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끙...”
눈을 뜨자,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본 내 방의 천장이 보였다.
“뭔가 그립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저 천장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옛 생각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어나셨군요.”
“아린?”
왼쪽에서 가벼운 복장을 갖춘 아린이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옛날 생각이 났다. 처음 봤을 때와 거의 똑같은 상황이었다.
차이점은 그 당시의 무표정한 여인에게 작은 미소가 생겼다는 정도였다.
“이레아님이 정신적 피로가 많이 누적되었다고 하셨는데,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말 그대로 좀 무리해서 그런 거니까. 지금은 괜찮아. 내가 얼마나 잤지?”
“쓰러지시고 나서 이틀이 지났습니다.”
“이틀이라...”
내공심법을 해서 피로를 풀면 육체적 피로는 풀려도 정신적 피로는 풀리지 않는다.
여러 가지 상황을 준비하느라 잠을 못 잤고, 만천화우 사용으로 정신력도 많이 소모되었는데 잠을 푹 잤더니 개운해졌다.
밖에 보이는 하늘처럼 머리가 맑은 느낌이다.
“내가 쓰러진 이후에 어떻게 됐어?”
“다행히 본드래곤과 마법을 쓰는 악마가 쓰러진 이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아있던 몬스터을 물리치고 상황이 종료됐습니다.”
라스를 끝으로 상황이 종료됐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른 놈이 남아 있었다면 정말 난리가 났을 거다.
“피해는 어때?”
“조기에 조치를 취했고, 유렌님과 모두가 바쁘게 움직여 주신 덕분에 예상보다 피해가 적었습니다. 외부 지원이 빠르게 와준 덕도 있었습니다.”
“다행이네.”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기 위해서 정말 부리나케 뛰어다니고 준비했는데 그게 보답을 받은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지원 와주신 분들은?”
“부상을 입으신 분들은 쉬고 계시고, 다른 분들은 도시 복구 잡업을 돕고 계십니다.”
“작업을 돕고 계시다고?”
“저희가 시킨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말려도 심심하다고 하시며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도 거침없이 와주고, 뒷일까지 도와주고 있다니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나와 그들이 이어진 인연의 줄에 큰 감사함을 느꼈다.
터억!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일어났구나!”
“유렌!”
둘은 밖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바로 문을 부술 듯이 연 것이다. 아버지는 울 것 같이 인상을 찡그리고 계셨고, 할아버지는 큰 미소를 짓고 계셨다.
“이 녀석아!”
아버지는 아직 붙지 않은 다리로 달려와서 날 끌어안으셨고, 할아버지는 내 어깨를 꽉 잡아주셨다.
“다리는 왜 그러고 계십니까? 치료 안 받으셨습니까?”
“네가 그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치료를 받겠느냐.”
“전 그냥 기절했을 뿐인데요?”
“이 녀석아!”
아버지는 내가 쓰러져있는 동안 마음고생을 정말 많이 하신 모양이다. 떨리는 손으로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셨다.
“정말 고생 많았다.”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주무르며 흐뭇한 웃음을 지으셨다. 다만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평소처럼 정원사의 낡은 의복이 아니라, 귀족의 옷을 입고 계셨다.
“할아버지. 옷이...”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그렇긴 하네요.”
할아버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셨다. 오러 블레이드까지 사용하셨으니, 더 이상 정원사로 숨어 살 수는 없었다.
“이제 정원사 일은 하지 못하시겠네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렇게 됐어도 정원 일은 계속할 생각이다. 이미 가주의 허락도 받은 상태고. 허허.”
“음...”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쳐다보셨고, 아버지는 콧등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모두가 말렸는데 본인이 워낙에 완고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다. 마스터가 정원사 일을 하는 곳은 우리 록스밖에 없을 거야.”
“그게 뭐 어떠냐. 오히려 희소효과가 있어서 좋지. 허허.”
할아버지는 즐겁다는 웃으시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들어 올리셨다.
“이번 일 덕분에 새롭게 친구를 사귀었다.”
“예? 친구요?”
“후라켄과 친구를 먹었어.”
할아버지가 친구를 먹었나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 그가 누구 일지 생각할 때 할아버지가 먼저 말씀을 하셨다.
“억!”
“그는 나와 동갑이더구나. 같은 마스터에 동갑이니, 친구를 먹기로 했지.”
후라켄은 마스터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몰랐지만 작은 할아버지와 동갑인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끔씩 만나서 대련을 할 생각이다. 지금은 내가 밀리지만 꼭 따라잡을 생각이야.”
“정말 잘 됐네요.”
후라켄 공작과 작은 할아버지가 친구가 된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 젠버그가와 록스가 양쪽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저기 콜린은 어떤가요?”
“네가 빠르게 치료를 받게 해준 덕분에 후유증은 남지 않을 것 같다고 한다. 정말 잘했다.”
콜린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특히나 후유증이 없다는 사실이 제일 반가웠다.
“넌 아직 피곤할 텐데, 우리 이야기만 한 것 같구나.”
“그래. 정말 고생 많았다. 우리가, 아니 이 록스가 살아남은 건 네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정말 고맙다.”
“아뇨. 두 분이 제 말을 전적으로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진심을 다해 내게 고맙다고 하셨고, 나도 두 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좀 더 쉬 거라. 아린 너도 조금만 고생해주고.”
“아닙니다.”
두 분은 웃으시면서 나갔다. 내 상태를 보고 마음을 푹 놓은 것 같았다. 다시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아린을 보았다.
“뭐 특별한 일은 없었지?”
“네. 딱히... 아!”
아린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유렌님이 때려잡으신 본드래곤 있지 않습니까?”
“그게 왜?”
“그 시체가 그저께 밤사이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없어졌다고 합니다.”
“뭐?”
본드래곤이라고 해도 드래곤의 시체다.
그 뼈만 가져다 팔아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올 텐데 누가 훔쳐갔는지 잡히기만 하면 그냥...
“그 외에도 돈이 되는 강력한 몬스터들의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이레아님과 신관들이 흑마법사가 있을 거 같다고 하시며 주변을 수색하고 계십니다.”
“아하...”
이제야 누구 짓인지 알겠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는?”
“별 일 없습니다.”
“알겠어. 나도 좀 더 자려니까. 너도 가서 쉬어.”
“...알겠습니다.”
아린은 뭔가를 눈치 챘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밖으로 나갔다.
푸우욱.
아린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침대 아래에서 연기가 흘러나왔다. 연기는 하나로 뭉쳐서 작달만한 해골이 되었다.
“주인.”
“나쁘지 않아 보이네.”
“그게 무슨 말이오! 마을에 신관과 성기사들로 도배가 되어 있어 아주 죽는지 알았소.”
“하하하!”
“특히 그 성녀! 내가 뭐만 하면 그 자시에 나타나서 욕을 해대는데 정말 귀가 아플 정도요. 그 여자 대체 욕을 어디서 배운 거요?”
포메라는 질렸다는 듯 두개골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자동으로 나온다.
“잘 훔쳤지?”
“아셨소?”
“본드래곤과 강한 몬스터들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듣고 바로 알아차렸지. 그게 너 말고 또 있겠냐?”
“그렇소. 신성력이 있는 자들의 눈을 피해서 움직이다보니, 정말 힘들었소.”
“그래. 수고했다.”
“그것만이 아니오.”
포메라는 갑자기 자신의 아공간을 열었다. 녀석은 그곳에서 한 쌍의 건틀릿과 거인의 해골이 달린 창을 꺼내들었다.
“위험한 물건이라 빼놓았소. 둘 다 소유자의 정신을 좀 먹는 힘이 있소. 내가 만일 7서클이 되지 않았다면 먹혔을 지도 모르오.”
포메라는 그 말을 하며 내 침대 밑에 두 장비를 내려놓았다. 내가 미리 챙겼어야 했지만 챙기지 못한 만마의 창과 키아믹의 건틀릿이다.
“흠...”
두 장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포메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둘 다 네게 큰 힘이 될 물건들인데? 왜 챙기지 않고 꺼내놓았지? 특히 이 창은 네게 엄청난 도움이 될 물건인데.”
“알고 있소. 그 창은 흑마법사의 능력을 상승시키는 강대한 힘이 있더군. 하지만 둘 다 주인이 잡은 놈들의 장비잖소. 주인 것인데 내가 왜 챙기겠소.”
포메라는 왜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냐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녀석의 눈을 보니 진심이었다.
착.
만마의 창을 잡았다. 창에서 흐르는 죽음의 사기가 내 몸에 흘러들어왔다가 만독자전신기에 밀려서 쫓겨났다. 피식 웃고 창을 들어 올려 포메라에게 내밀었다.
“네 꺼다.”
“저, 정말이오?”
“그래.”
포메라는 믿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이런 엄청난 물건을 자신에게 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이건 흐, 흑마법사에겐 최고의 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정말 내게 주겠다는 거요?”
“내가 써봐야 잘 드는 창일뿐이야. 네가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야. 가져가.”
“아, 고맙소. 주인. 정말 고맙소!”
포메라는 창을 받고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 몰래 챙겨 갔어도 뭐라 하지 않을 텐데, 이렇게까지 고마워하는 것을 보니, 내가 사람 하나는 아니, 해골 하나는 잘 들였다.
“그리고...”
“음?”
“전에도 말했지만, 네 건 내 꺼, 내 건 내 거니까 신경 쓰지 마.”
“...”
감동을 받은 포메라의 눈빛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피식 웃고 키아믹의 건틀렛을 들어 마법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안에 있는 악마와 한 바탕 해서 놈의 마력을 가져와야겠다.
“다른 시체는 그렇다 치고 본드래곤은 어떻게 할 거냐?”
“용의 이빨로는 용아병을 용의 뼈로는 용골병을 만들 수 있소. 일단 여러 가지 이용방법을 생각해 볼 생각이오.”
“본드래곤으로는 못 살려? 좀 많이 부서졌나?”
“그건 상관없소. 조금 작게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물건이 없소.”
“드래곤 하트?”
“역시 주인은 모르는 게 없소.”
본드래곤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드래곤하트는 뼛조각하나 떨어지지 않은 채로 내가 가지고 있다.
“그 거대한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드래곤하트 정도의 내구성을 가진 마나하트가 필요하오.”
“그 안의 마나와 같이 필요한 건가?”
“아니오. 마나보다 드래곤하트 그 자체가 중요하오.”
그렇다면 드래곤하트를 두 가지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포메라에게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럼 본드래곤의 뼈는 놔둬.”
“왜 그러시오?”
“드래곤하트는 나한테 있어. 안의 마력을 좀 쓰고 가져다 줄 게.”
“허! 그걸 그 사이에 챙긴 것이오?”
“뭐 어쩌다보니.”
“정말 주인은 인간이 아닌 것 같소. 뭘 그리 잘 챙겨먹는지 아주... 커흠...”
포메라는 내가 말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살짝 떨다가 헛기침을 했다.
“이제 가보겠소. 모, 몸 조리 잘하시오.”
포메라는 만마의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그마한 해골이 인간의 키를 한참 넘는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은 코미디 같았다.
“포메라.”
“윽!”
“연무장에서 내 동생과 사람들을 지켜줘서 고맙다.”
사실 콜린과 할아버지, 연무장에 있던 영지민들은 오비스에게 죽었어야 했지만, 포메라가 언데드로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포메라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녀석은 민망한지 턱뼈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록스의 모든 사람들이 네게 고마워하고 있을 거다. 네가 원한다면...”
“...충분하오.”
“음?”
“나는 원래 인간들에게 해악을 끼치다 아이자크에게 영혼이 잡아먹힐 운명이었소. 이렇게 사람들을 구해냈고, 주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걸로 충분하오.”
포메라는 그 말을 남기고 바로 사라져버렸다.
“고맙다.”
**
내가 몸을 회복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왕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복구를 하는 록스에 부담이 되는 것 같아서 먼저 가이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지원을 와준 사람들은 따로 가이린에 불러서 감사인사를 전하기로 했다.
“꼭 이리 빨리 가야 하느냐?”
“못 볼 것도 아니고 금방 볼 텐데 뭘 그러십니까.”
아버지가 마탑의 앞까지 따라와서 아쉬움에 잠긴 한숨을 뱉으셨다.
“조만간 파티를 열 테니, 그때 와주세요.”
“네가 파티를? 그래. 꼭 가야겠구나.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니. 하하!”
“열고 싶어서 열기보다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대접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너도 이제 영주다워지는구나. 좋은 변화야. 하하하!”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음?”
그의 손이 내 등에 닿은 채로 멈췄다. 아니, 그 옆의 아린도 멈췄다.
세상 자제가 멈춰버렸다.
화아악!
그 순간 라스가 죽었던 장소에서 초록색 빛이 떠올라 내손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전에 그리드나 슬로스가 죽었을 때와 색깔만 달랐지 같은 현상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빛이 나온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우우웅.
초록색 빛이 나온 곳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새까만 구슬이 나와서 내 반대편에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저건...”
산의 정산엔 그림자같이 흐릿한 형태의 무언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