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2)
“저거 뭔데...”
검은색 로브를 입은 것 같기도 했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천이 아니라, 어둠 그 자체를 두른 느낌이다. 놈의 몸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절대 옷이 아니었다.
파아아아.
산의 정상으로 쏜살같이 날아간 검은빛의 구슬은 그자 앞에서 둥둥 떠 있었다. 그림자는 손을, 아니 손 같은 것을 올려서 그 구슬을 잡았다.
“뭐, 뭐야!”
그 그림자가 구슬을 흡수하자, 손 같았던 것이 검은색 손으로 변해버렸다. 구슬이 흡수되어 육체가 되는 것 같았다.
“이, 인간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대체...”
그림자에게선 인간이나 몬스터의 생기도, 언데드의 사기도, 악마의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존재하건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공을 배우고 나서 이런 감각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싸늘한 냉기가 내 전신을 훑어지나가는 것 같았고 팔에 닭살이 돋아 올랐다.
그림자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놈의 시선이 내게 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창조주의 눈이!”
창조주의 눈이 발동하지 않았고,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조금 전 까지만해도 멀쩡히 움직이던 팔다리가 물에 빠진 것처럼 무겁고 흐느적거렸다.
그림자가 새로 생겨난 자신의 팔을 들어 반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자 놈과 나 사이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검은 벽이 나타났다.
“이건 마나가 아니야.”
벽에서 느껴지는 건 마나가 아니다. 뭔지 모를 괴이한 힘이었다. 잠시 뒤 검은 벽이 걷혔고 그림자 인간이 사라졌다.
“하, 정말 뭐가 뭔지...”
그림자는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보고 있음에도 놈이 사라진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름을 잃은 자’의 파편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림자가 사라지자 초록빛이 내게 완전히 흡수되었는지 그리드나 슬로스 때와 똑같은 메시지가 올라오며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놈은 대체...”
세계 그 자체가 멈췄지만 나와 그 그림자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 그림자와의 정체가 짐작되지 않았다.
“유렌?”
“아, 네...”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느냐.”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뺨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주셨다.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했던 거 같다.
“음...”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그림자에 대해서 말을 할까했지만 검은빛을 얻고 사라진 것을 보니, 다시 오진 않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땀을 닦으며 마탑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가이린에 한 번 와주세요.”
“그래.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닌 모양이니. 가서 쉬 거라.”
아버지는 내 등을 두드리고 나서 옆에 있는 아린을 보았다.
“아린아. 유렌이 못되게 굴면 바로 말 하 거라. 내가 혼내 줄 테니.”
“네.”
“네가 웃으니까 정말 보기 좋구나. 정말 좋아.”
아린은 싱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처음엔 후회했지만, 널 유렌에게 보내기 정말 잘한 거 같아. 내가 한 선택은 결국 옳았어. 후후.”
“자기 자랑 그만하세요. 이제 갈게요.”
“에휴, 아들이라는 놈이.”
“저 말고 콜린이나 잘 챙겨줘요.”
“그래. 형이 걱정해줬다고 꼭 전하마.”
아버지가 웃으며 손을 흔드셨다. 그에게 다시 인사를 드리고 가이린으로 워프했다.
“가이린이 반가운걸 보니, 여기가 진짜 내 집 같긴 하네.”
“저도 마찬가지에요. 록스에서 훨씬 오래 살았는데 참 기분이 이상하네요.”
페루가 옆으로 다가오며 빙긋 웃었다. 녀석 역시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는 모양이다.
슈우웅.
성으로 가려 할 때 머리위에서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반가운 녀석이 보였다.
“빼액!”
빽빽이가 하늘에서 우렁찬 울음소리 내면서 내 머리위에 부리를 내려 꽂으려하고 있었다.
“쁘읍...”
빽빽이의 공격을 살짝 피한 뒤 녀석의 부리를 잡고 흔들었다. 많이 삐졌는지 그 와중에도 부리를 돌리고 있었다.
“반가움의 표시치고는 거친 거 아니냐?”
“빽!”
빽빽이의 눈 사이에 주름이 잡힌다. 역시나 자신을 놓고 갔다고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미안해.”
“빽!”
“네가 원하는 과일 다 사줄게.”
“빽!”
“그래. 쿠키도.”
“빽.”
빽빽이는 쿠키란 말이 나오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어깨에 내려앉아서 내 볼에 날개를 부비기 시작했다. 사과를 받아준다는 뜻 같았다.
“크하하하!”
“아이고! 빽빽이도 과자에 무너지는구나!”
빽빽이의 귀여운 행동에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털을 부비며 친한 척을 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음엔 꼭 데려갈게.”
**
“오자마자 일이라니, 괜찮으시겠어요?”
성에 도착하자마자 집무실로 올라가 밀린 업무를 시작했다. 그동안 습격 대책을 짜고 준비를 하느라 일이 상당히 밀려있었기 때문에 책상에 이어 바닥에도 서류가 쌓여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 밑에서 조용히 살걸 그랬어.”
“그런 거 치고는 엄청 빨리 처리하시잖아요. 저희가 며칠에 걸쳐서 처리하는 일들 실수 없이 몇 시간 만에 하시면서.”
“너희들이 잘 처리해주니까. 그렇지. 나 혼자 했으면 몇 달은 걸렸을 거다.”
“빈말이라도 듣기는 좋네요. 하하.”
페루와 가벼운 농담을 하며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서류에만 집중해서 최대한 빠르게 처리했다.
일을 모두 처리하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그믐달은 어느새 초승달로 변해있었다.
“나머지는 가벼운 것들이네요. 제가 내일 처리하겠습니다. 이제 쉬세요.”
“그래. 너도 고생 많았어. 가서 쉬어라.”
“넵. 유렌님도 수련하지 마시고 제발 주무세요.”
“하하!”
페루가 나가면서 하는 말에 살짝 뜨끔했다. 바로 연공실로 향하려고 했는데 역시나 나를 잘 안다. 하긴 아린 다음으로 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걱정 마.”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제가 말해도 소용없겠네요. 그럼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고맙다.”
페루는 적당히 수련하고 자라는 말을 하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책상을 정리한 뒤 연공실로 향했다.
“그 그림자는 분명히 레리아가 말했던 놈이 맞아.”
요정의 여왕 레리아가 내게 말했었다. 시간이 돌아간 이후 중요한 사건의 끝마다 나타난다는 그림자가 있다고, 오늘 본 그림자가 바로 그 놈일 거다. 그놈이 이 세상을 이렇게 바꿔놓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시간이 멈춘 게 처음이 아니야.”
칠죄종을 죽일 때마다 겪었던 모두가 멈췄을 때 나만 움직이는 상황을 한 번 더 있었다.
원작과 다른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처리하면 구슬이 나오고 그 구슬을 잡으면 깨어진 방에 가게 된다. 그때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멈춰버렸다. 오늘 겪은 일은 그것과 정말 비슷했다.
“그 깨진 방의 여자도 똑같아.”
그림자에게서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듯이 그 깨진 방에서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방에서 내게 말을 전하고 보상을 주는 여자도 그림자와 비슷한 존재 같았다.
최소한 둘은 무슨 관계가 있을 거다.
“궁금해 미치겠네.”
궁금하지만 내 추측만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좀 더 상황이 전개되어야 알 수 있을 거 같다.
“어쩔 수 없는 건 놔두고, 일단 할 일을 해야겠지.”
주머니에서 키아믹의 건틀릿을 꺼내들었다. 이걸 줄 격투가도 생각나지 않고, 어설픈 놈이 꼈다간 많은 사람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내가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차앙!
건틀릿을 끼자마자, 스스로 뺄 수 없게 팔뚝 쪽에 날카로운 칼이 올라왔다. 정말이지 정신 나간 건틀릿이다.
“호오...”
1분정도 지나자, 건틀릿에서 스멀스멀 어둠의 마나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게 힘을 주려는 것처럼 어둠의 마나는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빠지지직!
만독자전신기가 자동으로 일어나서 어둠의 마나를 지워버리려고 했지만 가만히 놔두었다. 이 어둠의 마나를 받아들여야 키아믹이 풀려나기 때문이다.
호랑의 앞에서 벌벌 떠는 토끼처럼, 키아믹의 어둠의 마나는 만독자전신기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이거 괜찮겠는데.”
만독자전신기를 운용해서 내 몸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어둠의 마나를 내 내공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어둠의 마나를 받아들이자, 건틀릿에 봉인된 키아믹은 좋다구나 하면서 계속해서 내게 마나를 전해주기 시작했다.
그래. 계속 줘라. 쪽쪽 빨아먹어주마.
키아믹이 어둠의 마나를 계속해서 주는 이유는 자신의 마나에 중독된 인간을 손쉽게 집어 삼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놈의 생각과 달리 난 어둠의 마나를 내 내력으로 바꾸고 있었다. 오비스처럼 어둠의 마나에 중독 될 일은 전혀 없었다.
미쳤네. 웬만한 영약은 뺨을 후릴 정도야.
지금 흡수한 마나만 해도 강력한 영약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놈이 주는 마나는 계속되고 있었다.
우우웅.
끊임없이 내력이 모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몸이 붕 뜬 느낌이 들면서 새하얀 공간에서 정신이 들었다.
“크크큭. 드디어 왔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은색의 피부를 가지고, 산양의 뿔을 가진 악마 키아믹이 히죽이고 있었다. 놈의 얼굴은 건틀릿에 그려진 악마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내가 주는 먹이는 맛있었나? 크큭.”
키아믹이 회색빛 이빨을 드러내며 잔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놈의 웃음소리는 오비스가 놈에게 정신이 먹혔을 때와 똑같았다.
“그래. 맛 좋던데?”
“뭐?”
키아믹은 자신에게 겁을 집어먹지도, 놀라지도 않는 나를 보고 얼굴을 구기다가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런 놈들이 있었지. 내 마나를 먹고 자신이 정말 강해졌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놈들이.”
키아믹은 내가 어둠의 마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독이다. 너는 내게 저당을 잡힌 것과 다를 바가 없어. 크크큭.”
키아믹이 내게 손을 뻗었다. 자신이 준 마력을 이용해서 나를 조종하려 하는 것이다.
“뭐, 뭐야!”
키아믹은 내 안에 있는 어둠의 마나를 이용하려 했지만, 내겐 놈의 마나가 단 한 톨도 없다. 놈은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미안하지만 놈의 마나는 내 내력으로 차곡차곡 변한 상태다.
“어, 어떻게! 분명 내 마나를 전부 받아들였는데!”
“먹었지. 다만 빨대로 정화해서 마셨어.”
“불가능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성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네 생각이고.”
“크으윽...”
키아믹이 이를 갈면서 일어났다.
쿠구구구구!
놈은 자신의 몸집을 점점 키우기 시작했다. 역시 정신세계에서 싸우는 법을 아는 놈이다.
“그럼 그대로 밟아 죽여주마! 네놈의 모든 것은 내 것이다!”
하늘에 닿을 만큼 커진 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놈은 커진 몸으로 내게 겁을 주려 한 것이지만, 내가 그런 것에 넘어갈 리가 없다.
빠지지직!
천판을 만들었다. 그냥 천판이 아니라, 건물 크기의 천판을 만들어 낸 후에 공중에 띄웠다.
우우웅.
정신세계이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내 실력과 달리 눈 깜짝 할 사이에 천화를 피워냈다. 이곳에서만큼은 당천위에게도 밀리지 않을 거다.
화아악!
화사하게 피어난 천화에 광화를 둘렀다. 세상을 태울 것 같은 빛이 광화에서 퍼져 나왔다.
“어, 어떻게 인간 따위가 이 세계의 법칙을 아는 거냐!”
“네 친구들을 여기서 만났거든.”
“뭐?”
“하르바스랑 글레시아라고 알아?”
“네,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키아믹은 마검에 있던 악마들을 알고 있었다. 놈의 눈빛이 크게 출렁였다.
“그 두 명이 이 장소에서 나한테 죽었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말이야.”
“뭐?”
“이제 네 차례다.”
“끄으으윽!”
키아믹이 이를 악물며 자신의 주변에 거대한 막을 만들었다. 놈은 그 상태 그대로 내게 돌진해왔다.
“벌레처럼 짓눌려 죽어라!”
“만천화우 광화.”
하늘 전체를 덮고 있던 광화를 움직였다.
쿠우우우우!
은하수가 떨어지듯 빛의 소나기가 키아믹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놈은 달려오다 말고 광화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아, 이건 말도...”
**
[악마 키아믹의 모든 능력을 흡수했습니다.]
[내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만독자전신기의 성취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당천위의 전투 경험의 경험치가 100%가 되었습니다.]
“이제 팔성에 도전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