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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만천화우 (171/241)
  • 만천화우

    툭.

    떨어지는 대나무 잎이 내 얼굴을 스쳤다.

    “대나무 잎이라...”

    몸을 일으켜서 앞을 보니, 언제가 본 적 있는 대나무 숲이 있었고, 검녹색 장포를 입은 남자의 등이 보였다.

    “왔군.”

    자신감이 담긴 나지막한 저음. 역시나 들어본 목소리다.

    “어쩌다 보니 또 왔네요.”

    “이제야 이곳에서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군. 늦었다고 해야 할까, 빨랐다고 해야 할까.”

    검녹색 장포의 남자, 천수암왕 당천위가 몸을 돌렸다.

    대나무 잎이 떨어지는 사이로 거친 기상을 담고, 고고함이 녹아있는 당천위의 얼굴이 보였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주변의 대기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도 제대로 들립니다. 시기는 적당하다고 해두죠.”

    “아니, 빠른 게 맞겠지. 내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하던 녀석이 이 짧은 시간동안 조화경에 오르다니. 감탄이 나오는군. 강해질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 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당천위가 놀람과 대견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칭찬을 듣자 그 어떤 때보다 감정이 격해졌다.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에게 칭찬을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다가오던 당천위는 내 앞에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편한 자세를 취하고서 피식 웃었다.

    “조화경으로 향하는 문은 단순한 운으로 절대 넘을 수 없다. 노력, 재능, 기연, 운, 제대로 된 시기까지 모든 것이 필요해. 운만으론 불가능하지.”

    당천위는 이제 반쯤 누워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여유로움이 그와 정말 잘 어울렸다.

    “과한 겸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자신을 가져라. 나도 네 나이엔 조화경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어.”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자 하려 한 것이 아니야. 조금 더 당당해지라는 뜻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당천위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잘난 덕분에 어린 나이에 조화경에 올랐습니다. 축하해주십시오.”

    당천위가 원하던 대로 당당하게 말을 해주었다.

    “뭐? 크하하하!”

    당천위가 드러누워서 큰 소리로 웃었다. 널찍한 공간이 그의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정말 중간이란 게 없는 놈이구나. 하지만 난 지금이 더 마음에 드는군. 그래. 축하한다. 하하하.”

    당천위는 내가 친 장난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피식 거렸다.

    “이곳엔 어떻게 다시 온 거냐?”

    당천위에게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호오, 요정의 풀이라, 그 때봤던 괴령도 그렇고 그 세계는 별 신기한 게 다 있구나.”

    “네. 별 요상한 게 다 있죠.”

    당천위는 이 세계가 궁금했는지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나도 생각을 정리하는 겸 그에게 판타지 세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곳에서 살면 재밌을 거 같은데? 특히 실제 용을 보고 싶군.”

    “중원에서 생각하는 용과는 상당히 다를 겁니다. 드래곤이라고 불리고 외형도 많이 다릅니다.”

    “생긴 게 다르면 어때. 용을 잡을 수 있는 게 어디냐. 꼭 한 번 싸워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면 내 대신 네가 가서 싸워봐라.”

    “...”

    이 사람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드래곤은 인간이 이기기 불가능 할 정도로 강하고 지혜롭다고 얘기 했는데 바로 사냥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당천위는 실제로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뭐라 말을 못 하겠다.

    “아! 알려주신 심법을 전해준 녀석이 있습니다.”

    “정말인가?”

    “네. 재능이 있고, 본인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벌써 2성에 올랐습니다. 조만간 3성에 오를 겁니다.”

    “그래...”

    페루의 무공을 전한 이야기를 하자, 당천위는 별 말없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침묵을 하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저 선이 이어지길 바라는 내 욕심일 뿐이었다. 정말 이어졌다 하니,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드는구나. 고맙다.”

    “아닙니다.”

    난 당천위의 사정을 알고 있다 보니, 반가우면서도 씁쓸해하는 그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당가에 대한 것, 무공, 내가 있는 세계, 무림, 나와 당천위의 관계에 대해서.

    뒷일을 계산하거나, 어떤 이득을 얻을지 생각하지 않고 말하다 보니, 머리와 속이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레아나 크라이드도 클로버를 먹고 깨어났을 때 굉장히 편해보였는데,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클로버의 진정한 효과 일지도 모르겠다.

    “수다는 떨 만큼 떨었지? 그럼 이제 수업을 시작해 볼까?”

    옆으로 누워있던 당천위가 천천히 일어났다.

    “네.”

    “그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 마음에 드는군. 전에 알려준 것들은 모두 익혔나?”

    말을 할 필요 없이. 당천위의 앞에서 연위결의 성취와 멸락을 보여주었다.

    “괜히 조화경에 오른 게 아니로군. 조금 부족하지만 시간을 생각해보면 훌륭하다. 더욱 갈고 닦도록.”

    “알겠습니다.”

    당천위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역시나 널 가르친 건 잘한 선택이었어.”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무공을 알려줄 일도 있었습니까?”

    “있긴 했지. 한참 전에...”

    당천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와 당천위의 만남에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는 거 같다.

    “너는 당문 무공의 대부분을 익혔다. 아직 익히지 못한 것들은 준비만 갖춰진다면 혼자서도 익힐 수 있을 거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그 자신감 좋다. 역시 배우면 느는군. 후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당천위에게 예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다.

    “말해봐.”

    “독은 알려주시지 않습니까?”

    “독이라...”

    당천위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민망한 듯 웃었다.

    “난 독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암기만 사용하거든.”

    “아...”

    “당가십독은 사용 할 수 있으니, 네게 독을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지금은 다시 오지 않을 귀한 기회이니, 다른 것을 알려주려 한다.”

    당천위의 말을 생각해보면 당가십독보다도 더 높은 단계에 있는 것을 알려준다는 뜻이다.

    그런 건 딱 하나 밖에 없다.

    “바로 사용 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미리 준비는 해놔야겠지.”

    “설마...”

    “습득을 위한 최소의 조건이 조화경인 극악의 무공이자, 당가 사상 최강의 무공인 만천화우를 배울 준비가 되었나?”

    “아...”

    손끝이 덜덜 떨리고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사천당가의 특성을 봤을 때부터 기대하고 바랐던 만천화우에 드디어 도달했다. 어떻게 보면 내게 꿈이나, 이상과도 같은 무공이 바로 만천화우다.

    “먼저 만천화우를 사용하려면 천판(天版)이라는 암기가 필요하다.”

    “천판...”

    “복잡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가 없으니, 직접 전해주마.”

    당천위는 앞으로 다가와서 내 이마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빛나더니 하나의 이미지가 내 뇌리에 각인 되었다.

    검은색 철판.

    하지만 단순한 철판이 아니다.

    수백, 아니, 거의 천개가 넘을 정도의 작은 조각들이 교차로 겹쳐서 뭉쳐있기 때문에 철판으로 보이는 것이다.

    “천판을 이루는 암기는 조금씩 형태가 다르다. 모두 같은 형태라면 방어가 쉽기 때문에 일부러 다르게 만드는 것이지. 천명의 검사가 공격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 그렇군요.”

    “천판을 만드는 것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노력이 들어간다. 좋은 장인들을 구해야 할 거다.”

    “좋은 장인은 이미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기라녹스 녀석이 이걸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드워프 마을을 가야할지도 모르겠다.

    “다 보았나?”

    “네. 제 머리에 확실히 각인되었습니다. 다만 저도 장인에게 전해야 할 텐데, 방금 제 머리에 천판을 보여주신 무공을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독자전신기를 이용한 기예인 영전(映電)이다. 어렵지 않으니, 바로 알려주마.”

    당천위는 만독자전신기를 운용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머릿속 이미지를 전하는 영전을 알려주었다.

    영전이 있으니 앞으로 기라녹스에게 원하는 물건을 알려줄 때 훨씬 편할 거 같다.

    “이제 만천화우의 운용을 알려주마.”

    “네!”

    “만천화우는 일단 발동되면 회피가 불가능하고 그 누구도 죽일 수 있는 극상승의 절기지만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로 내력 소모가 극심하다. 지금의 네 내력으론 한 번도 제대로 쓰지 못해.”

    “정말입니까?”

    내력만큼은 조화경의 초입이 아니라, 초중반쯤을 될 거라는 자신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내력으로도 한 번을 제대로 못쓴다는 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천개의 암기 하나하나에 어검과 강기의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내력이 적게 소모되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아...”

    당천위의 말대로다. 그런 미친 공격이라면 내력이 적게 소모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두 번째는 천판을 나누고 모든 암기에 강기를 두르는데 걸리는 소요시간이 길다는 점이다. 지금의 난 빠르게 해내지만, 처음 시도 할 땐 하루 종일 해도 성공자체를 하지 못했다.”

    당천위는 옛날 생각이 났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당연하겠지만 네가 만천화우를 운용하는 동안 적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대놓고 쓸 수 없으니, 언제 써야 할지 잘 생각해야 한다. 그 외에도 여러 단점이 있긴 하지만. 모든 단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도 있다.”

    당천위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천판을 꺼내들었다. 천판이 내게 이빨을 드러낸 것처럼 검게 빛났다.

    “만천화우가 일단 발동 되서 적에게 떨어진다면 그 자는 무조건 죽는다. 금강불괴? 청룡호신갑? 천마삼검? 무신? 예외는 없다. 설사 신이라고 해도 죽일 수 있다. 실제 자신이 신이라고 떠들던 놈도 내가 죽였고.”

    확신을 가진 단언.

    당천위는 만천화우에 완벽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조차 죽일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부터 네게 만천화우의 구결을 전해주마.”

    만천화우의 구결은 그 위력만큼이나 길었다. 이걸 외우면서 내력과 연위결을 동시에 운용해야 하다니, 보통 난이도가 아니다.

    여태 배웠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어려운 거 같다.

    “구결은 전부 외웠나?”

    “네.”

    능력강화 덕인지 기억력이 좋아져서 한 번 듣는 걸로 만천화우의 구결을 외울 수는 있었지만, 만천화우를 쓰는 것이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생각 만해도 어렵지?”

    “천판을 나누며 비수 하나하나에 검강을 두르고, 적의 움직임도 파악해 어검을 사용해야하다니. 장난 아니네요. 어렵다정도가 아닙니다.”

    “괜히 최고의 절기라 불리는 게 아니니까 당연한 거다. 쉽게 익히면 재미없잖아.”

    당천위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 내게 능청스러운 웃음을 보여주었다.

    “만천화우를 제대로 익힌다면 네가 고생의 값 이상을 가져다 줄 거다.”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 나이에 조화경까지 오른 놈이 왜 이리 자신감이 없어. 하루에 해내겠습니다. 이런 포부 없어?”

    “그건 만용이죠. 전 제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그래. 그래야지! 그럼 시작해 볼까?”

    당천위가 갑자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20m 정도 거리를 둔 후 멈춰 섰다.

    “목표로 사용할 대상이 없으니, 너로 하자.”

    “네?”

    “네가 현실에서 깨어날 시간이 가까워졌다. 만천화우가 어떻게 발동하고, 어떻게 운용되는 지 직접 느껴 보거라. 이건 최고의 기회야.”

    “아, 암왕님?”

    “걱정마라. 이곳은 네 정신공간과는 다른 곳이다. 여기서 죽어도 아무런 영향도 없을 거야. 아마도.”

    “아마도 라니! 잠시 만요!”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우우웅.

    당천위가 들고 있던 천판이 하늘로 떠올랐다. 천천히 움직이던 천판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만천화우의 높이는 네가 알아서 정할 수 있다. 지금은 4장(12m) 정도로 할까?”

    10m이상의 높이에서 멈춘 천판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탁.

    한 개에서 두 개, 두 개에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가 되어가며 순식간에 천개가 넘어갔다.

    지지지직!

    천판이 분열하는 시간은 당천위의 말대로 눈 한 번 깜빡할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깜빡하니 한 개의 천판이 천개의 암기가 되었고, 눈을 한 번 더 깜빡하니, 모든 암기에 강기가 둘러져 있었다.

    꿀꺽.

    정말이지 압도적 광경.

    나를 노리는 천개의 암기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절망뿐이었다.

    만천화우는 상대를 죽이기 전에, 상대의 마음을 먼저 죽이는 지독한 기술이었다.

    “조만간 또 보도록 하자. 그때까지 분열은 완성하도록.”

    당천위가 손을 내리자, 하늘을 수놓고 있던 천 송이의 흑화(黑花)가 내게 떨어졌다.

    **

    “허억!”

    눈을 뜨니, 검은 천장이 보인다.

    “끄응...”

    클로버를 먹고 기절했던 내 개인 연무장이다. 등과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쳤어...”

    당천위가 자신감 있게 신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완성된 만천화우는 인간이 막을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으...그건 절대 못 막아, 피할 수도 없고.”

    만천화우는 전부 다른 검술을 익힌 천명의 소드 마스터가 오러 블레이드를 켜고 동시에 달려드는 것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직접 맞으니, 확실히 체감은 되네.”

    당천위가 왜 내게 만천화우를 직접 겪어보라는지 이해가 되었다. 조금이지만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겪고 싶지는 않지만...”

    만천화우가 내려오는 섬뜩한 광경을 다시 생각해보고 있을 때 눈 앞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영전을 익히셨습니다.]

    [연위결의 성취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만독자전신기의 성취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천판(天版)이 해방 되었습니다.]

    [만천화우(滿天花雨)가 해방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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