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마스터
앞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저택 안에서 일을 하거나, 저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왜 여기 계신거지?
정원사 일을 하고 계시는 작은 할아버지, 폴레인 록스가 정원사 복장 그대로 한쪽에 서 계셨다.
난감한 표정을 하고 계시는 걸 보니, 내가 온 것을 전혀 모르고 계셨다. 우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끼게 된 상황 같았다.
“일단 들어가자.”
후작은 내 시선을 따라서 할아버지를 보고선 우리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자 작은 할아버지가 정원 쪽으로 돌아가시는 게 보였다.
“뭔 바람이 분 게냐?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다니.”
“집에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오랜만에 얼굴이나 뵈려고 왔죠.”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하하하!”
후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카이나와 카록스의가 흠칫거렸다.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 생각도 못 했을 거다.
“큰 도움을 받고도 고맙단 말도 제대로 못하기도 했으니까요.”
“도움?”
“영지가 습격 받았을 때 기사들을 지원해주시고, 제가 쓰러져 있을 때도 직접 오셔서 작업자들을 지휘하시고 복구 작업을 도와주시지 않았습니까.”
“뭐 별 것도 아닌 거가지고.”
후작은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싱글벙글한 표정이 변하지 않는다.
“아린아. 유렌 녀석이 잘 해주느냐?”
후작은 나와 눈을 마주친 뒤 민망한 듯 갑자기 아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평생 모셔도 갚지 못할 만큼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후후”
아린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후작은 아린의 진심어린 대답을 듣고 뿌듯한 표정이 이어졌다.
“그럼 오랜만에 부자끼리 오붓한 대화나 할까?”
“오붓할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하하!”
난 후작의 집무실에 들어가 여러 가지 대화를 하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후작이 묻고 내가 대답하는 대화였는데, 그는 내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흥미롭게 들어주고,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조언을 해주었다.
후작과의 대화를 끝내고 내 방이 아니라, 저택의 밖으로 나갔다.
“분명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 같은데...”
작은 할아버지가 저택으로 올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의 숙소가 있는 정원의 외곽을 찾아갔다.
사악.
일반적인 정원사들과 전혀 다른 가위소리가 들렸다. 귀가 잘릴 것처럼 아리게 만드는 소리에 비해 그 사람의 존재감은 안개처럼 옅다.
후작가에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한 명 뿐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의 뒤로 가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러느냐.”
“여기 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허허, 그렇긴 하다만.”
할아버지는 정겨운 웃음을 지으며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는 잠시 날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구나. 제국, 아니 대륙 전체를 뒤져도 너만큼 빨리 성장한 사람은 없을 게야. 무슨 괴물을 보고 있는 거 같구나.”
“과찬이십니다.”
“내가 네게 잘 보일게 뭐라고 띄워주겠느냐. 후후.”
할아버지는 정원가위를 사다리에 끼워놓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의 분위기도 좀 변한 거 같다. 존재감이 굉장히 옅은 느낌이다.
“할아버지도 더 강해지신 거 같습니다. 아니, 더 정도가 아니라...”
“흐음, 그것도 알아볼 정도라니... 정말 못 당하겠군.”
할아버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예전에도 강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수준자체가 달라졌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폴레인 록스]
[특성: 쾌검lv5, 오러변화lv5, 검명(劍鳴), 검절(劍絶)]
[호감도: 74(강한 호감) ]
[현재 기분: 진심으로 감탄하는 중.]
검절이라고?
새로운 특성이 생긴 것도 대단한데, 레벨이 없는 특성이 생겼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다.
“네게 내 정체를 들킨 이후에 내 존재감을 더욱 지우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또 들킬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지. 하지만 반대로 내 존재감이 점점 더 커지는 걸 느꼈단다.”
존재감을 지우려 했지만 존재감이 커진다는 말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네 동생들에게도 정체가 드러날 뻔 했으니까. 후후.”
“네?”
“네 동생들도 꽤나 강해졌더구나. 둘째 녀석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 적도 있었다.”
심마인가...
그는 심마에 빠졌던 거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잘 되지 않는 순간이 오는데 그것을 마음이 마에 빠졌다 하여 심마라 부른다. 자칫 잘 못하면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아이가 성장한 것도 있겠지만 내 문제가 더욱 컸다. 많은 고민을 하다가 정체를 들키면 들키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마음 편하게 먹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이제 거뭇해진 하늘을 올려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길이 열리더구나. 20년, 아니 거의 30년 동안 내 앞을 막고 있던 벽이 뚫렸다. 정답은 거짓된 자유가 아니라, 진실 된 자유였다. ”
할아버지가 허리춤에 달고 있는 정원 손질용 검을 꺼내들었다.
부우웅.
“오러 블레이드...”
나무 가지를 자르는 작은 검에서 마스터의 상징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올랐다.
“그렇게 바라고, 그렇게 노력할 땐 열리지 않았는데, 정원 일에만 집중하니 이제야 내게 문을 열어주더구나.”
“마스터에 오르신 걸 축하드립니다!”
할아버지가 강해졌다는 건 확실히 티가 났지만, 설마 마스터에 오를 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 고맙구나.”
“마스터가 없는 왕국도 있는데, 록스에만 마스터가 2명이 됐네요.”
“허허, 나도 내가 마스터에 오를 줄은 전혀 몰랐다.
폴레인 록스까지 마스터가 되었으니, 크라시스엔 마스터가 3명이 되어버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아까 저택 앞에 계셨던 이유가 마스터가 되신 걸 전하러 가시던 길이었군요.”
이제야 할아버지가 저택 앞에 계셨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니다. 난 너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내 능력을 밝히 생각이 없다. 네 아비에게도 말이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나이에 마스터에 오른 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걸 떠들고 다니겠느냐. 난 정원 일을 계속하며 정원사로 죽을 생각이다.”
“마스터입니다! 크라시스 전체가 칭송 할 겁니다!”
“유렌. 정원일은 참 좋단다. 햇빛도, 바람도, 귀찮게 구는 벌레들도 나쁘지 않아. 예전이 속죄하는 마음이었지만, 이젠 정원사가 내 진정한 삶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단호한 말과 표정을 보니,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다. 내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너 같이 젊은 녀석들이 활약해야지. 난 수십 년간 내 앞을 가로막은 벽을 넘은 것으로 만족한다. 지금 최고의 기분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고맙구나. 허허. 역시 너에게 말하길 잘했어.”
할아버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오러 블레이드를 보여 준 건 나를 믿기 때문이었다. 내 욕심으로 그를 배신 할 수는 없었다.
록스를 지키는 수호신이 더욱 강해진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 저택엔 왜 가셨던 겁니까? 그쪽 길로는 다니시지 않지 않습니까.”
“네 아비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보여줬던 모습 중 가장 진지했다.
“어떤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어젯밤에 누군가가 가문의 담을 넘었다.”
“음...”
현재 록스의 명성은 최고를 달리고 있다. 내 이름이 하늘까지 솟아올랐고, 동생들도 잘나가고 있으니 염탐 같은 건 당연한 일이다.
영주 성에도 나를 만나기 위해 수백 명이 대낮에 찾아오고, 수십 명이 밤에 담을 넘는다.
“요즘 들어 흔한 일이 아닌가요? 록스의 이름이 높아져서...”
“맞아. 흔하지. 네가 마스터에 오른 이후 록스의 정보를 알고 싶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은 경비에게 걸리지. 다만...”
할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이며 담벼락 쪽을 노려보았다.
“어제 들어온 놈은 나도 눈치 채기 힘들 정도였다. 경비는 당연히 눈치 채지 못했고, 내 숙소 옆으로 지나가는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할 정도였어. 소리와 기척이 조금만 작았어도 벌레가 지나갔다고 생각했을 거다.”
마스터에 오르면 체내의 오러가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나며 감각이 몇 배로 상승하게 된다. 거기다 할아버지의 특성인 검명은 더욱 소리에 민감한 특성이다. 그것을 거의 뚫을 정도였다는 건 보통 놈이 아니라는 소리다.
“놓치신 겁니까?”
“쫓으려 했지만 내 소리를 듣고 다시 밖으로 나가더구나. 검을 맞대보지 않아서 무력은 모르겠지만, 이동하는 방법과 기척을 죽이는 기술만큼은 마스터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마스터 급의 은신과 이동기술.
몇 명 생각나는 놈들이 있지만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있는 가이린이 아니라, 록스 본가를 향하려는 놈이라니 감이 잡히지 않는다.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군요.”
“그래. 그래서 네 아비에게 이야기를 하러 찾아가다가 갑자기 네가 나타나서 꼼짝도 못하게 끼게 됐지.”
“하하! 어쩐지 너무 어색하게 계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전에는 사람이 많을 텐데 어떻게 만나시려고 하신 겁니까?”
“네 아비를 부르는 신호가 있단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따로 만나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뭔 소리냐. 네가 와서 정말 반갑고 고맙다. 멍청한 내 대신에 록스의 이름을 세상에 퍼뜨리지 않았느냐. 요즘 난 네 활약을 듣는 낙으로 산단다.”
할아버지는 따스한 눈빛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의 손에서 푸근함이 전해졌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부탁이 있다.”
“네. 어떤 것이라도.”
“침입자에 대한 이야기는 네가 전해주거라. 또 만나러 가기 귀찮구나.”
할아버지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아버지와는 따로 만날 일이 있을 테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록스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네가 부탁 할 필요 없는 일이야. 내 검을 상대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록스에 닿을 수 없다.”
할아버지는 정원사의 복장을 하고 계셨지만, 저런 광오한 말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그의 원래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말이네요.”
**
할아버지를 만나고 온 뒤 겉으로만 저녁식사를 마치고 후작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오늘 그렇게 얘기하고도 또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따로 보자고 했느냐? 너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어렸을 땐 쫓아다니지도 않더니.”
“못 본 새에 농담이 많이 느셨네요.”
“허, 이제 마음 아픈 소리도 하는구나.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왔느냐. 돈은 안 빌려준다.”
“돈은 넘치니 걱정마시구요. 제가 작은 할아버지를 아는 건 알고 계시죠?”
“음...”
후작이 침음성을 흘리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래. 그분께 들었다. 넌 참 신기한 녀석이야.”
“우연히 알게 된 겁니다.”
“나도 그분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 편하게 사실 수 있는 분인데 본인이 만족하시니. 어쩔 수가 없지.”
“제가 드릴말씀은 그런 게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말씀해주셨던 침입자에 대한 이야기를 후작에게 전했다.
“음, 그분이 갑자기 오셔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겨우 알아챌 수준이면 경비병들의 수를 늘려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안정 될 때까지. 불침번을 서는 기사들의 수를 늘려야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하마.”
후작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문이 있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턱수염을 쓸었다.
“이상하군. 그런 실력자가 뭘 주워 뭘 먹겠다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둑이나 정보를 얻으려온 자라면 오히려 괜찮겠지만, 암살자라면 위험합니다.”
“맞다. 한동안 경비를 서는 병사와 기사의 수를 늘려서 경계를 강화하마. 다른 사람들도 주의를 시키고 경계마법도 설치해야겠어.”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법 주머니에서 대형 마나석 3개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이게 뭐냐?”
“용돈 같은 겁니다.”
“요, 용돈?”
“원래 자식이 장성하면 부모에게 효도 한다고 용돈을 주지 않습니까. 돈이 아니라 물건이지만 비슷하다 생각하십시오. 아버지는 돈이 많으시니 돈 있어도 구하기 힘든 걸로 가져왔습니다.”
후작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의 도움에 대한 보상으로 준다면 받지 않을 게 뻔해서 용돈을 준다고 하며 마나석을 가져 온 거다.
“하하하!”
후작도 내 생각을 눈치를 챘는지 뿌듯함이 담긴 얼굴로 마나석을 쓰다듬었다.
“고맙다. 2년 전만 해도 너에게 이런 물건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
후작은 목이 막히는 듯 말을 잠시 멈추고 땅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 같아 다시 그를 불렀다.
“아버지.”
“응?”
“영지에 걸려 있던 현수막 같은 거 있지 않습니까.”
“봤구나! 멋지지 않느냐?”
후작은 그 현수막이 좋다고 생각하는 지 박수까지 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정말 별로다.
“떼 주세요.”
“응?”
“떼요.”
“어...”
**
현수막은 한 달 후에 떼기로 결정됐다. 난 내일 당장 떼기를 원했고, 후작은 일 년 동안 걸기를 원했다.
몇 번의 다툼 후에 한 달 후 현수막을 떼기로 합의를 보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대로네.”
갑자기 찾아왔음에도 방은 내가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익숙한 베개 냄새에 잠이 솔솔 올 거 같았다.
탁.
수마에 몸을 맡기려 할 때 누군가 급하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익숙하고 빠른 것을 보니 아린이다.
“유렌님.”
“들어와.”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문을 연 아린은 평소 모습과 달리 얼굴이 붉어서 다급해보였다.
“아직 안 잤으니 괜찮아. 무슨 일이지?”
“가이린에서 긴급 메시지가 왔습니다.”
“뭐?”
아린의 다음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바로 몸을 일으켰다.
“마이라님이 급히 전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십니다.”
마이라가 긴급히 부를만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