롤 주술사, 다른 오우거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돌겠군.”
조용히 이동하지는 않았지만, 몬스터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시끄럽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는 놈들의 기척을 읽을 수 없는데, 저 놈들은 내 위치를 찾을 수 있다니,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래도 오는 건가?”
조용히 은신을 사용해서 떨어져있는 나무로 도약했지만, 몬스터들은 알고 있다는 듯 내가 있는 나무로 움직였다.
내게서 어떤 기척이나 기운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으으으...”
몬스터들이 몰려올수록 포메라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리고 빽빽이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참아. 계속 간다.”
“아, 알겠소.”
빠지지직!
내공을 전력으로 휘돌려서 뇌인신법을 발동하자, 밟고 있던 나무가 통째로 터져나갔다.
그림자 몬스터들은 내 위치를 알 수 있으니, 더 이상 소음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른 것을 버리고, 속도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파아아앙!
너무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세상이 멈춘 것처럼 보이고, 뒤에 잔상이 남았다.
쿵.
30분도 지나지 않아, 이정표가 되는 중앙 숲의 거대나무에 도착했다.
“버틸 만 해?”
“뻭!”
“난 괜찮소. 다만 그림자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주인을 쫓고 있소.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고 있소.”
“알고 있어.”
가볍게 뒤를 보자, 더욱 많은 놈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숲 전체가 나를 따라오는 느낌이다.
“그림자라, 어디선가...”
사실 난 의문만 들뿐 그림자 몬스터들에게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포메라와 빽빽이가 걱정되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다음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출 거야. 무슨 문제 있으면 말해.”
“알겠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신법을 운용했다.
**
“후...”
드디어 고대의 숲이라 불리는 필로세 숲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전력이상으로 신법을 운용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다.
“주인. 보았소? 이 숲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은 그림자를 덮고 있었소.”
“그래.”
지나오면서 본 몬스터들은 모두 그림자에 먹힌 상태였다.
간단히 말해서 이 숲 전체가 그림자에 뒤덮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단 가자. 계속 쫓아오고 있으니.”
“이 장소에 대해 잘 아시오?”
“아니.”
필로세 숲의 가장 안쪽에 있는 고대의 숲은 신들 위에 있는 두 고대신을 섬기는 곳이었다고 설정만 해놨기 때문에 나도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일단 석상을 찾아야해.”
러스트는 무너진 석상이 있는 곳에서 엔비가 죽었다고 했기 때문에 석상을 찾기 위해 나무위로 올라갔다.
“저기군.”
서쪽에 무릎만 남은 두 석상의 잔재가 보였다.
무릎만 남았어도 내 눈에 보일정도였으니, 무너지기 전이었다면 드래곤 저리가라 할 정도의 크기였을 거다.
석상이 있는 곳으로 바로 이동했다.
“이런 곳에 석상이 있다니. 석상의 상태를 보니 상당히 오래된 것 같소. 거의 천년도 넘을 것 같소.”
“그래.”
두 고대신의 석상은 무너져서 무릎만 남아있었는데, 단면을 보니 부숴진지 최소 몇 백 년은 지나보였다.
“역시 없나.”
석상 근처를 살펴보았는데 러스트가 말했던 대로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주, 주인. 그림자 놈들이 오고 있소.”
“알겠어.”
석상 주변을 둘러보고 일어날 때 포메라가 다시 떨기 시작했다.
“일부러 몰이를 한 거니까. 한 번에 처리...”
쿠구구구.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제거할 준비를 하려 할 때 땅에서 집채만 한 거대한 구슬이 올라왔다.
구슬은 다 마신 유리병처럼 텅 비어있었다.
콰아아아!
구슬에 다가가려는 순간 하늘과 땅에서 시꺼먼 그림자들이 날아와 구슬 속으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구슬을 순식간에 채워버리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그림자 구슬이 너무 거대해져서 하늘에 검은 태양이 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불길한 태양의 느낌을.
콰아아아!
그림자 구슬에서 두 장의 웅장한 날개가 솟아올랐다.
직삼각형 모양의 날개는 보는 것만으로 살벌한 느낌을 주었다.
쿠쿠쿵!
이번에는 날카로운 앞발과 두터운 뒷발이 튀어나왔다.
“쿠아아아아!”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구슬의 머리는 투견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시꺼먼 이빨이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검은 투견이라...”
그림자의 구슬에서 만들어진 건 날개가 달린 검은 투견이었다. 다만 투견의 크기는 드래곤인 카이젤의 본체보다도 거대했다.
“끄으윽!”
“빼, 빽...”
내 어깨에 있던 포메라와 빽빽이는 그림자 투견을 보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둘에게는 저 투견이 주는 압박이 상상이상으로 엄청난 것 같다.
“주, 주인...”
“너희 뒤로 빠져 있어.”
둘은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저 뒤로 날려버린 뒤 내력을 이용해서 가볍게 착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크르르르.”
눈알조차 검게 번들거리는 투견이 나를 노려보며 이를 드러내자, 멀리 있는 포메라에게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쁘지 않군.”
포메라와 빽빽이는 투견에게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지만, 난 오히려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많은 그림자 몬스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알아서 모여주다니, 고마울 뿐이다.
“하나씩 처리하기 귀찮았는데 잘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