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대비 (2) (175/241)

대비 (2)

“록스를 습격한다는 건가?” 

“맞아요.” 

“흐음...” 

에블린 앞에 앉아있는 야성적인 외모의 남자가 거칠게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가 지킬 영지는 가이린인데, 왜 록스를 치는 거지?” 

“유렌 록스가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록스 후작가의 인간들 말인가?” 

“네. 그중에서도 그의 아비인 윌링턴 록스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에블린이 길고 얇은 손가락으로 찻잔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에블린의 손가락으로 시선을 보냈다. 

“유일하게 따르는 사람이 살해당하고, 자신의 고향이 처참하게 망가지면 그 놈의 표정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아요?” 

에블린의 입가에 맺힌 미소에서 살벌한 살기가 새어나왔다. 

“이건 경고에요. 계속 우리를 방해하면 록스 뿐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것을 지워버리겠다는 마지막 경고.” 

“네 계획이 많이 망가져서 뿔이 났나?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는군. 에블린. 크큭.” 

남자의 말에 에블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유렌에 극도의 혐오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만일 눈 앞에 있었다면 참지 못하고 바로 공격했을 거다. 

“록스를 아예 지워버릴 생각이겠지?” 

“물론이죠.” 

“그럼 유렌 록스가 미쳐 날뛰지 않을까?” 

“그게 제가 바라는 거예요. 그는 가이린의 영주이니, 지킬 게 수없이 많아요. 흥분해서 미쳐 날뛰는 인간을 잡는 건 너무도 쉽죠.”

“크크크크! 너같이 지독한 여자에게 찍히다니 유렌 록스도 불쌍하군. 좋다. 알아서 하도록.” 

“고마워요. 카이젠.” 

“아, 잠깐.” 

에블린은 카이젠의 확답을 듣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려는 그녀를 카이젠이 불러 세웠다. 

“네?” 

“이번엔 누구를 쓸 거지?” 

“만검과 권패, 은자를 보낼 생각이에요.” 

“브리더의 괴수들과 몬스터들도 쓸 텐데 세 명이나 보내?” 

“록스를 빠르고 완벽하게 지울 생각이니까요.” 

“그 검귀 녀석은 실컷 가르쳐 놓고 안 쓸 건가?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었을 텐데?” 

남자가 말하는 검귀는 유렌이 찾던 라시드의 칭호다. 

“맞아요. 소드 마스터도 됐고, 만검의 경지도 넘었죠.” 

“그럼 그녀석도 보내. 그 애송이도 제대로 된 학살에도 익숙해져야해. 최소 천명은 죽여 봐야 인간의 거죽을 벗을 수 있다.” 

에블린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예전에 라시드가 유렌 록스에게 두통을 느꼈다는 말이 생각나 조금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볼게요.” 

** 

“네가 본 장소는 록스 후작령이야.” 

“아!” 

마이라가 신음을 삼켰고, 옆에서 있던 아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 역시 마이라가 말해준 현수막이 뭔지 알아차린 거다. 

“로, 록스라고요?” 

“마이라. 혹시 달의 형태를 봤어?” 

“아, 네! 확실히 봤어요. 그믐달이었어요.” 

“그믐달...” 

어제 밤에 뜬 달은 초승달이었다. 초승달이 그믐달이 됐다면 대략 23일에서 25일 정도는 지났다는 소리다. 

“잘했어! 네 덕에 습격이 올 날짜를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아.” 

내 이름이 걸린 현수막은 한 달 후에 떼기로 약속 되어 있었다. 그게 찢어져 있다고 했으니 습격은 현수막을 떼기 전인 한 달 안쪽에 있을 거다. 

즉, 습격은 초승달이 그믐달이 되는 23일에서 현수막을 떼기 전인 28일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정말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 

“몬스터는 어떤 놈들이 있었지?” 

“아...” 

마이라가 이름을 생각해내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에게 몬스터 도감을 줘서 공부를 시켰기 때문에 대부분의 몬스터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다. 

“일단 볼라크, 고블린, 오크, 트롤, 오우거, 샤크라이, 피아르...” 

마이라가 말해주는 몬스터들의 이름과 숫자를 들을수록 등 뒤로 냉기가 스미고 있었다. 나 혼자 싸운다면 별거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을 지키며 싸우기엔 상당히 까다로운 놈들이다. 

“하아...” 

내가 브리더에게 들었던 괴물들은 나오지도 않은 상태인데 육지 몬스터에 바다 몬스터, 비행 몬스터까지 아주 난리가 났다. 

에블린은 록스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제대로 미친년이다. 이제 자신들을 숨긴다는 생각을 아예 안하고 있다. 

“그리고...” 

“또 있어?” 

“네. 좀 특이한데 언데드 몬스터들도 나타났어요.” 

“특이한 언데드?” 

세피로스에서 데려올 흑마법사는 더 이상 없을 텐데 이상한 일이다. 

설마 그녀석인가? 

“혹시 그 언데드들 몬스터들과 싸우지 않았어?” 

해변가에서 살고 있는 포메라가 록스를 지키기 위해 언데드를 소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요. 그런데 해골들끼리도 서로 머리를 부수며 싸웠어요.” 

“언데드들끼리 싸웠다고?” 

“네. 해변 쪽에서 올라온 언데드들이 몬스터랑, 성문을 부수고 넘어온 언데드들에게 달라붙었어요. 꼭 사람들을 지키는 것처럼.” 

해변에서 올라온 언데드이 몬스터들과 싸웠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 녀석들은 포메라의 소환수들이다. 

다만 벽을 넘어서 왔다는 언데드는 전혀 모르겠다. 내가 알지 못하는 흑마법사가 나타났다는 소리다. 이건 큰 변수가 될 수도 있다. 

“벽을 넘어서 왔다는 몬스터들은?” 

“그 주셨던 도감에 나온 언데드들이 전부 있었어요.” 

“혹시 칼에서 불이 나오는 해골도 있었어?” 

“칼에서 불나오는 해골... 아! 데스 나이트 말씀하시는 거죠? 있었어요. 숫자는 모르겠지만 그 해골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왔어요.” 

“하...” 

그럼 허접한 수준의 흑마법사도 아니다. 데스나이트를 다루니, 최소 6서클 마스터이상이다. 

“대체 누굴 데려온 거냐.” 

아이자크는 절대 아니다. 놈이 그냥 죽었다면 모를까, 나와 포메라에게 자신의 힘을 주고 갔으니 녀석일 수가 없다. 

“다른 놈들은?” 

“제가 모르는 괴물들도 있었어요. 일단 머리에 뿔이 4개가 달린 산양이 보였는데, 덩치가 굉장히 컸어요. 거의 트롤이랑 비슷한 정도였고...” 

“바리안...” 

브리더가 세뇌시킨 몬스터다. 아니, 몬스터라기보다는 기린처럼 수호자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다. 

마이라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몬스터들의 외형을 말해주었다. 아린은 옆에서 모든 것을 받아 적었다. 

“혹시 마을을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어? 

“이, 있었어요. 그...” 

“괜찮아. 말해줘.” 

“록스의 기사분들이 마을을 지키려고 뛰어나올 때 어떤 남자가 검을 꺼내들었는데 그 검이 어, 엄청 커졌어요.” 

“이런 거야?” 

마이라에게 오러 블레이드를 보여줬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아니라, 칼에 다른 칼들이 엉겨 붙어서 점점 커졌어요. 수십 개의 칼이 뭉쳐서 하나의 큰 칼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너무 기괴하고 징그러워서...” 

“만검...” 

세피로스의 검 콜렉터 만검 위빅. 그 정신 나간 놈도 록스로 오나보다. 

“그 남자의 검에 기사들이 전부...흑...”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만검 역시 마스터를 넘은 검사라 일반 기사들론 절대 상대할 수 없다. 

“또 사람을 공격하는 놈은 없었어?” 

“네. 제가 본 건 그 악마 같은 사람뿐이었어요.” 

“음...” 

그렇다면 록스를 습격하는 놈들은 은자와 만검이고, 추가로 권패까지 왔을 거 같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마이라의 예지에 보이지 않은 게 그 증거다. 후작가 내부를 공격하는 권패나 은자에게 막혀서 나오지 못하셨을 거다. 

마스터 급 인간 세 명에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와 특수 몬스터들에 정체 모를 흑마법사까지. 하나 같이 쉬운 놈들이 없다. 

“일 한 번 더럽게 복잡하네.” 

** 

마이라의 예언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아린이 적어놓은 내용을 보면 한 숨만 나온다. 

“록스를 몰살시키려고 아주 작정을 했네. 망할 년.” 

에블린의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 이건 내게 주는 경고다. 다음은 가이린이니,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 

이래서 내가 내 정체를 최대한 늦게 들키려고 한 거다. 지켜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목을 내줄 수는 없지.” 

“뻭!” 

빽빽이가 책상을 두드리며 동의했다. 그 작은 눈망울에 분노가 타오른다. 

“맞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빽!”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 포메라를 소환했다. 

“주인. 난 지금 굉장히 바쁘오.” 

집무실엔 나와 빽빽이밖에 없건만 포메라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조용히 말하는 거냐?” 

“아! 그 소드 마스터 영감을 피하느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줄어들었소. 어찌나 감각이 좋은지 마력 통로만 설치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오. 에휴...” 

포메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미리 할아버지에게 말해둘 걸 그랬다. 

“일이 심각해졌어.” 

“뭐가 말이오?” 

“마이라가 예지를 했어. 내용은...” 

포메라에게 마이라의 예지를 모두 말해주었다. 녀석은 일의 심각성을 알고 말 한마디 없이 모든 내용을 경청했다. 

“해변가에서 올라왔다는 언데드는 네 소환수들이 맞겠지?” 

“리빙아머가 나왔다고 했으니 맞을 거요. 아니, 확실하오. 근데 벽을 부쉈다는 언데드 혹시 아이자크 아니오?” 

“절대 아니야. 분명 다른 놈이다.” 

“음...” 

아이자크는 죽었기 때문에 절대 아니다. 한 놈 생각나긴 하지만 그 놈의 트레이드 마크가 없어서 아닌 것 같다. 

“네가 준비해 줄게 있어.” 

“준비 해줄 거라면...” 

“아티펙트를 만들어줘.” 

“주인. 아티펙트가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포메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하는 건 기린에게 준 고급 아티펙트가 아니다. 

“어려운 게 아니야. 신호정도만 주면 돼.” 

“신호?” 

“그래. 내가 신호를 보내면 깨지거나 메시지가 전해지는 아티펙트.”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을 거요. 몇 개나 필요하오?” 

“음...” 

같이 싸워달라고 부탁할만한 사람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부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실망한만한 사람들을. 

첫 번째는 당연히 일리아와 마르쿠스가의 기사들이다. 그녀의 성격상 부르지 않는다면 아주 난리가 날 거다. 

두 번째는 성녀 이레아다. 잘만 된다면 마스터인 후라켄 공작까지 올 수도 있다. 

세 번째는 현재 사신 역할을 하며 바쁘게 지내는 로디엔이다. 그녀는 정령왕의 계약자니 정말 큰 도움이 될 거다. 

네 번째는 얼마 전에 만나고 왔던 지크 사이온이다. 거기다 마스터인 파에스 사이온도 내게 부탁을 하라고 했으니, 도움을 요청하면 둘 다 와줄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일왕자나 로페르 공장처럼 내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일단 많이 만드는 게 좋을 거 같다. 

“한 열 개 정도 만들어줘. 눈에 띄기 쉽게 목걸이나, 팔찌로 만들어주고. 그 안에 넣을 메시지는 ‘전투 준비를 갖춰서 최대한 빠르게 록스로 와주세요.’로 해주고.” 

“알겠소.” 

“부탁할게.” 

“어려운 아티펙트는 아니지만, 숫자가 많아서 조금 시간이 걸릴 거요.” 

포메라는 아티펙트 용 보석을 받은 뒤 록스로 돌아갔다. 인형설치도 해야 해서 바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고마웠다. 

“자, 그럼 다음은...” 

다음에 준비할 일을 생각하려 할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실례합니다.” 

들어온 사람은 기라녹스였다. 녀석은 이틀 만에 완전히 다른 열의가 가득 담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죄송하지만 스승님께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천판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 만들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거 같습니다. 스승님과 함께 연구를 하면 그 시간을 훨씬 단축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음...” 

당천위가 어려운 일이라고 했기 때문에 기라녹스에게서 쓸 만한 천판이 나오려면 반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다. 

그를 성장시키기 위해 시간을 주려 한 건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테스테인의 도움을 받아서 대충이나마 천판을 완성시키는 게 나을 거 같다. 

“좋아. 허락할게.” 

“감사합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고 하시면...” 

“나도 장인들에게 고집이 있다는 건 알지만, 이건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진지한 말에 기라녹스가 자세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씀이든 듣겠습니다.” 

“오늘부터 23일 안에 돌아와 줘.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인 상태의 천판이라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들고 와야 해.”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정말 중요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 있어. 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네 스승이 반대해도 무조건 22일안에 천판을 들고 돌아와. 부탁할게.” 

기라녹스는 내게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마을의 모든 드워프를 굴려서라도 22일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고맙다.” 

** 

마탑의 프리미엄 서비스를 받아서 기라녹스를 드워프 마을이 있는 피메라 산의 코앞까지 보내주었다. 지부장에게 부탁을 해놨으니 복귀도 빠르게 할 수 있을 거다. 

기라녹스를 보내주고 난 뒤 업무를 모두 제쳐두고 개인 수련실에 들어왔다. 지금은 일을 할 때가 아니다. 

“하, 이제 내 차례네.” 

마법 주머니에서 큼지막하고 청량한 향기가 풍겨지는 과일을 꺼냈다. 

“아껴 두려했는데 어쩔 수 없지.” 

아르시아가 주었던 대형 세계수의 열매. 그 안의 순수한 마나를 흡수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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