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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록스로 (172/241)

록스로

“기다리던 만천화우가 뜨긴 떴는데...” 

만천화우가 개방되었다는 메시지가 떴지만 현재 내 수준으로는 사용 할 수 없었다. 당천위의 말대로 내공이 부족하고 다른 조건도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임에서 좋은 아이템을 먹었지만 레벨 제한 때문에 끼지 못하는 것처럼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번엔 숙제가 좀 많네.” 

내공의 질과 양의 상승은 당연히 해야 하고, 연위결 수준도 올려야하며, 강기 역시 꾸준히 다뤄야한다. 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도 연위결과 만독자전신기의 수준이 올라간 건 도움이 되겠어.” 

당천위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만천화우를 맞았을 뿐인데, 정신이 들고나니 만독자전신기와 연위결의 성취가 올라갔다. 

그 외에도 정신이나 몸이 가볍고 상쾌하여 굉장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아그네스.” 

-왜? 

“너 혹시 이거 만들 수 있어?” 

-뭔데? 내가 만들지 못하는 건... 

자신감 있게 말하던 아그네스는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천판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이, 이게 뭐야... 

“할 수 있겠어?” 

아그네스는 일반적인 무기라면 어떤 것이라도 변할 수 있지만 천판은 못할 거다. 하나의 암기가 아니라, 천개의 암기를 합쳐놓은 암기이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하나라면 어떤 무기나 방어구도 될 수 있지만 나뉘어져 있는 건 할 수 없어. 

“알겠어. 이건 어쩔 수 없겠지.” 

-다만... 

아그네스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약간의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언젠가는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언젠가?” 

-그래. 내가 불꽃을 담을 수 있게 됐듯이 다른 능력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렇긴 하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아이템을 얻고 천판에만 쓸 수 있다는 제한을 건다면 아그네스로 천판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알겠어.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자.” 

-응 

“얼마나 잤을 라나...” 

개인 연무장은 창문이 없기 때문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해가 하늘의 중심을 넘어간 것을 보니 오후 쯤 됐나보다. 

-너 하루하고도 반나절은 잤어. 맨날 안 자던 놈이 그렇게 자버리니까. 죽은 줄 알았네. 

“그래? 그럼 그 녀석에게 가도 괜찮겠네.” 

일어나서 처음으로 갈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만천화우를 위한 암기 천판을 만들어줄 녀석에게. 

쩡! 

쩌엉! 

연무장에서 조금 떨어진 공방 근처에 가자 벌써부터 쇳소리와 망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뜨끈한 열기도 풍겨 나온다. 

쩌어엉! 

가장 안쪽에 있는 기라녹스의 공방을 찾아 들어갔다. 

“후욱!” 

쩌엉! 

기라녹스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쇠막대기를 같은 강도, 같은 위치로 내려치고 있었다. 소리조차 일정하게 들릴 정도다. 기사로 따지면 아무리 낮게 봐도 최상급의 기사수준이다. 

쩌어엉! 

집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녀석을 잠시 기다렸다. 

“어?” 

기라녹스는 두드린 쇠를 용광로에 집어넣다가 나를 쳐다보곤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유렌님!” 

“병사들이 쓸 검인가? 잘 되가?” 

“아하하. 글쎄요.” 

기라녹스는 옆에 떨어진 쇠를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왜?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그게... 약간 슬럼프에 빠졌다고 해야 할까요. 제대로 만들고는 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어렵고 복잡한 걸 만들고 싶다는 건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장인들은 가끔 이럴 때가 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겁니다.” 

“그럼 내가 잘 왔네. 네 슬럼프를 해결해 줄 방법이 있거든.” 

“방법이요?” 

기라녹스는 호기심 반, 기대감 반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았다. 

“보여줄게.” 

기라녹스의 머리에 손가락을 올리고 영전을 운용했다. 내가 그에게 보여주는 건 당연히 천판이다. 

우웅. 

머릿속에 그려진 천판을 영전의 힘으로 기라녹스의 뇌리에 새겨주었다. 

“이, 이게 뭐죠? 

기라녹스는 자신의 머릿속에 갑자기 나타난 천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 했다. 녀석을 잡아 준 뒤 계속해서 천판을 보여주었다. 

“잘 봐. 평범한 물건이 아니니까..” 

“음, 철판인가요? 어? 어어...” 

가볍게 쳐다보던 기라녹스는 천판을 자세히 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고, 입을 쩍 벌렸다. 

“천판이라는 거다.” 

“처, 천판...” 

“이게 어떻게 사용 되는 지 보여줄게.” 

“아...” 

기라녹스의 머릿속에서 천판이 분열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본 녀석은 감탄과 희열이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윽...” 

천판의 사용방법까지 보여주고, 기라녹스를 놓아주자, 녀석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정신 차려.” 

“아, 네...” 

“제대로 봤지?” 

“네. 봤습니다!” 

기라녹스는 여전히 꿈을 꾸는 표정이다. 충격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천개가 넘는 암기가 모여서 하나의 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가장 놀라운 건 그 암기들이 전부 다른 형태라는 거죠.” 

“잘 봤네.” 

“누가 그걸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장인입니다. 저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라녹스는 자신을 낮춰 말하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작아지지는 않았다. 

“만들기 힘들 거 같아?”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해보고 싶습니다. 아니, 해내겠습니다.” 

기라녹스는 떨어진 망치를 쥐어잡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물론 내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내가 너 말고 누구에게 맡기겠냐. 오늘부터 모든 작업에 빠지고, 천판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어차피 네가 없어도 공방은 잘 돌아가잖아.” 

“알겠습니다!” 

“천판의 형태들은 머릿속에 다 각인 됐지?” 

“네.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이제 마법도 배우신 겁니까?” 

“뭐, 비슷하지.” 

영전은 내공을 사용하는 기술이지만, 설명하기 복잡해서 그냥 마법이라고 해버렸다. 

“정말 대단하네요. 마스터에 마법에...” 

“괜한 소리는 됐고, 재료나 돈은 얼마나 써도 좋으니, 연습해봐.” 

“알겠습니다.” 

“철로도 만들어야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이걸 만들었던, 이빨로 만들어야 하니까. 연습 열심히 해둬야 한다.” 

기라녹스에게 귀왕살을 보여주었다. 

내가 신살수의 이빨 반쪽을 놔둔 이유가 바로 만천화우 때문이었다. 천판을 철로 만들게 된다면 기라녹스에게 신살수의 이빨을 줘서 그걸로 천판을 만들게 할 거다. 

“저, 정말이십니까?” 

“거짓말을 왜 하겠어.” 

“꼭, 꼭! 만들어내겠습니다.” 

기라녹스는 장인의 기질을 타고 났는지, 어려운 일에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처음에 약간 피곤해보였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래. 믿겠다.” 

“네!” 

기라녹스의 공방을 나온 뒤 집무실에 가서 페루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영지에 랙커드 지부 있지?” 

“네. 남쪽에 있는 밤나무라는 술집입니다.” 

“그쪽에 의뢰를 넣어. 최근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 지역을 알아봐달라고.” 

“이상 현상이요?” 

“그래. 평소와 다른 일이 생긴 곳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세피로스의 습격 전에 작더라도 분명 무슨 전조가 있을 거다. 에블린이 움직이기 전에 최소한 지역 몇 군데를 추려놔야 한다. 

“그리고 그 정보 요청을 우리 쪽에서 했다는 것도 모르게 움직여.” 

“네. 몇 바퀴 돌려서 의뢰를 넣겠습니다.” 

지금의 에블린이라면 분명 내 쪽에 사람을 두고, 랙커드에도 부하를 놔뒀을 거다. 어설프게 정보가 빠져나가게 할 순 없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가면서 아린 좀 불러줘.” 

“알겠습니다.” 

페루를 보내고 몇 가지 업무를 처리 하고 있으니, 아린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바쁜 일 없지?” 

서명한 서류를 쌓아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딱히 없습니다.” 

“그럼 오랜만에 집에 가자. 

“집이라고 하시면...” 

“당연히 록스지. 아버지가 널 데려가지 않으면 뭐라 할 거 같거든.” 

**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있는 해풍과 목소리는 크지만 순박한 주민들까지 록스는 내가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 것도 변 한 게 없어보였다. 

“응?” 

마탑에서 나와 후작가로 향할 때 못 보던 게 하나 있었다. 

“뭐, 뭐야. 저거!” 

마을 중앙에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위로 현수막 같은 큼지막한 천이 걸려있었고, 그곳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록스의 자랑! 유렌 록스 대륙 최연소 마스터에 오르다!] 

“아!” 

“음...” 

아린은 현수막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하고 있다. 민망해 하는 나와 완전히 다른 반응이다. 

마탑에 의뢰를 했는지, 천은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뒤집히지 않고 어디서도 볼 수 있게 글씨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쳐다보고 있으니 글씨 색도 변하고 있다. 

이걸 누가 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답이 나온다. 

“하아, 아버지...” 

아들이 마스터에 올랐으니, 기쁜 건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하다니. 내가 연락을 하지 않는 걸 이런 식으로 푸셨나보다. 

“멋지네요. 후작님이 하셨겠죠.” 

“저, 저게 멋지다고?” 

“멋지지 않나요?” 

아린은 진심인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데리고 후작가로 이동했다. 

정문의 병사들은 오랜만에 나를 봐서 그런지 기겁을 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것 같지?” 

“저도 그렇습니다. 시간상으로는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는데 몇 년은 된 거 같네요.” 

아린도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록스를 떠난 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몇 년 만에 온 것 같았다. 

“어?” 

저택으로 가고 있을 때 앞에서 달려오다시피 빠른 걸음을 걷는 사람이 보였다. 

“유렌!” 

“아버지?” 

“말 좀 하고 오지 그랬냐!” 

저택에서 기다릴 거라 생각한 후작은 나를 보자마자 빠른 걸음에서 달리오고 있었다. 

“음...” 

앞으로 더욱 많은 일이 있을 거 같아서 약간이나마 시간이 있을 때 록스에 들린 건데 저렇게 달려올 정도라니, 진즉에 좀 올 걸 그랬다. 

“하하하! 이게 얼마만이냐!” 

후작은 오자마자 나를 껴안고, 등을 두드렸다. 그가 정말 기분 좋을 때 하는 행동이다. 

“사실 그렇게 오래 되지는...” 

“네가 쓰러졌을 때 가이린에서 봤으니, 록스에선 정말 오랜만이지. 이 정 없는 녀석아!” 

“아, 그렇긴 하죠.” 

“집나가니 편해 죽겠지? 다른 곳은 뻔질나게 돌아다니더니, 집엔 아예 올 생각을 안 해.” 

자취를 시작한 아들이 명절에 왔을 때 할 만한 말들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가나 부모의 생각은 비슷한 거 같다. 

“죄송합니다.” 

“하하.” 

말은 그리 했지만 후작의 기분은 나쁘지 않아보였다. 아니, 반대로 굉장히 들뜬 상태였다. 

“아린. 네 활약도 들었단다. 정말 잘 했어. 멋졌다.” 

“감사합니다.” 

후작은 아린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린을 데려와서 기초 교육을 시킨 것이 그였기 때문에 더욱 뿌듯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흡사 친딸을 보는 다정한 눈빛이다. 

“이러지 말고 들어가자.” 

“알아서 들어 갈 텐데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하하하!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여지더구나.” 

후작은 피식 웃으며 내 옆에서 붙어서 후작가의 바뀐 부분을 소개해 주었다. 변화는 별로 없어보였지만 너무 좋아하는 게 느껴져서 기분 좋게 그의 말을 들으며 맞장구 쳐주었다. 

“네가 갑자기 오는 바람에 저택에 있거나 근처에 있는 사람만 나왔다. 쯧. 환영회를 성대하게 하고 싶었는데.” 

“정말 괜찮아요.” 

후작의 말대로 저택 앞에 하인들과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동생들인 콜린과 라온 그리고 후작 부인 카이나와 기사단장 카록스까지 나와 있었다. 

“네 소식을 듣고 나서 네 동생들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있다. 특히 콜린은 널 따라잡겠다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고, 라온은 기사학교를 조기 졸업했지. 하하!” 

“잘 됐군요.” 

“네 덕이다. 특히 콜린은 자신의 재능에 취해서 조금 걱정했었는데 완전 다른 사람이 됐다. 정말 고맙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래요.” 

나를 노려보다 시피 쳐다보는 콜린의 눈을 보았다. 예전 콜린의 눈빛엔 거만함과 아집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빛에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콜린이 날 따라잡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잊지 않고 노력하고 있었나보다. 

눈이 마주치자 콜린과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 뒤에 모인 기사와 하인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성공해서 고향집에 돌아온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오랜만이네요. 마스터에 올라 후작이 되신 걸 축하드려요.” 

저택 앞에 있던 카이나가 한 발 앞으로 나와서 살짝 미소 지었다. 속마음이야 정반대겠지만 겉으로는 내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카록스 단장도 억지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보탰다. 

“두 분 덕분입니다.” 

카이나와 카록스를 한 번씩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음!” 

“어?” 

“아...” 

내 대답에 후작이 감탄했다는 표정이 되었고, 카이나와 카록스가 오히려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둘은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만 내 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카이나와 카록스가 페루를 시켜 치레인 스프에 독을 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다. 사천당가가 개방 되지 않아서 진즉에 죽었을 수도 있고, 기연만 찾아서 어설픈 경지에 오른 검사가 됐을 수도 있다. 

“후...” 

여러 가지 감정들을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 보였다. 

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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