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축제
페루는 내가 엘프들을 구출해왔다는 소식을 바로 왕궁으로 전했다.
수색을 위해 대륙 여기저기에 퍼져있던 수호자 엘프들은 구출 소식을 듣고 모두 가이린으로 모였다.
엘프들 중에는 수색대의 대장을 맞고 있던 로디엔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유렌님.”
로디엔이 함께 온 엘프들과 손을 모아서 엘프의 예법으로 인사를 해왔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최고의 예의를 담은 인사다.
“납치 된 티아리와 루나를 위해서 한참 떨어진 시와라 사막까지 가시다니,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네?”
“페루에게 들었어요. 엘프들이 납치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보 단체와 친구 분들을 움직여서 정보를 모으셨다고요.”
“어어...”
로디엔은 내가 했던 일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알고 있었다.
“시와라 사막의 지하 경매장에 납치 된 엘프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서 친구 분과 찾아가서 경매장을 때려 부수고, 티아리와 루나, 납치된 사람들까지 구출해서 데려오셨잖아요!”
“페루가 그렇게 말했나요?”
“네! 정말 대단하세요!”
“아...”
페루에게 경매장에 원하는 물건이 있어서 사기를 치다가 우연히 얻어걸렸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녀석은 자신의 주인이 도둑질을 하려 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완전히 미화 시켜서 소식을 전한 모양이다.
이거 참...
덕분에 내 생각과는 다르게 따뜻한 영웅이 되어버렸다.
“유렌님. 저희를 불러서 같이 가셨으면 더 편하셨을 텐데요.”
“데이라! 유렌님은 우리를 걱정해서 그러신 거지. 그 지하 경매장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고 했잖아!”
“아...”
차분히 말하는 데이라에게 로디엔이 흥분된 목소리로 응답했다.
“너도 티아리랑 루나에게 들었을 거 아니야. 거긴 강력한 라이칸들을 소굴이었다고! 유렌님은 납치 된 사람들을 부상 없이 구출하기 위해, 완벽한 전략을 짜서 소수 정예로 가신 거라고. 유렌님의 따뜻하고 배려 가득 한 생각을 모르겠어?”
“맞아요! 유렌님은 당황하지 않고 라이칸에게 맞서셨고, 저희와 납치된 사람들을 순식간에 밖으로 이동시켜 주셨어요.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하셨던 게 분명해요.”
뒤에서 서있던 티아리가 로디엔의 말에 동의하며 소리쳤다.
미안하지만, 당연히 미리 준비된 게 아니다.
카이젤의 마법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준비 된 것처럼 보인 것뿐이다.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데이라는 평소엔 로디엔의 머리 꼭대기에 있을 정도로 영리하면서 지금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저 말도 안 되는 로디엔의 해석에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유렌님의 그 빠른 행동력과 따뜻한 배려심, 뛰어난 전략과 과감함을 이뤄내는 무력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다시 한 번 티아리와 루나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렌님!”
“존경합니다. 유렌님!”
데이라가 다시 손을 모아서 인사를 해왔고 뒤에 있는 엘프들도 크게 감동받은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엘프들 모두가 로디엔의 말을 진실로 여기고 있었다.
“하...”
도둑질하다가 얻어걸렸다고 하기 에는 너무 멀리와 버렸다.
로디엔과 데이라를 포함한 엘프들과 당사자인 티아리, 루나는 나를 거의 세계수처럼 신성시해서 보고 있었다.
“하하...”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주었다.
식은땀이 난다.
**
“아우, 겨우 벗어났네.”
엘프들을 엘루나로 돌려보내고 집무실로 올라왔다.
그들은 내 찬송가를 만들 기세였지만, 데이라와 루나를 집에 데려다 줘야하지 않겠냐고 설득시켜서 일단 돌려보냈다.
얼마 남지 않은 파티에서도 볼 수 있으니, 그 때 보자고 한 것도 효과가 컸다.
“어때요? 저 잘했죠?”
집무실 안에서 대기하던 페루가 방긋 웃었다.
“거짓말이 너무 과했어. 인마.”
“그렇지만 가이린의 영주이자, 크라시스의 영웅이 사기치러 경매장에 갔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무슨 영웅을 만들어놨냐. 네가 엘프들의 얼굴을 봤어야 해.”
“봤어요. 감동받은 표정이시던데요. 헤헤.”
“됐다. 말을 말지.”
페루가 미소를 머금으며 책상 위에 몇 장의 서류를 내려놓았다.
“말씀하신 축제 계획서에요. 지금도 준비하고 있지만,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래?”
페루에게 서류를 받아서 쭉 잃어보았다.
성 내부에서 록스 습격에 참여한 귀족들과 기사들을 위한 파티가 열리고, 마을에서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열린다.
내부 파티는 귀족과 엘프들이 오다보니, 전부 최고급이었다.
외부 축제에선 마법 폭죽도 터트리고 대륙의 여러 음식도 준비되었지만, 즐길 거리가 조금 부족해보였다.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몇 년에 한 번 할까 말까인데, 좀 크게 하자. 오락거리를 늘려. 올 사람이 꽤 많으니까.”
“지금 가성비를 딱 맞춰놓은 상태에요. 여기서 다른 걸 추가하면 돈이 꽤 많이 들어가는데요.”
페루가 말을 할 때 책상 위에 카이젤의 창고에서 가져온 금괴 중 가장 작은 것을 올려놓았다.
“어어억!”
“그 비명 오늘만 두 번 듣네.”
“아, 아니. 무슨 이런 무식한 금괴가 있어요? 이 정도면 경매장에 가셔서 사기 칠만 하네요.”
페루는 금괴의 크기에 놀라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녀석의 눈이 금괴에서 나오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아냐. 이건 친구가 줬어.”
“뭔 친구 길래. 이걸 주죠? 무슨 생명이라도 구해줬나요?”
“비슷하지. 아까 내 옆에 있던 애 있잖아.”
“아, 그 엄청난 미남이요?”
“그래. 걔 지금 어디 있지?”
카이젤이 쉴 수 있게 방을 주라고 했는데 잘 쉬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번 찾아가봐야겠다.
“아, 그분은 제니스라는 사람에게 술 얻어먹으러 간다고 하시고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미리 전해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말도 안하고, 아주 지 맘대로 군.”
“그분이 가시기 전에 그게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전하라 하셨는데 그게 뭔가요?”
페루의 말을 듣고 목에 걸린 아이스 사파이어 목걸이를 내려 보았다.
이 목걸이는 카이젤이 준 아티펙트로 내 비밀 병기가 되어 줄 물건이다.
“좋은 거 있어. 납치 된 사람들은 어떻게 했어?”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조치를 해놨습니다.”
“인간사냥꾼 놈들에게 납치되어서 고생 많이 한 사람들이니, 일단은 편히 쉬게 해줘. 안정을 찾으면 일자리도 구할 수 있게 도와주고.”
“알겠습니다.”
페루가 당연하다는 듯 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 지었다.
납치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몰려 있을 테니, 한동안 쉬게 해준 뒤 이곳에 적응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럼 파티와 축제 준비는 자금을 써서 좀 더 여러가지를 준비하기로 하고 이만 가봐. 오늘 수고했어.”
“넵!”
페루를 보내자마자 내 어깨에서 희미한 연기가 올라와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연기는 작은 포메라로 변해서 나를 올려보았다.
“주인.”
“언데드들은 복구했어?”
포메라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니, 일이 잘 풀린 모양이다.
“카이젤님이 가장 추운 북해의 끝자리를 내어줘서 빠르게 복구할 수 있었소. 본드래곤 머리 복구도 도와줬고.”
“다행이네. 골렘은 어때?”
“아주 좋소! 정말 좋소! 아이스 골렘 자체도 강한데, 여러 가지 마법들을 걸어놔서 미쳐 날뛰는 위력을 가지고 있소.”
포메라는 자신의 골렘이라도 된 것처럼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기대되네.”
“나중에 보여주겠소. 언데드들의 복구가 끝났으니, 난 록스의 해저동굴로 돌아가겠소.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시오. 내가 전부 막아내겠소.”
포메라는 자신의 손을 천장으로 뻗으며 자신감 그 자체의 자세를 보여줬지만 아기 해골의 모습이라 내가 보기엔 우습기만 했다.
“큭큭. 그래. 믿음직하네.”
“역시 주인이 뭘 좀 아는 군. 그럼 가보겠소.”
포메라는 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듣고선 기분 좋게 돌아갔다.
딱딱.
뒤에 있는 창문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보자, 인상을 쓰고 있는 빽빽이가 버둥거리며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빽!”
창문을 열어주자, 녀석은 부리를 회전하면 날아들었다.
“미안.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
빽빽이는 또 자신을 놓고 갔다고 성질을 내고 있는 것이다.
녀석이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할 때 마법 주머니에서 동그란 과일을 꺼냈다.
“자, 네가 좋아하는 두락이다.”
예전 사막에서 모카건이 빽빽이에게 줬던 두락을 꺼냈다. 녀석이 이렇게 화낼 것 같아서 사막에 간 김에 미리 준비해 뒀다.
“빽.”
“하하!”
두락을 본 빽빽이는 누그러진 목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한 번 크게 웃은 뒤 가져온 두락들을 빽빽이 전용 그릇에 담아 주었다.
“미안해. 그걸로 화 풀어.”
“빽!”
빽빽이의 고민은 짧았다.
오른쪽 날개를 들어 사과를 받아준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곧바로 접시에 다이빙을 했다.
녀석의 두락 먹방을 잠시 지켜보다가 주머니에서 카볼의 책 두 권을 꺼냈다.
[로돈 왕국.기본 검술]
[가온 왕국 기본 검술]
“드디어 읽는구나.”
빽빽이가 과일 먹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서 두 책을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었다.
[가온 왕국 기본 검술을 모두 체득하셨습니다.]
[가온 왕국 기본 검술이 특성 검인에 예속 됩니다.]
[가온 제왕의 검 11/18]
[특성 검인의 경험치가 15% 상승합니다.]
[검인에 기본 검술 11개가 모인 효과로 모든 신체능력이 5% 상승합니다.]
“정말 미쳤어.”
방금 전 두 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신체능력이 9% 올라가버렸다. 단순히 신체의 능력만 오른다 해도 9%는 심각할 정도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느낌이 달라...”
앉아 있는 상태에서도 스스로의 육체가 강해진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만일 이 상태로 렉쿤과 싸웠다면 처음 날렸던 주먹에 렉쿤의 갈비뼈가 수수깡처럼 모조리 부러졌을 거다.
“이제 11개.”
이번에 책을 두 권 얻어서 11개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새로운 초식을 배우는 12개까지 딱 하나만 남았다.
솔직히 18개를 모아서 모든 검을 완성하는 건 꿈도 안 꾼다.
첫 번째 초식인 마왕이 말 같지도 않은 위력을 내는데 두 번째 초식은 그보다 강할게 뻔하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게 느껴진다.
“한 개만 더 모으면...”
**
기다리던 가이린 축제가 열렸다.
처음으로 열리는 축제와 파티임에도 불구하고 크라시스 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주었다.
페루의 말을 빌리자면 가이린이 아니라, 내 이름값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고 하는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퍼퍼퍼펑!
하늘 위로 오색 마법들이 터지며 가이린이라는 글자와 유렌 록스라는 글자를 만들고 사라진다.
“멋지구만.”
금탑에서 축제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준비한 마법인데, 현대의 폭죽과 다르게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정확한 불꽃들을 볼 수 있었다.
“빽!”
창틀에 앉아 있던 빽빽이가 내 말에 동의하며 날개를 흔들었다.
“이제 시작이군.”
고개를 내려서 성 앞을 보았다. 보기만 해도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귀족들이 줄지어서 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많이도 오셨네.”
록스를 도와준 사람들이 워낙에 많아서 내가 잘 모르는 귀족들도 끼어 있었는데, 모두에게 인사를 할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유렌.”
뒤에서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터진 마법을 보고서 일어나셨다.
아버지는 축제 준비를 확인하고 싶다고 하시며 미리 3일 전부터 와계셨다.
축제 준비가 미숙하면 내가 욕먹을까봐 미리 와주신 건데 준비 잘했다고 하시면서 수정은커녕 오히려 칭찬을 해주셨다.
“오늘 오셨어도 됐는데요.”
“저 분들에게 너만 도움 받았냐. 나도 조금은 도와야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 축제는 록스에서 열렸어야해! 내가 늙어서 여기까지 와야겠냐?”
“본인 돈 안 써서 좋으시잖아요.”
“커흠...”
정곡을 찔린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돌아서셨다.
습격을 당했을 때 록스의 피해는 엄청났다.
아버지는 영지 관리비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개인 재산까지 풀어서 복구에 사용하셨다.
역시 아버지는 영지민들이 따르는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너무 사실을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이 녀석아.”
“미안해요. 대신에 돌아가실 때 선물을 드릴게요.”
“선물? 네가 나에게?”
“네.”
복구는 끝났지만 영지의 세금까지 낮춰서 록스는 현재 재정적으로 조금 힘든 상태라, 아버지가 록스로 돌아가실 때 금괴를 좀 드릴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카이젤의 보물을 많이 챙겨왔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크하하하! 그래. 기대하면서 먼저 내려가 있으마.”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방밖으로 나가셨다.
그가 웃는 것만 봐도 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보니, 정말 가족이 된 것 같다.
“우리도 가자.”
“빽!”
창문을 닫고 나가려 할 때였다.
“어?”
이곳에 와서는 안 되는 여자가 아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여자가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