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에스 사이온 (2)
“이렇게 자네와 대련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후후.”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파에스는 연무장에 마주보고 서 있었고, 연무장 주변은 사이온 후작가의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파에스 후작이 기사들의 발전을 위해 우리의 대련을 참관 할 수 있게 부탁했고 내가 받아들였다. 어차피 크라이드 불렀으니 상관없었다.
“유렌님. 또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크라이드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얼굴로 내게 대련용 장비를 가져다주었다. 녀석은 내가 무조건 이길 거라 믿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어. 빽빽아. 넌 크라이드에게 가있어.”
“빽!”
나무로 만들어진 단검들과 수련검을 허리에 차며 빽빽이를 떼어놓았다. 뒤를 보니, 파에스는 수련검 하나만 달랑 들고 있었다.
“크라이드. 좋은 공부가 될 테니,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전부 봐라.”
“알겠습니다.”
“빽!”
“그래. 이기고 오마.”
크라이드가 빽빽이를 데리고 뒤로 빠지는 것을 본 뒤 파에스가 기다리는 수련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자네. 후라켄 공작님께 수련을 받은 적이 있다던데 사실인가?”
“맞습니다. 며칠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기본기는 돈 주고도 못 배울 기예인데 기연을 얻었군.”
“맞습니다.”
파에스는 피식 웃더니 수련검을 한 번 휘두른 후 뒤로 물러났다. 나도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시작하지.”
“내기를 하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기?”
“네. 승자가 패자에게 소원을 말하는 내기.”
“흐음...”
“거창한 내기는 아닙니다. 대련의 흥을 띄우기 위한 정도니. 어렵다 싶으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아니, 좋네. 그 정도라면 거부 할 필요 없지. 자네 뭘 좀 아는군. 점점 마음에 들어.”
파에스는 피식 웃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안을 하나의 재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스윽.
내기에 대해서도 말했으니, 다리를 살짝 벌리고 수련용 단검을 꺼내들었다. 파에스도 수련검을 제대로 잡고 입가에 웃음기를 지웠다.
나와 파에스 사이에 있던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기류가 사라지고, 싸늘한 냉기가 불어왔다.
“후배 된 도리로 먼저 가겠습니다.”
“오게!”
샤아앙!
파에스의 무릎을 향해 단검을 날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쾅!
파에스가 검을 아래로 틀어 비수를 막았다. 수련검과 나무단검이 부딪쳤건만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튕겨나간 비수가 파에스의 뒤편으로 떨어졌다.
슈아앙!
비수를 하나 더 던지며 수련검을 뽑아들고 파에스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파에스는 몸을 옆으로 돌려서 비수를 회피하고 내 검을 막았다. 나무로 만든 수련검끼리 마주쳤다고 생각하기 힘든 굉음이 터진다.
“세상에...”
“어떻게 수련검으로 저런 소리가 나는 거야!”
“오러도 쓰지 않았는데, 저 위력이 어떻게...”
구경을 하던 기사들이 경악에 잠겼다. 그들의 상식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것이 바로 마스터의 경지다.
트드드득.
“검이 주무기가 아니라 들었는데, 제법 매섭군. 검술도 보통이 아니야.”
“맞습니다. 제 주무기는 검이 아니죠. 설마 피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검을 마주치고 있는 파에스에게 씩 웃어주며 연위결을 운용했다.
“뭐?”
파에스의 회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스쳐지나간 단검이 되돌아왔다. 단검이 노리는 것은 그의 등이었다.
“이 무슨!”
쾅!
단검이 돌아오는 것을 본 파에스가 경악을 하며 나를 밀어냈다.
캬앙!
파에스는 어이없다는 눈을 한 채 자신의 등을 노리는 단검을 튕겨냈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에 익힌 카인 왕국 검술을 사용해서 파에스를 공격했다.
“허, 신비로운 기술을 쓴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라니! 흥이 돋는군!”
파에스는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내 검을 막았다. 꼭 바위가 막고 있는 것처럼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이대로는 그의 검을 절대 뚫을 수 없다.
탁!
파에스가 밀어내는 힘을 이용해서 뒤로 물러난 뒤 양손에 네 개의 단검을 들었다.
사굉(四轟).
키이잉!
네 개의 단검은 각자 뛰어난 무인이 움직이는 것처럼 현묘한 변화를 사용하며 파에스의 양 팔과 양 다리를 노렸다.
빠지지직!?
뇌인신법의 뇌영을 사용해서 파에스의 뒤로 이동한 뒤 검술을 바꿨다. 날카롭기로 제일이라는 로벨 왕국의 검술이다.
“좋은 공격이다!”
화아아!
파에스는 큼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검에 붉은 오러를 감쌌다. 사이온 가의 자랑인 폭염의 오러다.
콰아아!?
날이 있는 진검에 비해 목검에 오러를 두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파에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화염의 오러를 씌운 뒤 네 개의 비수를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콰앙!
파에스가 검을 돌리기 전에 오러를 씌운 검으로 그의 명치를 찔렀다. 그는 아주 미세한 틈을 뚫어내고 내 검을 막아냈다.
키이잉!
서로의 검을 덮은 오러가 톱날처럼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이런 기분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아주 좋아!”
밀리는 와중에도 파에스는 즐거움을 가득 담은 미소를 머금었다. 마스터에 오른 이후 홀로 수련만 하거나 하수들과 대련만 했을 테니, 이 대련 자체가 굉장히 즐거운 모양이다.
쾅!
콰아앙1
역시나 마스터답게 파에스는 오러의 위력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흔들림 없고 무거운 검술에 내가 수세에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쾅!
“후우...”
파에스와 큰 충돌을 한 후 뒤로 물러났다. 비수 여섯 개를 왼손에 든 뒤 오른손에 수련검을 잡고 자세를 낮췄다.
“호오, 마지막인가?”
“간은 충분히 봤으니, 끝을 낼 때가 됐죠.”
“좋네. 오게!”
십이 비도를 여섯 개로 펼쳤다. 개수는 줄었지만 위력은 강해지고, 변화는 더욱 화려해졌다.
퍼버벙!
하지만 파에스는 내 단검들의 모든 변화를 파악한 뒤 단 두 번의 휘두름으로 여섯 개의 단검을 모조리 파괴해버렸다.
콰아앙!?
파에스가 단검을 부술 때 수련검에 오러를 가득 밀어 넣어서 내리쳤다. 서로의 오러가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미친 듯이 일렁거렸다.
“이대로라면 아까와 똑같네만?”
“아닐 겁니다.”
파캉!
난 일부러 수련검이 부러지게 만든 뒤 파에스를 향해 검을 날렸다.
“무, 무슨!”
내가 검을 던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는지, 파에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부러진 검을 쳐냈다. 난 그 순간 파에스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 전벽상권의 촌뢰인(寸雷刃)을 펼쳤다.
빠지지직!?
촌뢰인은 검을 휘두르는 불가능할 정도의 근접거리에서 주먹의 파동을 날리는 기술이다.
쿠궁!
괜히 마스터가 아닌 듯 파에스는 기묘한 각도로 검을 휘돌려 촌뢰인의 파동을 막아냈다. 하지만 예상대로였다.
역시 막는군.
파에스가 촌뢰인을 막을 것을 예상하고 하나의 준비를 더 해놨다.
스윽.
촌뢰인을 발동한 순간 연위결을 운용하여 맨 처음에 튕겨나가 파에스의 뒤에 떨어진 단검을 띄워 그의 목을 노렸다.
파에스는 몰랐겠지만, 그 단검은 이 순간을 위해 미리 뒤에 떨어뜨려 놓은 거다.
“아...”
촌뢰인을 튕겨내고 잠시 마음을 놓았던 파에스는 소리도 기세도 없이 뒤에서 날아온 단검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의 목을 그대로 내주었다.
툭.
자신의 목 뒤에 단검이 있음을 느낀 파에스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리고 양손을 들어올렸다.
“크크크...”
파에스는 나를 보고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크하하하하! 자네가 이겼네!”
파에스는 쩌렁쩌렁한 웃음을 터트리며 모두가 듣도록 자신의 패배를 말했다.
“마, 말도 안 돼...”
“후, 후작님이 졌다고?”
“후작님은 마스터가 되신지 이미 15년이 지났다고! 아무리 유렌 후작이 떠오른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일이...”
사이온 후작가의 기사들은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보고 넋이 나갔다. 경악해서 아예 말을 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유렌님! 믿고 있었습니다!”
크라이드는 땅이 울릴 정도로 신나게 뛰어왔다. 클로버를 먹고 버서커의 이성을 얻었을 때보다 더 좋아하고 있었다.
“빽!”
빽빽이는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빽빽거리며 날개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모두가 착각을 하고 있지만 이건 진정한 승부가 아니라, 서로의 기본기만 확인한 정도다.
파에스는 오러 블레이드와 마스터의 능력을 쓰지도 않았고 나 역시 강기를 쓰지 않았고, 연위결의 힘도 조절 했다.
다만 둘 다 최선을 다한다고 쳐도 파에스는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거 같다. 만일 죽여야 하는 적이라서 독을 사용한다면 훨씬 쉽게 이길 수 있고.
지금의 난 중급의 소드 마스터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는 상태였다.
“유렌 후작.”
“네.”
파에스는 패배했음에도 웃는 얼굴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하나만 묻지. 자네 처음에 던진 단검 말이야. 일부러 내 뒤로 튕겨지게 한 건가? 마지막에 나를 공격할 생각으로?”
“그렇습니다.”
“크크큭. 이거 못 당하겠어. 난 그 단검으로 내 속도와 힘을 파악하려는 줄 알았네. 그런데 자네는 한 수 앞을... 아니지, 한 세수 앞을 생각하고 있었군. 정말 대단했네!”
파에스는 정말 감탄했다는 듯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오랜만에 한 대련이 정말 즐거웠던 모양이다. 표정에서 현재의 기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 보았느냐?”
척!
파에스의 외침에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았습니다!”
“배울 점은 찾았나?”
“찾았습니다!”
기사들은 파에스의 질문에 목청이 찢어져라 함성을 질렀다.
“그럼 뭣 들 하는 거냐! 빨리 가서 수련을 해야지!”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거침없이 움직여서 자리를 잡고 수련을 시작하거나, 다른 사람을 잡고 대련에 대해 토론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 처음의 이야기를 해볼까?”
“네. 그래야죠.”
“크하하하! 그 당찬 모습도 마음에 드는군. 괜히 마스터가 아니야.”
파에스는 대련이후 나를 더욱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가 바라는 소원이 무엇인가?”
“사이온 후작가는 검에 관해서는 제일의 가문 중 하나라 들었습니다.”
“크크. 내가 자네에게 패했지만, 그 말은 자신하네. 물론 비슷한 가문이 좀 있지만.”
“사이온 후작가에 검술서를 모아놓은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을 보고 싶습니다.”
“음?”
생각보다 훨씬 쉬운 소원이라, 파에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카볼의 검술서를 보는 건 내게 중요한 일이지만 파에스에겐 별 일이 아닐 것이다. 바로 그 점을 노려 파에스와의 호감도를 쌓아 나중에 그의 도움도 받을 생각이다.
잘만 된다면 마스터 2명과 친분을 얻게 될 거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검술은 변(變)을 사용하다가 예(銳)로 바뀌어 날카로워 지더군. 소드 마스터의 검술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네.”
“과찬이십니다.”
“아니, 진심일세. 오랜만에 제대로 된 상대와 싸워서 즐거웠네. 검술서를 보여주는 건 그냥도 들어줄 수 있어. 다른 소원 없나?”
파에스는 나를 어떻게든 챙겨주려는지 검술서는 그냥 보여준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딱히 필요 없는 소원을 말하기보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좋을 거 같았다.
“정말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제 소원은 검술서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크크크. 지크.”
“예!”
“보아라. 유렌 후작은 이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과 방법을 아끼지 않는다. 다른 건 별 관심도 없지. 이런 점이 그를 저 나이에 마스터로 만들었을 거다. 그를 본받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지크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나를 본받으려 하고 있었다. 그의 초롱초롱한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소원은 아껴두는 걸로 하지.”
“정말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네. 가지. 서재로 안내해주겠네.”
“감사합니다.”
파에스는 서재를 안내해 주기 위해 앞장서서 걸어갔다.
“크라이드.”
“네.”
“여기서 쉬고 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크라이드를 연무장에 놔두고 파에스를 따라갔다. 그는 저택의 2층에 있는 서재 중 3번째 서재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여기가 검술서들을 모아놓은 서재일세. 우리 기사들도 허가만 받으면 볼 수 있는 곳이라. 자네에게 다른 소원을 말하라 한 거네.”
“그렇군요.”
검술서들만 모아놓았는데도 서재의 크기와 책장의 개수가 상당했다. 책이 너무 많아 내가 원하는 카볼의 책을 찾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 같았다.
“책이 좀 많군요.”
“모으다 보니 좀 많아졌네. 그래도 여기 있는 검술서나 무술서적들은 전부 한 번쯤은 읽어 볼만한 것들이네.”
“그럼 혹시 제게 추천해주실 만한 검술서가 있습니까?”
카볼의 검술서 정도라면 파에스도 눈여겨봤을 거란 생각에 일부러 물어보았다.
“물론이네. 자네에게 추천해주려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파에스는 곧바로 움직여서 몇 권의 책을 뽑아들고 나왔다.
“이 책이 최고라네!”
그가 가져온 책 중에 가장 위에 있는 책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책이었다.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