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러스트 (2) (199/241)

199화 러스트 (2)

숨이 턱 막히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러스트는 일리아의 단아함, 로디엔의 청초함과 달리 압도적인 관능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괜찮겠죠?”

공기를 녹이는 것 같은 음석과 함께 러스트가 우아한 발걸음으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가벼운 미소에 파도가 치는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음...”

조화경은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지고한 경지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완벽하게 정지된 눈으로 러스트를 쳐다보았다.

“내게 무슨 짓을 하려 한 거지?”

러스트의 능력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며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죄송해요. 당신이 정말 소문대로의 사람인지, 한 번 살펴봤어요.”

러스트는 아찔한 미소를 담은 채로 한 발 더 앞으로 나왔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내 마음과 눈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찾아온 보람이 있어요. 유렌 록스 후작님.”

러스트가 방긋 웃고서는 뒤로 물러나서 드레스를 잡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분위기를 바꾼 그녀에게선 전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희 구면이죠?”

“난 당신을 본 적 없는데?”

“이렇게 하면 될까요?”

러스트의 화려한 금발이 나와 같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투명하리만큼 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그녀의 관능미를 더욱 상승시켰다.

“어때요. 이제 알아보시겠어요? 빛의 기사님?”

속으로 크게 놀랐지만,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무표정을 유지했다.

내가 러스트를 본 건 두 번이다.

신룡굴에서 내려오다가 우연히 마주쳤던 게 첫 번째, 엔비와 싸울 당시 놈의 폭주를 막은 게 두 번째다.

러스트는 그 중에 두 번째를 말하는 거다.

빛의 기사일 때의 나와 현재의 나는 얼굴과 머리색이 전혀 다름에도 그녀는 내가 빛의 기사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가요? 사실 옛날 일은 별 상관은 없으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 했지만 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알지만 넘어가 줄 게 같은 느낌이다.

“제대로 소개를 드리죠. 제 이름은 러스트. 당신을 공격했던 괴물들과 같은 세력에 속해있어요.”

“음...”

러스트가 대화를 하러 다가올 줄은 예상했지만 자신의 정체까지 솔직하게 까발릴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도 미소의 변화가 없다.

“적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거지?”

“저희가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은 없어요. 하지만 모르시진 않을 거예요.”

“뭐?”

“당신이 제국에서 싸웠던 바위인간, 가이린을 습격했던 강력한 괴물, 고요의 숲에서 만난 검사, 록스에서 메테오를 날린 마법사까지. 그들 모두가 제 형제들이에요.”

순간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러스트는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솔직하게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난 적인데, 왜 이러는 지 대체 알 수가 없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고, 왜 내게 찾아온 거지? 네 말대로라면 너와 난 적 아닌가? 시작을 누가했든 네 형제들은 내게 죽었잖아.”

“우리는 일반적인 존재와 달라요. 그림자에게서 동시에 태어났거든요.”

칠죄종의 탄생에 대해서도 말을 하다니, 러스트가 정신이 나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도 알아차렸겠지만 복수를 하러 온 건 아니에요. 나중에 싸우게 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러스트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양손을 올리고서 아무 의도도 없다는 듯 백지 같은 웃음을 지었다.

“제 형제 중에 글러트니라는 녀석이 있어요.”

“글러트니?”

글러트니의 이름이 나왔을 때 숨소리를 참으며 전혀 모르는 척 연기했다.

“당신은 글러트니의 여러가지 계획들을 계속해서 방해했어요. 우연히 일어나서 전혀 모르시고 있겠지만.”

러스트는 내가 마이라를 글러트니의 손아귀에서 구출 한 것을 말하는 거다.

그때 이후로 글러트니가 내 정체를 파악하고 계속해서 나를 노리고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을 거다.

“그걸 왜 내게 말해주는 거지?”

“글러트니가 변했거든요.”

“변해?”

“글러트니는 가지고 있는 능력의 특성상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는 머리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저희의 원래 목표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 같아요.”

“나를 노린다는 건가?”

“그건 일부분일 뿐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가 당신을 정말 죽이려고 했다면 한참 전에 이미 당신은 죽었을 거예요.”

러스트의 말대로 내가 성장하기 전에 습격을 했거나 칠죄종 두 명이 동시에 왔다면 나는 순식간에 사라졌을 거다.

“글러트니는 저희를 하나씩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제가 그걸 확신하게 된 건 엔비의 일이었죠. 당신과 처음에 만났던 바위인간이 바로 엔비에요.”

“엔비...”

그리드는 내 손에 엔비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난 엔비와 제국 수도에서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죽었다고 들었을 때 거짓말이라 생각했었다.

“글러트니는 엔비가 당신의 손에 죽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죠.”

“글러트니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안거지?”

“저와 엔비는 정 반대의 성향을 가져서 겉으로는 매일 싸워도 실제로는 가장 친해요. 글러트니는 그걸 모르고 있었죠.”

이제야 엔비가 폭주하려 할 때 러스트가 나타나서 막은 게 이해가 간다.

그녀는 나를 구하려 한 게 아니라, 엔비를 구하려고 그 자리에 왔던 거다.

“엔비는 글러트니의 지시대로 움직이기 전에 저를 찾아와서 귀찮은 일을 시킨다며 하소연을 했어요.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그게 그의 마지막 하소연이 되었죠.”

“엔비는 뭘 하러 간 거지?”

“글러트니의 지시로 고대의 보물을 찾으러 간다고 했어요.”

“그럼 그 보물을 찾으러 가다가 죽은 건가?”

“글러트니는 우리에게 엔비가 당신에게 죽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엔비가 죽었다고 한 장소는 그가 간다는 장소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죠. 그래서 전 엔비가 원래 가기로 한 장소를 찾아갔어요.”

러스트가 붉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엔비가 간다는 장소에 그의 흔적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어떠한 전투의 흔적도 없었어요.”

“그렇다는 건,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는 건가.”

엔비는 자신의 몸에 대지를 덮어서 방어력을 미친 듯이 올릴 수 있는데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건 두 가지 중 하나다.

“맞아요. 엔비가 아는 사람이라 방심했을 때 당했거나, 감당 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당했든가 둘 중에 하나에요.”

“음...”

“그 이후에도 글러트니는 다른 형제들에게 당신을 노려야 한다고 계속 지시를 내렸죠.”

“너 말고 글러트니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건가?”

“저희는 7명이에요. 저와 글러트니를 제외하면 이제 한 명이 남았죠. 저희 중에서도 리더 격을 맡는 자인데, 다른 사람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아요. 그는 우리가 모두 죽든 말든, 글러트니가 배신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프라이드.

러스트의 말대로 칠죄종 중에 교만을 담당하는 프라이드는 자신의 절대적인 무력만을 믿는다.

자신의 흥미만 가지고 움직이는 놈이라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신경 쓰지 않을 거다.

“그래서 이런 엄청난 비밀들을 내게 말해준 이유는 뭐지?”

“저까지 글러트니에게 멍청하게 당하는 건 사양이거든요. 미리 손을 써놓는 거죠. 말하자면 보험이랄까.”

러스트의 입술이 말려 올라가서 차가운 미소를 만들어냈다.

“사람이 오는군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할 이야기도 모두 전했고.”

러스트는 우리가 있는 테라스로 다가오는 이레아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적과의 대화도 나쁘지 않군요. 나중에 또 들리죠.”

“하나 만 더 묻지. 엔비는 어디서 죽었지?”

“가보셔도 아무 것도 없을 텐데요?”

“그냥 말해줘.”

러스트는 내가 기대고 있는 턱 위에 올라가서 아찔한 미소를 지었다.

“필로세 숲의 가장 깊은 곳.”

“거긴...”

“그곳의 이름은 고대의 숲이에요.”

그 말을 남기고 러스트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착지조차 없이 바람처럼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필로세 숲이라...”

얼마 전에 가서 뱀을 때려잡고 구슬을 얻어서 이제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숲에 다시 가게 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유렌님? 밖에 너무 오래 계셔서...”

“네. 이제 들어갈게요.”

어두운 하늘을 잠시 보다가 이레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연무장에 후라켄, 할아버지, 아버지, 일리아, 이레아, 아린을 포함한 내 기사들이 차례로 서있었다.

이들은 만천화우를 보기 위해서 연무장에 모인 건데, 원래는 후라켄과 할아버지만 데려오려 했지만 아버지가 끼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불러 일이 커져버렸다.

“기대되지 않나?”

“난 보지는 못했지만 말만 들어도 기대되는군.”

“만천화우를 보게 되면 자네도 나처럼 잠을 자지 못할 걸세.”

할아버지는 오비스를 상대하다 기절하셔서 만천화우를 보지 못하셔서 그런지 기대보다는 호기심을 가지고 계셨다.

“나도 그 만천화우가 뭔지 궁금하긴 하군.”

“마음 단단히 드셔야 해요. 뭘 생각하시더라도 깜짝 놀라실 거예요.”

아버지의 말에 일리아가 긴장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 정도나?”

“그 기술을 눈앞에서 본다는 건 무인에게 기연과 다름이 없어요. 정신 차려야 해요.”

“음...”

호기심으로 차있던 아버지의 눈빛이 깊어졌다.

모두를 한 번씩 쳐다 본 뒤 그들과 반대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만천화우라는 기술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서 한 번 밖에 보여드리기 힘듭니다.”

“알고 있네. 어서 시작해주게. 미칠 것 같아.”

“그래. 온 정신을 집중해서 볼 테니, 걱정 말거라.”

두 마스터는 주인 찾는 강아지처럼 조급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시작합니다.”

미소를 지우고 호흡을 아주 천천히 골랐다.

우우웅.

천판을 허공으로 띄운 뒤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주 천천히 천화를 개화했다.

2개, 4개, 8개... 천화가 개화 될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그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아...”

“헉...”

최종적으로 1024개의 천화가 피어났을 때 내 앞에 있는 모두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자신들의 죽음을 코앞에서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격렬한 전투에서 자신들을 지켜준 천화가 이번엔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치명적인 살기를 띄우고 있었으니까.

“그럼 시작합니다.”

하늘을 덮을 것처럼 떠 있는 천화가 사람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천개의 꽃잎 하나하나에 천고의 무리들이 녹아있었다.

화아아악!

암기술만이 아니라, 내가 익힌 카볼의 검술서의 검술들도 천화에 담겨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위력과 다양한 무위가 퍼지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천화는 사람들 바로 앞에 있는 강철 인형 위로 떨어져 인형을 수천조각으로 찢어놓고 연무장 바닥을 초토화시켜버렸다.

쿠구구구구.

바닥의 모래들이 튀어 올라와 폭풍을 만들어버렸다.

고오오오.

천개의 암기 하나하나에 강기와 어검의 묘리가 녹아 있었으니, 내가 힘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연무장 자체가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

캬갸갸걍!

떨어져 내린 천화들을 천판으로 복구시킨 뒤 사람들을 보았다.

“음...”

할아버지와 후라켄은 동공이 정지된 채로 허공을 올려보고 있었다.

두 분 다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다.

“유...”

“쉿.”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 뒤 남은 사람들을 데려오려고 할 때 일리아와 아린도 허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곳에 있는 모두가 무인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옆으로 빠졌다.

“네 명이 동시에 무아지경에 빠지는 일이 있다니, 신기한 걸 넘어섰구나. 부러워 죽겠군.”

아버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모두에게 공부가 되도록 연위결을 최대로 운용해서 각각의 암기에 다양한 무리를 섞었는데 그게 도움이 된 건지 네 명이 동시에 다음 경지의 계단을 만들어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말이 안 되는 기술이구나. 그 암기들이 나를 향할 때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저, 저도요. 그 기술이 메테오를 향할 때는 안심됐지만, 제게 다가올 때 그 어떤 능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아...”

이레아가 한 숨을 내쉬고 주저앉았다.

그녀의 다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 암기들의 움직임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어요. 이게 도움이 되겠죠.”

“네. 그 움직임을 생각하시면서 수련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저기 있는 네 명만큼은 아니어도, 이들 역시 앞으로 수련을 할 때 만천화우를 직접 겪은 것이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러기 위해서 이런 일을 준비한 거였으니까.

“그럼 모두 다른 연무장에 가서 수련을 하세요.”

“유렌님은요?”

“저 네 명을 지켜봐야죠.”

**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들은 한 명씩 순차적으로 깨어났다.

후라켄과 할아버지는 내게 절을 하다시피 고맙다고 하시고서 바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셨고,

일리아와 아린은 연무장을 하나씩 차지한 채로 나오지 않았다.

“이제 찾아가 볼까.”

축제도 끝났고 밀린 업무도 처리했으니, 러스트가 말했던 필로세 숲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갈 생각이다.

내 생각대로라면 그곳에서 분명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거다.

“빽.”

“그래. 이번엔 데려갈게. 같이 가자.”

창틀에서 누워있던 빽빽이가 또 자신을 놓고 갈거라 생각했는지, 급하게 날아와서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럼 준비를...”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데 노크가 아니라, 주먹으로 치는 것 같았다.

“드, 들어와.”

문이 시원하게 열리고, 평소와 달리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일리아가 들어왔다.

“유렌 후작님.”

“어?”

일리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너 뭐하는...”

“후작님. 덕분에 한참동안 제 앞을 막고 있던 벽을 뚫어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리아는 고개까지 숙여서 자신이 진심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만천화우를 보기 전에 비해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일어나. 갑자기 뭔 짓하나 긴장했네. 후...”

“약혼자든 뭐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일리아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하며 일어났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만 하러 온 건 아니지?”

“그래. 한 판 뜨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