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필로세 숲
“난 준비 끝났어.”
일리아는 가볍게 몸을 풀고 검을 빼들었다.
입고 있는 갑옷과 검을 보니, 그녀는 대련이 아니라 실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좀 더 수련을 하고 와도 좋았을 텐데.”
“지금이 딱 이라고 내 감이 말하고 있어.”
“하여튼 고집은.”
“고집이 아니라고! 정말 느낌이 온다니까.”
일리아가 정말 믿는 게 있다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그녀는 검에 관한 특성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검후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말대로 어떤 감이 오고 있다면 그걸 믿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알겠어. 그럼 시작하자.”
“그러고 할 거야?”
난 경갑조차 걸치지 않고 수련복만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일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넌 잘 모르겠지만 고수는 벗을수록 강해지거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어쨌든 그대로 하겠다는 거지?”
“그래. 갑옷은 별 필요 없어.”
“열 받기는 하지만, 네가 나보다 한참 위에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후회하게 해주겠어!”
일리아의 표정이 돌변했다.
적은 본 것처럼 안광이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긴장감에 연무장의 분위기가 팽팽하게 조여졌다.
컁!
일리아의 강렬한 시선을 마주보며 검을 뽑았다.
쾅!
일리아가 땅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단점이었던 속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쾌가 주무기인 아린 이상의 속도였다.
후우웅!
보법을 밟아서 옆으로 빠지며 그녀의 공격을 회피했다.
부우웅!
일리아는 내가 자신의 검을 피하는 것을 보자마자. 검에서 시퍼런 오러를 뽑아내 내 목을 노렸다.
쩌어엉!
일리아가 사용하는 패검의 최대 위력이 나오기 전에 중간에서 막아버렸음에도 느껴지는 힘과 오러가 상당했다.
“흥!”
일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을 살짝 빼는 척하면서 반대로 더욱 밀어붙였다.
콰과광!!
일리아의 검이 떨어진 대지가 지진이 난 것처럼 갈라졌다.
패와 쾌, 두 무리가 섞인 일리아의 검은 거의 완성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하앗!”
검을 세로로 들어서 일리아가 횡으로 휘두르는 검을 막았다.
쩌정!
일리아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폭풍처럼 검을 휘둘렀지만, 난 가볍게 검을 움직여서 그녀의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이 정도는 부족하다는 거지!”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 것을 깨달은 일리아가 감추고 있던 모든 힘을 끌어내자, 그녀의 몸과 검에서 나오던 오러가 몇 배로 짙어졌다.
빠지지직!
저런 위력을 담은 검력은 맞서기보다는 피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에 보법을 사용해서 회피했다.
콰아앙!
내 대신 일리아의 검을 후려 맞은 땅이 포크레인으로 지진 것처럼 파여 나갔다.
쿠우웅!
일리아는 내가 자신의 모든 공격을 회피하거나 막아내자, 자포자기한 것처럼 계속해서 내 주변의 땅을 부숴버렸다.
쿠구구구.
일리아의 막무가내 공격에 연무장은 어느새 수십 개의 포탄이 터진 것처럼 초토화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아주 잘 피해 다녔지?”
일리아는 이마에 땀을 송골송골 매단 채로 피식 웃었다.
지쳐있었지만, 무언가를 노리는 듯 눈빛이 아직 살아 있었다.
“내가 농부도 아니고 땅만 치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
일리아는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내 아래의 땅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짓처럼 내 주변의 땅은 원을 그리며 갈라져 있었다.
“이건...”
“알아차려도 늦었어!”
콰아아아!
자신의 모든 오러를 검에 담았는지, 일리아의 검이 오러 블레이드 급으로 거대해졌다.
쿵!
일리아가 검을 대지에 내려찍자, 땅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어.”
“뭐?”
일리아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준 다음 오른 다리에 강대한 내력을 담아서 흔들리는 땅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공기가 터지는 굉음이 울리며 흔들리던 땅이 아무 일 없다는 듯 멈춰버렸다.
“뭐, 뭐!”
자신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에 일리아는 눈이 풀리고, 힘이 다한 것처럼 땅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런...”
“나쁘진 않았지만, 너무 눈에 보였어.”
“으윽...”
일리아는 나와 검을 맞부딪치고선 정면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거다.
그래서 나를 노리는 척하며 내가 서있는 땅을 무너뜨릴 준비를 해온 거다.
“네가 마지막 공격을 하려 할 때 이미 내 오러가 땅에 파고 들어가 있었어.”
“아...”
“미리 오러를 넣어놓지 않았다면 내 의도대로 내가 서있던 땅이 무너졌겠지.”
“그, 그럼 처음부터 알았다고?”
“네 검이 전력으로 휘두를 때보다 아주 약간 늦어졌으니까.”
“하, 무슨 귀신도 아니고!”
일리아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온 힘을 다했기에 시원하다는 표정이다.
“에휴...”
그녀는 그대로 땅에 드러누워 버렸다.
팔다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보니, 체력과 오러를 모두 사용해서 탈진 한 상태다.
“그래도 정말 잘했어. 예전의 너라면 밀리든 말든 무식하게 힘으로만 돌진했을 테니까.”
“시, 시끄러워.”
“멋졌어.”
일리아는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돌렸다.
피식 웃고서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야...”
일리아의 등에 내력을 넣어서 지쳐버린 몸에 기운을 돋아주었다.
“휴, 너는 정말 다른 것 같아.”
“뭐가?”
“마스터들에게는 벽이 느껴졌지만, 너는 그런 것조차 없어. 하늘이나, 바다를 보는 것처럼 그냥 광활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솔직히 네 앞에 서는 것도 겁이 날 정도였어.”
일리아가 강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내 힘을 느낀 것이다.
다른 기사나 검사였다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을 거다.
짝짝짝!
옆에서 구경을 하던 아버지가 박수를 치면서 일어났다.
축제 마무리를 도와주고 영지로 돌아가려던 아버지는 이 대련을 보고 싶다며 오늘까지 남아계셨다.
“사랑싸움이 아주 좋구나.”
“그렇게 가라고 해도 안 가시더니, 그 말씀 하시려고 남으신 겁니까?”
“에이, 정 없는 녀석 같으니.”
아버지는 하는 말과는 달리, 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나와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괜찮으냐?”
“좀 지친 것 뿐이에요.”
“다행이구나. 그런데...”
말을 멈춘 아버지의 얼굴에서 즐겁다는 미소가 피어났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갑자기 걱정되었다.
“너희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냐?”
“예?”
“너희도 나이가 찼지 않느냐. 며칠간 보니, 유렌도 가이린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고, 이제 혼인을 생각해도 좋을 것 같구나.”
“아...”
일리아는 당황했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고 멈춰버린 땀이 다시 흘러내렸다.
“흠...”
나는 어쩔 줄을 모르는 일리아를 한 번 보고서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만간 해야죠.”
“엉?”
“뭐?”
일리아와 아버지가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둘 다 넋이 나간 표정이다.
“아버지가 말해놓고 뭘 그렇게 놀래요.”
“아, 아니, 예전의 너라면 못들은 척하거나, 말을 돌리거나 했을 테니까. 이렇게 정직하게 말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
“여러 가지가 바뀌었으니까요.”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가장 많이 변한 건 내 마음이다.
예전에 혼인이나, 가족에 대해 말을 아끼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은 내가 언제 현실로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흔들리던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일이 어떻게 풀리든 이곳에서 이뤄낸 인연들에 책임을 지기로.
그래서 록스 후작을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한 거다.
“너...”
“안 할 거야?”
“그, 그게...”
일리아는 언제 지쳤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귀까지 빨간 상태다.
“나, 나중에 얘기하자!”
일리아는 나와 싸울 때 보다 더 빨리 달려서 성으로 돌아갔다.
“인마. 안 쫓아가고 뭐하냐?”
“나중에 확실하게 말해야죠.”
“갑자기 너무 바뀌니까 적응이 안 되네. 내 아들 맞아?”
아버지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예전엔 아니었지만, 지금은 맞아요.”
**
축제는 하는 것도 일이었지만, 끝낸 뒤 정리를 하는 것도 일이다.
뒷정리를 끝내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가 있었다.
남아 있던 업무를 처리한 뒤 수련을 핑계대고 연공실에 들어왔다.
부르르.
연공실에 들어가자마자 혼의 구슬을 꺼내서 포메라를 소환했다.
“빽!”
“오! 건방진 새. 오랜만이오.”
어깨에 있던 빽빽이가 포메라의 머리위로 올라가서 녀석의 두개골을 쪼아댔다.
“또 시작이군. 주인 좀 말려주시오.”
“너 반가워서 그러는 걸 왜 그래.”
“골이 신나게 울리고 있는데 반갑다니, 두 번 반가우면 아주 머리를 터트리겠소?”
“그만하고 이리와.”
“빽!”
빽빽이가 내 머리위에서 부리를 쫀다고 생각하니, 섬뜩해졌다. 바로 녀석을 끌어내렸다.
“왜 부르셨소?”
“오랜만에 붕붕이 좀 타려고.”
“카이젤님은 어디로 간 거요? 나보다 훨씬 빠를 텐데.”
“나도 몰라. 술 마시고 싶다고 지 맘대로 가버렸어.”
“허...”
부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일에 그를 부를 필요는 없다. 포메라의 이동마법도 물이 올랐으니까.
“그럼 어디로 갈 거요?”
“필로세 숲.”
“필로세 숲? 벌써 3번째 아니오?”
“그래. 나도 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거기다 맛있는 거라도 숨겨놨소? 끝없이 가는군. 어쨌든 알겠소.”
포메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구석으로 가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 됐소.”
1시간정도 빽빽이와 놀아주다보니, 포메라가 마법진을 완성시키고 우리를 불렀다.
“올라가시오.”
“알겠어.”
“그럼 출발하겠소.”
포메라는 자신도 마법진 위에 올라가서 워프를 발동시켰다.
번쩍.
시야가 바뀌고 대문처럼 익숙해진 필로세 숲의 입구가 보였다.
“수고했어.”
“음음...”
포메라는 평소와 달리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뿐 돌아가지 않았다.
“안 가냐?”
“이 숲엔 인간이 없으니, 주인과 같이 가도 상관없지 않소?”
“상관없긴 하지.”
“그럼 구경 좀 하겠소. 대체 뭔 보물을 묻어놔서 찾아가는지 궁금하오.”
“보물도 아니고, 헛고생할 수도 있어서 별로 재미없을 텐데? 뭐, 마음대로 해.”
“알겠소.”
포메라는 자신의 몸을 빽빽이 정도로 작게 만든 후 내 어깨로 올라갔다.
“빼...”
내 양쪽 어깨 모두가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는지 빽빽이가 날개를 흔들며 포메라에게 달려 들려했다.
“좀 가만히 좀 있어. 어떻게 점점 단순해지냐.”
포메라를 날려버리려고 달려드는 빽빽이의 부리를 부여잡아서 다시 어깨에 올려놓았다.
“좀 편하게 가자.”
“빽.”
“어...”
빽빽이를 조용히 시키고 숲의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등에 얼음을 넣은 것처럼 차가운 감각이 들었다.
필로세 숲은 전체적으로 몬스터들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내 감각엔 그 어떠한 몬스터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이 터진 건가?”
몬스터들이 내 감각을 피해낼 리가 없으니,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왜 그러시오?”
“빽?”
“몬스터들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그, 그러고 보니 내 감각에도 잡히지 않소.”
“좀 천천히 가야겠는데...”
숲의 초입은 빠르게 지나가려 했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상황을 봐야 할 거 같다.
스르륵.
앞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전히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령처럼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다.
“그어어어...”
수풀이 갈라지고 오크가 나타났지만 평소에 보던 오크가 아니었다.
“저, 저게 뭐요. 어찌 오크에 그림자가 붙어있는...”
“나도 몰라.”
“쿠어어어.”
바닥에 붙어 있어야 할 그림자가 오크를 껍질처럼 뒤덮고 있었다.
너무도 기괴한 모습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이런 건 처음 보았소.”
“빽!”
“포메라. 저거 언데드 아니지?”
“쿠어어...”
자신의 그림자에 둘러싸여 절규하는 오크의 모습은 여태까지 봤던 그 어떤 것들보다도 이질적이었다.
“아닐 거요. 저, 저 오크는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소.”
“크어어어어.”
혹시 몰라서 오크에게 화골산을 뿌려보았지만 반응이 없다. 느릿한 걸음으로 내게 접근하고 있었다.
슈아아앙!
오크의 머리를 향해 비수를 날렸다.
오크는 반응을 하지 못했지만, 놈을 둘러싸고 있는 그림자가 비수를 막아냈다.
“웃기는군.”
이번엔 강기를 씌워서 비수를 날렸다.
퍼엉!
감기를 씌운 비수가 오크의 머리를 터트렸지만, 놈의 몸을 감싸고 있는 그림자가 구멍 난 머리를 메워버렸다.
“어디...”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
???
“무슨!”
창조주의 눈은 오류가 난 것처럼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세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창조주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났다.
“근데 저건 또 뭐야...”
그림자 속에 또 다른 것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