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러스트 (198/241)

198화 러스트

저 여자가 왜 이곳에 왔단 말인가.

“큭...”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수려한 외모에 주변의 모든 것이 빛을 잃고 있었다.

이 세계에 저런 여자는 아니, 저런 존재는 한 명뿐이다.

[이름: 러스트(Lust)]

[특성: 칠죄종-색욕(Luxuria)]

[호감도: 0 (중립)]

[현재 기분 : 대화를 하고 싶음.]

러스트는 나를 올려보며 혈액처럼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새하얀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입술에 대고서는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라져? 여기까지 와서?”

전력으로 기감을 풀어냈지만, 그녀의 기가 잡히지 않았다.

이동을 한 게 아니라, 능력을 사용해서 사라진 거다.

“이유를 모르겠군.”

러스트가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면 내게 들키지 않고 이 파티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 거다.

그녀는 일부러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서 내 시선을 끌었다.

강자와 내 지인들로 꽉꽉 차있는 파티장은 러스트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엔 최고의 장소인데 내게 모습을 보여주고 사라지다니,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정말 대화를 원한다고?”

러스트의 정보창을 봤을 때 믿을 수가 없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지금까지의 적들과 달리 나에 대한 호감도가 중립이었고, 현재 기분은 나와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정보창만 본다면 축제를 망치거나, 나를 공격하러 온 게 아니라, 정말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내게 얼굴을 보여줄 리가 없을 테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축제를 멈추고 헤집어서 러스트를 찾아야 할지, 아니면 창조주의 눈을 믿고 기다려야 할지.

“유렌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문을 열고 페루가 들어왔다.

“손님들이 거의 다 오셨어요. 이제 내려갈 준비하셔야죠.”

“아, 그래.”

창문을 닫고, 의자에 놓인 예복을 입었다.

“후...”

마음을 정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는 창조주의 눈을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좋아. 기다리지.”

**

“자네가 비밀에 쌓여있는 랙커드의 총수 아닌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후라켄이 들고 있는 와인으로 입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최고 정보 집단의 총수라니, 정말이라면 참 좋겠지만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정말 친구 덕분에 운 좋게 알게 된 겁니다.”

엘프들을 구출할 당시에는 그 누구도 그녀들의 위치를 알지 못했을 거다.

한참 뒤인 엘프들이 팔린 이후에나 소문이 돌았을 테니,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당연히 농담이지. 하하!”

후라켄이 농담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평소와 달리 그의 표정은 굉장히 어색했다.

그는 한 발 앞으로 걸어서 내 옆으로 붙었다.

“저기 자네가 지난번에 보여줬던 기술 말일세. 메테오를 부숴버렸던.”

후라켄이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원래 음성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였다.

“만천화우 말씀이십니까?”

“그래. 만천화우!”

후라켄이 살짝 손뼉을 쳤다.

당시에 후라켄은 만천화우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직도 잊지 못한 것 같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저, 정말 미안하지만, 만천화우를 다시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나?”

“네?”

“나에게 써도 상관없네. 아니, 직접 겪어보고 싶네.”

후라켄의 말을 듣고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쳐다보았다.

눈 밑은 검었고, 볼은 굉장히 핼쑥해졌다.

며칠 잠을 자지 않고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얼굴이다.

“이, 이런 말이 큰 실례가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네. 다 늙어서 나잇값 못한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

“아뇨. 전혀 아닙니다.”

“자네의 만천화우를 본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네. 매일 그 장면이 시작 될 때 꿈에서 깨어나.”

“그건...”

“밥을 먹어도, 씻어도, 검을 휘둘러도 자네의 만천화우만 생각이 난다네. 다시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하!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아니야. 잊어주게나. 정말 미안하네!”

후라켄은 내게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푹 떨궜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비기을 보여 달라는 말을 했으니, 부끄러워하는 건 당연한 태도였다.

좋지 않은데...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후라켄의 속은 썩고 있는 중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될 거다.

“뭘, 그런 거가지고 고민하십니까. 공작님이 원하시는데 당연히 보여드려야죠.”

그가 부담이 없도록 일부러 목소리를 한 톤 높여서 밝게 말했다.

“저, 정말인가?”

“후라켄님이 저와 적이 되실 일도 없고, 제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시지 않았습니까.”

“허, 유렌. 자네...”

후라켄은 감동이 극에 달한 표정이 되어 내 손을 꼭 잡았다.

죽을 것 같아서 뱉은 말이지만, 내가 응답해 줄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후라켄이 나를 돕기 위해 록스에 왔다가 저렇게 된 거니, 만천화우를 보여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만 만천화우를 본 이후 후라켄이 무언가를 얻게 된다면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얻지 못한다면 점점 약해질 거다.

거기까지는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다. 얻어내기를 바랄 수 밖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할아버지도 불러서 두 사람 모두에게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

“파티가 끝난 뒤 제 개인 연무장으로 오시면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 정말 고맙네. 고마워!”

“할아버지!”

나와 후라켄을 슬쩍슬쩍 쳐다보고 있던 이레아가 다가왔다.

“또 유렌님께 실례하고 계셨죠!”

“그래. 내가 이 친구에게 정말 미안한 부탁을 했다. 당장 무릎을 꿇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네?”

평소와 다른 후라켄의 진지한 대답에 이레아가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요? 할아버지! 유렌님 좀 놀리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별 일 아니에요. 농담하신 거예요.”

“그, 그런가요?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오늘 유렌님 바쁘다고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내 말을 들은 이레아는 후라켄의 등을 살짝 친 뒤에 자신의 테이블로 끌고 갔다.

“아주 재밌나봐?”

후라켄이 끌려가는 것을 보며 웃고 있을 때 뒤에서 일리아가 다가왔다.

진한 푸른색 드레스가 그녀가 그녀의 미모를 더욱 화사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건 아니고.”

“나랑 한 약속은 언제 지킬 건데?”

“약속?”

“그래. 나랑 제대로 대련해주겠다고 했잖아.”

“아...”

그러고 보니 일리아와 대련 약속한지 한참 지났는데 여러 가지 일이 있다 보니, 아직도 지키지 못했다.

“미안해. 네가 원할 때 언제라도 대련해줄게. 파티가 끝난 후도 좋고.”

“안 봐줄 거지?”

“그건 좀 힘들지.”

“흥.”

일리아도 마스터 바로 아랫단계지만 나와는 한참 차이가 난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리면 배울 게 없다.

천천히 실력을 올려서 그녀가 더 나은 경지에 오르도록 도와주는 게 최선이다.

“알겠어. 그럼 갈게.”

“엉? 벌써 돌아간다고?”

일리아는 간다는 말이 정말인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네가 제대로 대련을 해줄 수 있게, 미리 준비해야지. 수련장에 갈 거야.”

“하?”

일리아는 정말 그 말을 하고선 파티장을 나가버렸다.

그녀를 따라온 하인들이 당황한 얼굴로 부리나케 따라 나갔다.

파티장에 와서 수련을 하겠다고 나가버리다니, 일리아는 예전 그대로다.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하, 정말...”

“유렌님.”

로디엔이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자연의 색을 그대로 담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오늘 바쁘시네요.”

“힘들지만, 제가 연 파티다보니 어쩔 수가 없네요.”

“잘 하시던 걸요?”

로디엔이 입을 살짝 가리고 웃었다.

예전 용병으로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루나는 잘 지내고 있나요?”

“네. 처음에는 악몽을 꿨는데, 지금은 괜찮아진 모양이에요. 잘 웃고 다녀요. 후후.”

“다행이네요.”

“유렌님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데려 올 걸 그랬나요?”

“네. 얼마든지 데려오세요.”

“네. 다음엔 꼭 데려올게요.”

로디엔은 상큼한 미소를 짓은 뒤 작은 상자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저희 엄마 아니, 족장님께서 유렌님께 정말 고맙다고 이것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족장껜 이미 감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엘프들을 구출한 바로 다음날 아르시아에게 통신으로 고맙다는 말만 서른 번은 넘게 들었다.

“전 모르겠네요. 주라고 하니까. 줄 뿐이에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유렌님께 감사한 건 저희 엘루나에요. 정말 고마워요.”

로디엔은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려서 귀족식 인사를 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많아서 일단 상자는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솔로는 부러워서 살 수가 있겠어?”

“왕자님.”

“아름다운 여성분들이 끊이지도 않고 찾아오다니, 부러움이 화산처럼 타오르는데 이거 어쩌지?”

일왕자 그웬이 여유가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자네가 준비한 것들인데, 감사하긴. 잘 마시겠네.”

컁.

우리는 작게 잔을 부딪친 뒤 가볍게 와인을 마셨다.

“흠! 괜찮은데?”

“다행이네요.”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싸구려를 좋아하잖아? 근데 이 와인은 비싸 보이는데도 나쁘지 않아. 하하! 옆에 자네가 있어서 그런가?”

일왕자는 와인의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쏙 드는 표정이다.

“나중에 가실 때 가져가시죠. 많이 준비해서 남을 겁니다.”

“그래? 그러면 고맙게 받겠네.”

일왕자는 잔의 술을 원 샷을 때리고 옆의 다과를 집어먹었다.

“록스 습격 격퇴에 엘프 구출까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둘 다 큰 피해가 벌어졌을 거야. 폐하께서도 자네를 아주 크게 칭찬하셨네. 정말 수고 많았어.”

“그렇죠. 다 제가 잘난 덕이죠.”

“뭐? 크하하하! 그래. 그런 당당한 모습 정말 잘 어울려!”

일왕자는 내 농담이 마음에 든다는 듯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왕궁은 별일 없습니까?”

“별일이라, 없지는 않아. 후...”

방금까지 즐겁게 웃고 있던 일왕자의 표정이 굳었다.

바로 기막을 펼쳐서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았다.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었죠?”

“당연히 그 녀석에 관한 일이네.”

“이왕자군요.”

“그래.”

원작에서 이왕자는 모든 상황을 조종해서 일왕자를 죽이고 왕위마저 집어 삼키는 자다.

자신의 모든 계획이 깨지고 내 위치가 커지면서, 멘탈이 무너진 모습을 보여줬지만, 무시 할 수 없는 자다.

“자네에겐 전에도 말했지만, 이왕자 궁에 어디서 온지 알 수가 없는 사람들과 자금이 계속 흘러들어가고 있네.”

“지금도 말입니까?”

“그래. 명목적으로는 자신의 세력을 늘린다는데 전부 어디서도 본적이 없는 놈들과 돈이야.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일왕자가 목소리를 한층 더 내렸다.

“아서에게 반말을 하는 여자가 있었다고 하네.”

“이왕자에게 반말을 했다고요?”

“그래. 누군지는 몰라. 분명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아서의 방에서 녀석에게 반말을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네. 그 목소리가 너무 소름끼쳐서 바로 귀를 막고 도망쳤다고 했지.”

“그거 언제죠?”

“바로 며칠 전이야.”

지금 이왕자는 위치가 약간 애매해졌다고 해도 언제든지 왕위를 계승할 힘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여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나는 건 러스트, 에블린, 아카샤 상태인 글러트니 정도지만, 이들도 이왕자에겐 절대로 반말을 사용하지는 않을 거다.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척하는 게 저들의 특징이니까.

“그가 뭘 준비하고 있군요.”

“그래. 확실해. 조만간 내게 무슨 일을 벌일 것 같네.”

이왕자는 일왕자를 노리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게 뻔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마법 주머니를 꺼내서 사각형 보석 박힌 팔찌를 꺼냈다.

“이 팔찌를 가져가십시오.”

“이게 뭔가?”

“정말 위급한 상황이나 위험한 상황일 때 그 팔찌에 있는 보석을 떼어버리세요. 어렵지 않게 뗄 수 있을 겁니다.”

“전에 준 목걸이 같은 건가? 신호를 주는?”

“아뇨.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물건입니다.”

이 팔찌는 내가 카이젤의 레어에서 가져와서 등록시킨 귀중한 아티펙트다.

일왕자의 말을 들어보니, 이왕자가 분명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아서 넘겨 준거다.

“정말 고맙네. 항상 도움만 받는군.”

“아닙니다.”

일왕자는 정말 마음에 드는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조금 불안했지만 저 팔찌가 있으니 괜찮을 거다.

**

일왕자 이후에도 나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과 가벼운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후...”

무도회가 열렸을 때 잠시 숨을 돌리려고 빈 테라스로 향했다.

탁.

시원한 저녁바람을 즐기고 있을 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렌 록스 후작님.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까요?”

가슴에 파문을 만드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 파티장에 있던 누구보다 화려한 외모를 가졌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여자.

러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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