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드래곤
“어둠의 마력?”
자신의 레어에서 수면을 취하려던 블루 드래곤 카이젤 엘라트가 불편한 음성을 내뱉었다.
200여 년의 유희를 끝내고 긴 잠을 자려 했건만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어둠의 마나가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끄응...”
카이젤은 어둠의 마나가 굉장히 짜증났지만, 강한 수면욕구 때문에 움직이기 귀찮았다.
못 본 척하고 수면 준비를 하려할 때 흑마법사가 있는 장소에서 커다한 마나의 작용이 느껴졌다.
“빠드득!”
카이젤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어금니가 거칠게 맞물렸다.
“이 개자식이!”
카이젤은 방금 느껴진 마나에서 굉장히 친숙한 기운을 느꼈다. 드래곤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 드래곤 하트의 마나다.
그가 느낀 마나는 완성된 드래곤의 힘이 아니었다. 드래곤 하트의 마나가 적은 것을 보니,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해츨링을 죽이고 얻은 드래곤 하트가 분명했다.
“감히!”
드래곤은 그 어떤 생물보다 강한 개인주의를 가지고 있다. 눈앞에서 동족이 죽어도 자신과 관련이 없다면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런 드래곤에게 있는 유일한 예외가 그들의 어린 동족 해츨링이다. 해츨링을 건드린다면 드래곤들은 공격한 자만이 아니라 그 종족 전체에게 복수를 한다.
예전에 샤칸 왕궁의 헌터가 우연히 해츨링을 잡은 적이 있었는데 그 헌터만이 아니라, 샤칸 왕국 자체가 드래곤의 공격으로 멸망해버렸다.
그 이후로 모든 종족이 드래곤은 공격해도, 해츨링 만큼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죽여 버리겠어!”
카이젤은 분노로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넘치던 수면욕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놈을 죽이고, 다른 드래곤을 불러 그 놈의 출신 나라마저 멸망시킬 생각이었다.
번쩍.
밝은 빛과 함께 그의 몸이 레어에서 사라졌다.
**
“주, 주인. 저거 인간이 맞소? 어떻게 저런 마나를 가지고 있을 수가... 마나만 봤을 때 주인보다도 많을 거 같소!”
포메라는 본드래곤을 아공간에 넣다말고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저거 드래곤이다. 넌 절대 나서지마.”
“드, 드으! 드래곤?”
포메라를 뒤로 보내고 앞으로 나왔다. 드래곤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종족이다. 포메라가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간 큰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어서 뒤로 보냈다.
왜 여기에 드래곤이 오는 거지?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놈들인데.
[이름: 카이젤 엘라트]
[특성: 블루 드래곤]
[호감도: -99(증오)]
[현재 기분: 출신 왕국마저 멸망시킬 생각임.]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시 드래곤의 정보를 보았다. 다른 것 보다 처음 보는 나를 증오하는 게 너무 이상했다.
“대체 뭐지?”
이유를 생각해보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언데드 몬스터들이 있지만, 고작 이런 언데드가 거슬려서 드래곤이 튀어 나오진 않았을 거다.
“아!”
그때 아공간에 몸이 들어가고 머리만 삐죽 나와 있는 본드래곤을 보자, 대충이나마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러시오?”
“저거 때문이었어.”
드래곤은 동족의 죽음을 봐도 방관하지만 해츨링을 건드리면 용의 역린을 건드린 것처럼 발광을 한다.
저 드래곤은 드래곤하트의 마나가 적은 것을 느끼고, 우리가 해츨링을 건드렸다고 생각했을 거다. 이제야 저 증오가 이해가 되었다.
쿠구구구구.
드래곤은 자신의 분노를 존재감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눈동자가 반쯤 돌아간 것을 보니,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치리리링!
드래곤의 앞에 길쭉한 얼음의 창 수십 개가 나타났다. 어떠한 영창이나 주문도 없이 저런 마법을 사용하다니 역시나 드래곤답다.
“말조차 듣지 않겠다는 건가?”
드래곤이 얼음의 창으로 나와 포메라를 동시에 노렸다. 단번에 죽일 생각은 없는지 다리와 하체부분을 노리고 있었다.
“내가 막겠소.”
포메라가 만마의 창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숫자가 많아서 자신의 마법으로 막으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 목적은 이룰 수가 없었다.
“마, 마법의 발현이 되지 않소!”
“당연하겠지.”
드래곤은 포메라의 어둠의 마나를 느꼈을 테니, 도망칠 수 없게 결계를 쳐놨을 거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포메라는 평범한 해골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나서지 말랬잖아.”
불쌍할 정도로 덜덜 떠는 포메라를 다시 뒤로 보내고 녀석의 앞을 막았다.
“해볼까.”
연위결을 운용해서 내게 날아오는 수십 개의 얼음의 창에 간섭했다. 가만히 기다리다가 창이 내 몸에 닿기 직전에 모든 얼음의 창들을 아래로 내리 눌렀다.
캬캬캬컁!
수십 개의 얼음의 창이 모조리 땅에 박혀버렸다.
“되는군.”
내 손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연위결의 수준이 올라서 무기가 아닌 것에도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만 힘을 썼기 때문에 내력이나 정신력의 소모도 적다. 최고의 능력이다.
“무슨...”
자신의 창이 내 앞에서 꺼져버린 것에 드래곤이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보고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한수는 있다는 건가?”
“이봐! 대화를 하자! 넌 오해를...”
“닥쳐라!”
드래곤이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운 채로 양 손을 들어올렸다. 여전히 대화를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얼어라.”
드래곤의 용언에 주변의 바다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의 양손을 따라 얼어붙은 바다에서 수백 개의 얼음 창이 떠올랐다.
“가라!”
드래곤의 손가락을 따라 세기 힘든 숫자의 얼음조각들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내게 닿기 직전에 연위결을 사용해서 모조리 떨어뜨려버렸다.
캬갸갸갸걍!
드래곤이 보낸 얼음 조각들은 단 하나도 내게 닿지 못하고 모조리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허...”
드래곤의 표정이 무너져 내린다. 있을 수 없는 것을 본 듯 넋이 나간 표정이다.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 돌연 이를 갈기 시작했다.
“좋아.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드래곤의 살기가 진득해졌다.
파아앗!
드래곤의 몸에 파란빛이 나면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튀어나오고 뿔이 올라온다. 놈은 날개 달린 도마뱀의 모습인 자신의 본체로 현신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본체로 현신한 드래곤은 하늘로 떠올라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주, 주인. 저, 저거...”
“드래곤 브레스다.”
다른 마법을 쓸 만도 한데 브레스를 사용할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우리가 해츨링을 죽였다는 생각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뒷일은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도망가야 하오! 브, 브레스는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버틸 수 없소!”
“괜찮으니까. 내 뒤에서 절대 나오지 마.”
브레스가 쏘아지기 직전임에도 큰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종류는 달라도 한 번 겪어 봤기 때문이다.
챠앙!
귀왕살을 뽑은 뒤 등 뒤로 날려 보냈다.
콰아아아아아!
귀왕살이 날아가자마자, 아이스 브레스가 쏟아져 내렸다. 끔찍한 냉기에 아래에 있는 바다가 굳어버리고, 바람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레비타스!”
콰오오오!
명룡의 머리가 나타나 아이스 브레스를 집어삼켜버렸다. 드래곤은 명룡을 뚫어버리겠다는 듯 더욱 강력하게 브레스를 내뿜었지만 그건 놈의 실수다.
명룡은 시간제한이 있지만, 그 시간동안은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있다. 브레스의 힘을 단숨에 쏟아준다면 나야 고마울 뿐이었다.
“루카스!”
5초가 지난 뒤 명룡이 사라졌을 때 볼카누이스의 팔찌를 발동시켰다. 팔찌에서 빛이 번쩍이며 내 전신을 붉은빛으로 바꿔버렸다.
콰과과과!
볼카누이스 팔찌의 효과 덕에 무적이 되어서 어떠한 통증도 없이 아이스 브레스를 버텨낼 수 있었다.
쿠우우우우.
6초정도가 지나자, 브레스가 그쳤다. 주변에 있던 모든 언데드들이 얼어서 부서지고 새로운 빙하들이 생겨났지만 나와 내 뒤에 있던 포메라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주, 주, 주인 어떻게 브레스를! 저, 정말 인간이 아니야!”
포메라는 혼이 승천한 목소리를 내면서 뒤로 자빠졌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얼굴이다.
“마, 말도 안 돼!”
드래곤의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에 경악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브레스를 견딜 거라고는 아예 상상도 하지 못한 것 같다. 거대한 몸체를 띄우는 날갯짓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네, 네놈은 대체...”
“그전에 목에서 느껴지는 거 없어?”
“헉!”
드래곤은 자신의 목에 살짝 박혀있는 귀왕살을 흘깃 보고서 거대한 동체를 움찔 거렸다.
“느,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네가 열심히 침 뱉고 있을 때 박아뒀지.”
드래곤이 하늘에 떠있다면 마스터도 공격할 수가 없지만, 암기를 쓰는 내겐 정지해 있는 과녁일 뿐이다.
더군다나 브레스는 쓸 때 드래곤은 완벽한 무방비상태이기 때문에 놈이 신나게 브레스를 쏠 때 귀왕살을 조종해 놈의 목 비늘에 살짝 꽂아두었다.
아무리 팔성을 이뤘다고 해도 드래곤은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놈이 흥분했고, 나를 무시하고 있었으며, 내 기술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래곤의 방심을 이용했기 때문에 처음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방법이지만, 이대로 끝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너라면 느낄 수 있겠지. 검안에 들어있는 강대한 기운과 지독한 살기를. 내가 마음먹는 순간 그 검은 네 목에 있는 드래곤 하트를 박살낼 거다.”
“감히!”
“네 마나가 조금만 움직여도 당장 목에 구멍을 내주마. 드래곤 하트를 다른 곳에 전송하는 짓거리를 하고 싶으면 해봐. 내 검이 빠를지, 네 마법이 빠를지 한 번 보자고.”
“크으윽...”
내 말을 들은 드래곤이 마나의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놈에게 경고를 주기위해 귀왕살에 강기를 씌웠다.
“크아악!”
검강으로 상처가 크게 벌어지자, 드래곤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내려와라.”
“나를 죽여도 소용없다. 네놈들이 해츨링을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너희와 관계된 모든 것이 멸망하게 될 거다. 그냥 죽여라!”
자존심은 있는지, 드래곤은 내려오지 않고 자신을 죽이라 말하고 있었다.
“역시나 그것 때문이었나.”
머리는 좋지만, 멍청한 도마뱀의 수준에 고개를 한숨이 나왔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일단 오해는 풀어야겠다.
“포메라.”
“어, 어?”
“본 드래곤 꺼내봐. 이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포메라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어둠의 커튼을 열어서 본 드래곤의 몸체를 꺼냈다. 아이스 브레스로 머리는 부서졌지만 아공간에 있던 몸체는 그대로였다.
“네 눈에는 이게 해츨링으로 보이냐?”
“어? 어? 어엉!”
본드래곤의 몸을 본 블루드래곤이 기괴한 신음소리를 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큰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입을 쩍 벌렸다.
“에이션트 급은 안 되도 웜급은 훨씬 넘어 보이지 않아?”
“드래곤 하트의 마나가 성룡의 수준이 아니었는데!”
“그건 내가 마나를 뽑아 쓴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고.”
“아니, 그, 그러면...”
“이 드래곤도 우리가 잡은 게 아니라, 악당에게 뺏은 거거든. 한 마디로 너는 앞뒤도 보지 않고, 죄 없는 우리를 공격했다는 거지.”
드래곤은 본드래곤을 멍하니 보다가 땅으로 하강했다. 가까이에서 본드래곤과 드래곤 하트를 관찰한 놈이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미, 미안하다. 난 너희들이 해츨링을 사냥한 줄만 알고... 네 말대로 이건 웜급 드래곤의 뼈와 드래곤 하트다.”
“미안하다고 하면 끝나? 우린 죽을 뻔 했는데?”
“크윽...”
예상외로 바로 사과가 나왔지만 저것만 듣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난 블루 일족의 카이젤 엘라트다. 너희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하마.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드래곤이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흠...”
목에 박힌 귀왕살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과에 약간이지만 마음이 풀렸다.
“너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사과 한 번 하면 끝나냐고. 국보급 아이템도 썼고, 기껏 만들어놓은 언데드들이랑, 본드래곤의 대가리까지 모조리 부서졌는데!”
사과만 들었다고 그냥 갈 수는 없다. 지금 상황을 지배하는 건 나다. 내가 원하는 말을 들어야겠다.
“다시 말하지만, 진심으로 사과한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전부 해주겠다.”
카이젤의 입에서 전부해준다는 말이 나왔을 때 뒤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뭘 해줄 수 있는데?”
“내 레어로 가겠나? 일단 이 검은 치워다오. 고통이 점점 심해지는군.”
놈의 비늘을 쉽게 뚫고, 계속 통증을 주는 것을 보니, 귀왕살의 특성들이 드래곤에게도 통하고 있었다.
“네가 뭔 짓을 할지 알고 검을 치워.”
“드래곤은 맹세한 약속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 그것을 어긴다면 드래곤 하트를 잃게 되지. 네게 맹세를 하겠다.”
아는 내용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어기게 된다면 드래곤은 목숨을 잃게 된다.
“인간. 네 이름이 뭐지?”
“유렌 록스.”
“나 카이젤 엘라트는 유렌 록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기로 맹세하겠다.”
상황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카이젤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준다고 맹세해버렸다.
파앗!
맹세를 한 카이젤의 눈빛이 퍼렇게 빛났다. 맹세가 완료되었다는 표시 같았다.
“이건 목숨을 건 계약과도 같다. 이제 믿을 수 있겠지. 내 레어로 가자.”
“음...”
언데드 구경을 하러 왔다가 드래곤과 한바탕하고 놈의 레어로 가게 되다니,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카일젤은 아마 후회하게 될 거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