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카볼 (191/241)

카볼

“이 해저동굴이 네 레어인가?”

“맞다. 너희가 있던 장소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다.”

나와 포메라는 카이젤의 텔레포트를 받아서 그의 레어로 이동했다. 우리가 들어온 공간은 카이젤의 본체가 누워도 될 정도로 높고 넓었다.

바닥은 얼음으로 만들었는지 냉기가 그대로 올라오고 있었고, 한쪽 벽면이 수족관처럼 뚫려있어서 바다 속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투명한 벽을 통해서 바다 속 물고기와 몬스터를 보고 있으니, 대형 수족관에 온 기분이 들었다.

“멋지게 꾸며놨네.”

“역시 뭘 좀 볼 줄 아는군.”

카이젤의 대답에 피식 웃고서 그의 레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천장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런저런 마법들을 설치해 놓은 모양이다.

“내, 내가 드래곤 레어에 오게 되다니. 이게 꿈인지 모르겠소.”

포메라는 자신이 드래곤 레어에 온 걸 믿을 수 없는지, 관절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턱을 쩍 벌리고 있었다.

“구경 다했으면 이쪽으로 와라. 인간의 집으로 치면 여기는 현관일 뿐이다. 너희들이 관심 있을만한 건 이쪽에 있다.”

“현관치고는 별게 없네. 드래곤 레어의 입구엔 가디언 이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네가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가디언은 있다.”

“흐음?”

카이젤의 말을 듣고, 기감을 조금 더 세밀하게 펼치자, 바닥에서 아주 작은 마나가 느껴졌다. 마법과는 달리 정지해 있는 마나였다.

“이 얼음 바닥 아래에 묻혀있군.”

“허, 숨기는 건 자신 있었는데 그걸 알아보다니, 너는 역시...”

쿠구구구.

카이젤이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에서 거대한 사각형 얼음이 올라왔다. 냉장고에 있는 사각얼음을 집채 만 한 크기로 키워놓은 모양이다.

콰드드드.

얼음에 금이 생기고 갈라지더니, 영화에 나오는 로봇처럼 팔과 다리가 튀어나왔다.

“아이스 골렘이군.”

“그래. 맞다.”

네모난 얼음은 순식간에 6m가 넘는 아이스 골렘으로 변해버렸다.

“이 바닥 전체가 이 녀석과 같은 아이스 골렘으로 이루어져있다. 내 기본 가디언이지.”

카이젤의 레어에선 가디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부 바닥에 숨어있는 거였다.

“그랬군.”

고개를 끄덕이며, 나중에 나갈 때 몇 마리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계획대로만 되면 전부 가져 갈 수도 있을 거다.

“다시 들어가라.”

카이젤의 말에 아이스 골렘은 처음에 봤던 사각얼음이 되어 구멍에 들어갔고,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가 그 틈을 매웠다.

“다 봤으면 이쪽으로 와라.”

카이젤은 우리를 데리고 동굴의 안쪽으로 데려갔다. 본체로 생활을 하는 건지, 중간에 있는 통로마저도 굉장히 넓었다.

“저 방이 내 보물들을 모아놓은 창고다.”

“주인. 드래곤은 빛나는 것을 광적으로 수집하는 버릇이 있소. 정말 엄청날 거요.”

“나도 알아.”

“드래곤의 보고를 보게 되다니, 살이 다 떨리는 것 같소.”

“피부도 없는 놈이 무슨...”

포메라는 굉장히 기대하는지, 있지도 않은 피부를 들먹이고 있었다.

“들어와라.”

카이젤은 중앙 통로에 있는 방중에 두 번째로 큰방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진한 황금빛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

“세상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성인 남성만한 금괴가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고, 그 아래를 찬란한 보석의 모래가 뒤덮고 있었다.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힘든 광경이었다.

“이, 이 양이면 나라를 사도 될 거 같소.”

“...동의한다.”

평소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보물의 양을 보니 충분히 가능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드래곤다운 양이었다.

“오른쪽은 아티펙트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심심풀이로 만든 것도 있고, 꽤나 공을 들인 것도 있고. 얻은 것도 있지.”

카이젤의 손가락을 따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탄성이 나왔다.

“이게 다 아티펙트라고?”

“그래.”

하늘까지 솟아오른 수납장이 있었고 그 안은 여러 아이템들로 꽉꽉 차있었다. 저 모든 것이 아티펙트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주, 주인. 정신이 나갈 것 같소. 허...”

포메라는 적응을 할 수 없는 지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녀석의 등을 한 대 치고서 아티펙트가 있는 수납장으로 다가갔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초록색 목걸이를 보고 있을 때 카이젤이 이마를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뭐지?”

“너 정말 인간인가?”

“뭐?”

“처음 너희를 봤을 때 난 너의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가 저 해골의 앞에 나오고 나서야 네가 있다는 걸 알았지.”

카이젤은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 될 정도의 강함, 나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는 부동심, 재빠른 상황파악에 특별한 아이템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넌 인간 같지가 않아. 그렇다고 마기도 느껴지지 않아, 정말 모를 일이군.”

“악마라고 생각했나본데, 난 평범한 인간이다. 별거 없어.”

“평범한 인간이 다 죽었나보군.”

“맞소. 주인이 평범하면 이 세상에 특별한 건 아무 것도 없을 거요.”

카이젤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포메라도 내 옆에 와서 그의 말에 동의를 했다.

“왼쪽은 무기와 책들이 있다. 마법이 걸린 장비나 마법서, 마도서도 있으니 유용할 거다.”

뒤를 돌아보니, 벽에 번쩍이는 무기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에 있는 10개의 책장에는 책들이 빈틈없이 들어 차 있었다.

“무기라...”

대충 살펴봐도 하나하나가 극히 귀한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다.

“유렌 록스.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고 맹세를 했지? 이곳에서 원하는 물건들을 마음껏 가져가라. 얼마든지 허락하마.”

보석과 금, 아티펙트, 무기와 책으로 이루어진 세 공간의 중앙에 선 카이젤이 양팔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원래라면 하나씩만 가져가게 했겠지만,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다시 한 번 사과를 하마. 이곳에서 너희가 원하는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라.”

“음...”

카이젤의 말이 끝나자마자, 포메라는 눈에 불을 태우며 책장으로 달려갔지만, 난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카이젤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뭐? 내가 뭘 착각했다는 거지?”

“아까 네가 맹세를 할 때 했던 말 기억하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나 카이젤 엘라트는 유렌 록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기로 맹세하겠다.’라고 말했지. 인간인 너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에게 망각이란 없다.”

“맞아. 정확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답게 아주 정확한 기억력이다. 딱 마음에 든다.

“그럼 내가 원하는 걸 말해도 되겠지?”

“물론이다. 뭐든지 말해... 그, 그 손가락은 뭐냐.”

카이젤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들어 올려 그를 가리켰다. 녀석은 이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것 같다.

“너.”

“무, 무슨!”

“네 맹세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었지. 난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길 원한다. 내 부하가 되라는 거지.”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안 될 건 또 뭐지? ‘모든’을 붙인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크으윽!”

카이젤의 얼굴이 바닥의 얼음처럼 하얗게 질렸다. 주먹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 같다.

“히익! 지, 진짜 미친 주인이야. 진짜 미쳤어!”

포메라는 잡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드래곤을 부하로 받아들이려는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봐. 난 이 북해에 와서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았어. 그저 이곳의 냉기를 조금 가져다 썼을 뿐이지. 근데 넌 상황을 듣지도 않고 공격부터 했다.”

“끄응...”

카이젤은 선공 이야기에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앓는 소리만 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네가 처음에 날린 두 번의 공격을 반격 한 번 하지 않고 수비만 했다. 그런데도 넌 대화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본체로 변해서 브레스까지 퍼부었지. 내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라도 죽었을 거다. 아닌가?”

“...맞다.”

카이젤은 창피한지 복잡한 심경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난 널 죽이지 않고 살려줬다.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기회였는데도 말이지. 이게 불합리한 처사인가? 네 생각은 어때?”

“끄윽...”

카이젤이 배가 아픈 신음소리만 내며 내 시선을 피했다. 자신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으윽...”

카이젤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카이젤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지만, 내 밑에 들어오라는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거다. 드래곤들은 로드의 명령도 듣지 않는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종족이니까. 인간 밑에 들어간다는 게 자존심도 상할 테고.

지금까지 압박을 했으니, 여기선 풀어줘야 할 때다.

“다만 네가 내 밑에 들어온다면 너도 여러 가지로 힘들겠지. 다른 드래곤들에게 무시도 당할 테고. 맞지?”

“그, 그렇다. 드래곤 역사상 인간의 밑에 들어간 적이 없으니...”

“그럼 이건 어때? 부하가 아니라, 동료, 친구가 되는 거다.”

“동료?”

오랜만에 카이젤의 음성에서 긍정적인 감정이 드러났다. 부하에서 동료가 됐으니, 괜찮다고 느꼈을 거다.

“드래곤이 인간을 인정해서 친구나 동료가 되는 경우는 가끔 있지 않아?”

“마, 맞다. 그 경우는 몇 번 있었지.”

“그래. 그러니 내 동료가 돼서 내가 필요할 때 도와달라는 거야. 인간 학살, 국가 정복 같은 일은 하지 않아. 이래보여도 이 세계를 위해서 힘들게 싸우고 있거든.”

“음...”

카이젤이 생각을 하려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녀석의 답은 정해져있다. 맹세가 걸린 이상 내 제안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하아, 알겠다. 너와 동료가 되기로 하지. 네가 필요할 때 힘을 빌려주겠다.”

“탁월한 선택이야.”

박장대소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살짝 입꼬리만 올렸다. 예상대로의 결과다.

이건 상대의 심리를 이용한 사기 같은 거다.

처음에 부하가 되라는 어렵고 힘든 부탁을 한 뒤, 동료가 되라는 쉬운 부탁을 해서 녀석의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린 거다.

난 처음부터 카이젤을 부하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억지로 부하로 삼았다면 드래곤의 성격상 오래 가지 못하고 폭주했을 거다.

“주, 주인. 무슨 꿈이라도 꾸는 것 같소. 정말 주인은 간이 크다 못해 튀어나온 놈이오.”

“그러냐?”

포메라는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렌. 너 크라시스 출신인가?”

포메라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카이젤이 조금은 편해진 음성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알았지?”

“내 브레스를 막았던 그 팔찌. 그거 볼카누이스 영감의 물건이잖나.”

“알고 있었어?”

“알 수밖에 없다. 그 팔찌를 만든 재료가 원래 내 물건이었으니까.”

여기서 볼카누이스의 이름을 듣게 되다니, 신기했다. 볼카누이스의 본명은 카렉스 볼카누이스로 크라시스 건국왕의 동료이자, 이 팔찌를 만들어서 넘겨준 레드 드래곤이다.

크라시스에선 상당히 유명한 이름으로 가이린의 광산을 지키는 용병대의 이름도 볼카누이스다. 카이젤이 재료를 넘겨줬다는 것을 보니, 둘이 나름 연이 있는 것 같다.

“그 팔찌를 만든 재료는 신영석이라는 귀한 돌이다. 그 망할 영감이 갑자기 나타나서 훔쳐갔지. 뿌드득...”

좋은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카이젤은 볼카누이스의 이름을 말하며 이를 갈기 시작했다.

“훔쳐가는 데 그냥 놔뒀다고?”

“넌 그 영감을 평범한 드래곤으로 알고 있겠지만, 그는 특별하다. 가장 강력한 레드 일족의 힘에 다른 능력까지 가지고 있지. 거기다 나이까지 쳐 먹어서 더럽게 강하다.”

난 볼카누이스를 건국왕의 동료로 설정했을 뿐이다. 그 드래곤은 원작에서 등장 하지도 않는데 특별한 능력이라니 전혀 모르는 일이다.

“볼카누이스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힘이 뭐지?”

“그 영감은 자신이 만들어낸 물건이나, 기술, 마법에 특별한 능력을 부여 할 수 있다. 네가 가진 그 팔찌의 사기 능력도 그 힘으로 만들어진 거지. 재료가 좋다고 해도 볼카누이스 영감이 아니었다면 그런 팔찌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다.”

“아...”

무슨 말인지 알았다. 볼카누이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물건과 능력에 특별한 옵션을 부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 영감 한참 후에 와서는 자신이 쓴 책이라며 책 한 권을 던져주고 가더군. 정말이지 짜증나는 드래곤이야.”

“책?”

“그래. 태워 버릴까 하다가 그냥 저 책장에 박아두었다. 나중에 인간계에 풀라고 했지만 내가 그놈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으니까.”

“마법서인가?”

“아니, 검술서였다.”

“드래곤이 검술서를 만들었다고?”

드래곤이 검술서를 만들었다니, 신기한 일이다. 그는 꽤나 괴짜인 모양이다.

“그래. 지가 만들었다고 했다. 책 이름이 튜란 왕국 기본 검술서였지.”

“튜란 왕국 기본 검술서...”

앞에 붙은 튜란을 제외하면 많이 들어봤던 이름의 검술서다. 갑자기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의 고동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호, 혹시 그 검술서의 저자가...”

“그 영감이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아, 본명을 그대로 적어놓지는 않았지. 카렉스 볼카누이스. 카볼이라 되어 있었다. 저 책장에 있을 테니, 보고 싶으면 보던가.”

“아...”

“너에겐 특별하겠지, 너희 왕국의 건국왕의...”

카볼의 이름이 나온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카이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볼이 드래곤 카렉스 볼카누이스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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