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대비 (3) (176/241)

대비 (3)

탁. 

에블린 앞으로 검은 야행복에 복면을 쓴 남자가 내려섰다. 복면을 벗자, 짧은 백발에 고집 센 노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오셨군요. 마피언.” 

마피언은 복면을 던지고, 에블린의 맞은편 의자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록스 후작가의 정찰은 끝나셨나요?” 

“후작가의 기사단, 병사들, 후작의 능력, 침입 경로는 모두 파악했소. 당신의 말대로더군. 뒤가 바로 바닷가라 그런지 마법적 대비도 하지 않았어.” 

“잘 됐네요.” 

“다만 약간의 문제가 생겼소.” 

반복적으로 흔들던 에블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 순간 공기 자체가 멈춰버린 느낌이다. 

“문제라뇨?” 

“내 은신을 발견한 자가 있소. 그것도 두 명이나.” 

“...그게 무슨 소리죠?” 

에블린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마피언의 은신 능력은 마스터가 아닌 이상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 후작가에서 두 명이나 발견했다고 하니, 그녀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마 록스 후작에게...” 

“아니오. 이틀 전 늙은 정원사가 나를 알아차리고 접근하더군. 그에게선 오러도,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건만 정말 이상한 일이었소. 죽일까 하다가 문제가 생길 거 같아서 도망쳤소.” 

“아, 가끔 있죠. 감각 자체가 특별하게 좋은 인간들이. 그런 경운가 보군요.” 

“어제는 반대편으로 담을 넘어서 다시 침입 경로와 인원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마피언이 말을 끊자, 에블린은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내 뒤에서 갑자기 단검이 나타났소.” 

“단검이요?” 

“단검은 공중에 떠있었지만 마스터가 들고 있는 수준정도로 화려하고 예리한 움직임을 보였소.” 

“유렌 록스!” 

컁! 

에블린 앞에 있던 찻잔이 저절로 깨지고 테이블이 덜덜 떨렸다. 그녀의 감정변화로 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맞소. 나도 유렌 록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강하게 반항하지 않고 놈의 칼을 맞아주었소.” 

마피언은 암살로 마스터에 오른 자다. 유렌의 단검에서 버티려면 버틸 수 있었지만 마법사나 적당한 수준의 암살자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당한 것이다. 

“분신도 바로 지웠으니, 평범한 마법사나 암살자로 생각할 거요.” 

“정말 잘 하셨어요.” 

“분신이 사라졌을 때 놈의 표정이 보였소. 내 의도대로 평범한 염탄꾼 정도로 생각했을 거요.” 

마피언의 말에 에블린이 빙긋 웃었다. 다만 둘의 생각과는 다르게 유렌은 마피언이란 걸 알아차렸고, 모든 것을 알고 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왜 록스에 왔을까요?” 

“다음날 알아보니, 록스 후작을 보러왔다더군. 당신의 말대로 그는 후작을 잘 따르는 것 같소.” 

“후후...” 

에블린의 입술이 붉게 말려들어갔다. 그 섬뜩함에 마피언은 아주 잠시 등골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문제는 없네요. 계획대로 25일 후 중간 그믐달이 뜨는 날 록스를 공격하겠어요.” 

“알겠소.” 

“은자께서는 록스 후작과 그 핏줄들을 처리해주세요. 최대한 잔인하게, 최대한 고통스럽게. 유렌 록스의 눈이 뒤집어 지도록.” 

“맡기시오. 시체만 봐도 구역질이 나오게 만들어주겠소.” 

마피언의 눈에 붉은 실선이 나왔다가 들어갔다. 그는 앞에 있는 차를 한 번에 들이키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유렌 록스...” 

에블린은 이를 갈며 유렌의 이름을 되뇌었다. 지금까지 그 인간과 만나서 일이 제대로 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일 마저 막힌다면 자질의심까지 받을 거다. 

“그 놈이 록스에 있었다는 게 왠지 걸려.” 

탁.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에블린은 마음을 정했는지 자리에서 차분하게 일어났다. 

“혹시 모르니, 대비정도는 해놔도 나쁠 게 없겠지. 

** 

“무슨 과일 맛이...” 

세계수 열매의 맛은 내가 좋아하는 과일들을 합친 맛이었다. 수박과 배의 시원한 맛에 오렌지의 상큼한 맛, 포도의 달달한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상할 거 같지만 그 조화가 완벽해서 혀가 꼬이고, 비비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딱. 

맛있게 열매를 흡입하던 중에 무언가 딱딱한 게 씹혔다. 꺼내 보니 초록색 씨였다. 

“다른 사람들은 씨가 없었는데...” 

아린이나 크라이드가 열매를 먹었을 때 이런 씨는 보이지 않았다. 열매에 씨가 없을 수는 없으니, 그들은 삼켰고 내 열매는 씨가 커서 걸린 모양이다. 

“씹어 먹어야 하나...” 

먹어야 할지, 버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한 번 눈을 켜보았다. 

[세계수 선물의 씨앗] 

오러나 마나가 모두 소모되었을 때 씨앗을 씹어 먹는다면 단 번에 모든 마나와 오러를 회복한다. 다만 그 충전된 마나를 전부 소모하면 3일간 마나나 오러를 사용 할 수 없다. 

“미친! 이런 개사기 템이 있었어?” 

전혀 알지 못했던 소모품이다. 

내력이 바닥일 때 이걸 먹는다면 모든 내력을 단숨에 회복하는 말도 안 되는 성능의 아이템이다.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3일 뿐이니, 성능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부작용이다. 특히나 이번 사건처럼 미친 물량의 몬스터들이 몰아친다면 이 씨앗은 목숨 하나를 추가로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조건 보관.” 

씨앗을 아주 소중하게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남은 열매를 먹어치운 뒤 늦지 않게 만독자전신기를 운용했다. 

고오오오. 

열매를 전부 먹어치우자, 잠잠하던 마나가 요동친다. 열매에 담겨 있던 마나들이 활어처럼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마나의 양이 아니야. 

아린이나 브리카, 크라이드가 먹었던 열매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가 흘러넘쳤다. 열매의 크기는 2배지만 속에 담긴 마나는 거의 3배가 넘어가고 있었다. 

한 1.5배정도의 마나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한참 벗어난 양이다. 7성 중반에 오른 만독자전신기로도 벅찰 정도다. 

무림에서 대환단, 만년하수오, 만년설삼 같은 영약들을 동시에 먹어도 이 정도 양은 모으지 못할 거다. 

열매의 마나들을 전부 흡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조만간 터질 습격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에 집중해서 심법 그 자체에 빠져들었다. 

** 

“후우...” 

모든 것을 잊고 심법에 집중한 덕에 열매의 마나를 모조리 내 단전에 쑤셔 넣을 수 있었다. 정말 상상이상의 양이었다. 

만독자전신기의 단계가 올라가진 않았지만 성취도가 극적으로 올랐고 내공의 양이 크게 상승했다. 지금 내력의 양이라면 만천화우도 펼칠 수 있을 거다. 

정말 큰 선물을 준 아르시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있을 엘루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 끝났소?” 

“그래.” 

구석에서 들린 딱딱 거리는 음성에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하아, 역시 주인은 재미없소. 놀라질 않는군.” 

내게 말을 건 사람은 투명한 상태로 대기하던 포메라였다. 처음부터 느낀 건 아니고, 무아지경에서 돌아와서 구석에 녀석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이라도 놀라줄까? 으헉!” 

“하, 됐소. 누워서 절 받기도 아니고.” 

포메라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니 투명화를 해제하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주인이 주문했던 호출용 목걸이가 완성되었소.” 

포메라가 여러 보석이 달린 목걸이 11개를 내밀었다. 

“작동은 어떻게 하는 거지?” 

“가운데 있는 붉은 목걸이 있지 않소. 그걸 주인이 차고 있다가 모두를 부르길 원하는 순간에 깨면 다른 10개의 목걸이도 동시에 깨지게 될 거요.” 

“그 다음엔?” 

“깨진 10개의 목걸이에선 주인의 목소리로 전투태세를 갖춘 뒤 빠르게 록스로 와달라고 전해질 거요.” 

“좋긴 하네. 근데 내 목소리를 어디서 구한 거냐?” 

“진짜 주인의 목소리는 아니요. 내 전공이 뭔지 잊었소? 환상을 심어주는 건 어렵지 않소.” 

포메라가 자신감이 푹푹 담긴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저 녀석의 어설픈 표정에서 그 뜻을 읽어낼 정도가 되었다. 

“너 보이스 피싱도 할 수 있겠다.” 

“보이스 피 뭐요?” 

“아니야. 울음인형 설치는 끝났어?” 

“후우, 끝났소. 그 민감한 정원사 영감탱이 때문에 정말 힘들었소. 무슨 마스터가 그러고 사는 건지 참. 진짜 피곤한 스타일이었소.” 

“그 분 내 할아버지야.” 

“...할아버님이 참 정정하신 것 같소. 암, 그 나이면 쌩쌩 뛰어다녀야지. 참 멋진 할아버지를 두셨소. 하하하!” 

포메라는 자신을 괴롭힌 마스터가 내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번개 같은 태세전환을 했다. 피식 웃으며 등에 몸을 기댔다. 

“나, 난 돌아가 보겠소. 인형을 다루려면 주인의 방에 있어야 하니까.” 

“잠깐만.” 

포메라는 내가 뭐라 할지 몰라 긴장한 눈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해줄 일이 하나 더 있어.” 

“무엇이오?” 

“네가 만든 목걸이들을 내가 말하는 사람에게 전해줘. 최대한 조심해서 당사자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내가 해야하는 이유가 있소?” 

“세피로스 놈들이 내 근처나, 내 지인 주변에 있을 확률이 높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네가 해주면 좋겠어.” 

“음, 확실히...” 

포메라가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역시 여기 저기 세피로스의 첩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번 대비의 핵심은 세피로스 놈들이 우리가 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몰라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우리 쪽 피해는 제로로 만들고 적의 피해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포메라에게 목걸이를 전해줘야 할 사람들의 목록을 전해주었다. 

“알겠소. 사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으니. 어? 서, 성녀가 있소! 성녀는...” 

“성녀님에겐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시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 그럼 다행이오. 딱히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포메라가 이레아 앞에 가는 순간 뚝배기가 깨질 테니, 그녀에겐 아린을 보내기로 했다. 

“목걸이를 전해줄 때 그믐달이 뜨는 시기에 위험한 일이 벌어질 테니,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고 전해줘. 정보가 빠져나갈 수 있으니 같이 올 부하들에겐 훈련이라고 말해두고.” 

“걱정 마시오. 근데 내가 없으면 울음인형은 효과가 없는데...” 

“5일 정도는 침입이 없을 테니, 걱정 마. 네가 욕했던 쌩쌩한 마스터도 있고.” 

“주, 주인의 할아버지를 욕할 생각은...” 

“알아. 인마.” 

“그, 그럼 난 가보겠소.” 

포메라는 민망함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나만 더 나도 할 일이 있거든. 워프 좀 시켜줘.” 

** 

찌르르. 

숲을 맴도는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귀를 때린다. 오랜만에 온 이 숲은 예전보다 더욱 우거져 있었다. 

포메라의 워프를 받아 도착한 곳은 예전 아우쿠솔의 미궁을 가기 위해 열쇠를 찾으러 왔던 필로세 숲이다. 이 안쪽에 이번 습격에 도움이 될 물건이 있다. 

사실 도움이라기보다는 대비용으로 챙기려는 거지만. 

탁. 

옆에 있는 느티나무에 오른 뒤 곧바로 숲의 중앙을 향해 뛰었다. 뇌인신법을 극성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예전에 왔을 때에 비해 이동속도가 몇 배는 빨라졌다. 

그 짧은 시간동안 정말 말도 성장을 한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숲에 몬스터들이 많았지만, 나위 위로 이동하다보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채로 깊은 필로세 숲에 진입했다. 

“오우거, 트롤, 베어울프. 깊은 숲이군.” 

깊은 숲의 몬스터들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지만, 상대하기 귀찮아서 칼의 검은쥐를 사용해서 조용히 움직였다. 저런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찾았다.”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참을 이동하자 숲 가운데에 하늘까지 솟아오른 나무가 보였다. 이 나무가 깊은 숲의 중심부다. 전엔 이곳에서 서쪽으로 이동했지만, 이번엔 동쪽으로 가야한다. 

“이제 제대로 움직여 볼까?” 

이동속도는 빨라졌지만, 숲이 워낙에 넓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려서 이동속도를 높였다. 

숲이 파노라마처럼 보일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동쪽 끝에 도착하자, 넓고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샤아아. 

호수 위론 옅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어 신성한 장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 봐라. 생수네. 생수.” 

호수의 물은 바닥의 돌과 모래가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외국의 투명한 바다보다도 맑고 시원해 보인다. 

“근데 왜 아무도 없지.” 

원래 이 호수는 몬스터들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 많은 몬스터가 나타나는데 어떤 몬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긴 한데, 뭐 상관없나.” 

아무도 없는 게 꺼림칙했지만, 뭐가 나오든 상관없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호수로 향했다. 

차악. 

신발을 벗고 호수에 발을 담갔다. 천천히 수영을 해서 호수의 중심으로 잠수했다. 

빛? 

호수의 중앙 바닥에 하얗게 새어나오는 빛이 보인다. 저곳에 내가 찾는 물건이 있는 건 맞지만 아래에 박혀 있어 빛이 나와선 안 된다. 

분명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생각에 기감을 넓게 펼쳤다. 

스스윽. 

빛이 나오는 땅을 파헤치자, 반투명한 회색의 구슬이 나왔다. 바로 이 구슬을 위해 아까운 하루를 바쳐 이 숲에 온 것이다. 

촤아악! 

구슬을 챙긴 뒤 호수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커다랗고 길다란 무언가가 호수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왼쪽! 

호수로 들어온 놈은 엄청난 속도로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놈을 보기위해 집중 할 필요도 없었다. 그 길고 거대한 몸통이 바로 보이고 있었으니까. 

저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