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파에스 사이온 (168/241)

파에스 사이온

서른 명이 넘는 기사들이 우리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가장 앞에 있는 오렌지색 머리카락의 사내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유, 유렌 록스?”

“지크 사이온. 오랜만이오.”

기사들은 사이온 후작가의 사람들이었고, 일행을 이끄는 남자는 석상 던전에서 만났던 지크 사이온이었다.

나를 만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지크는 벌레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지크와 달리, 나는 사이온 가의 기사들을 만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고요의 숲과 가장 가까운 영지는 사이온 후작가다. 이곳에서 난리가 난 것을 그들이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나 그리드의 윈드 브레스 덕에 거대한 마력이 터졌으니 사이온 가의 조사단이 무조건 이곳에 올 거라 생각했다.

“유렌 자작. 아니, 후작님. 왜 이곳에 계신 겁니까. 설마 이 난리를 친 게 당신이었습니까?”

예전과 달리 지크는 내게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후작위에 올라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그를 구해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럴 리가 없잖소.”

지크와 대화를 위해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챠아앙!

내가 다가가자 지크 뒤에 있던 기사들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기사는 30명인데 검을 뽑는 소리는 한 번만 들렸다. 모두 가볍게 볼 수 없는 뛰어난 자들이다.

챠앙!

“어디서 감히!”

크라이드가 검을 뽑은 뒤 날 보호하듯 앞을 막아섰다. 이레아도 기사들을 향해 양 주먹을 들어올렸다.

“이거 대접이 박하군.”

“모두 검을 집어넣어라!”

“단장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는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다. 믿어도 된다.”

“으음...”

기사들은 지크의 명령에 검을 집어넣었지만, 계속해서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너도 들어가. 크라이드.”

“넵!”

크라이드는 지크의 기사들과 달리 내 명령 한 번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지크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이레아님 괜찮습니다. 적이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이레아도 자세를 풀고 뒤로 물러났다.

“음?”

그녀를 보고 있던 지크는 한 번 더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레아의 정체를 알아차린 거 같다. 잠시 표정 관리를 하던 지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유렌 후작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 숲은 우리 사이온 세력권에 있는 땅이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야합니다.”

“이곳에 드라이어드와 님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 보고 싶어서 호기심에 찾아왔소. 숲을 구경하고 돌아가려던 순간 습격을 받았소. 그들은...”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려주었다. 물론 그리드와 브리더를 대신해서 강력한 마법사와 기사들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지크는 조금 의문이 담긴 표정을 지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다.

“솔직히 믿기 힘들지만, 증거가 앞에 있으니 거짓말이라고만 할 수도 없군요.”

지크는 난장판이 된 숲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브레스까지는 생각 못 하겠지만 8서클, 9서클 마법 여러 개가 작렬한 흔적정도는 되어보였다.

“검사들의 경우엔 예전에 던전에서 당신을 공격했던 자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소.”

지크에게 더 강한 믿음을 주기 위해 한 가지 거짓말을 추가 했다. 그를 공격했던 흑검과 브리더는 같은 세피로스 소속이니, 완전 거짓말만은 아니었지만.

“그런!”

지크가 피가 날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에게서 나오는 기세가 예전과 다르다. 죽을힘을 다해 단련을 해온 모양이다.

“유렌 후작님이 절 구했기 때문에 그놈들이 이제 후작님을 노리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죄송합니다.”

“미안해 할 필요 없소. 내 선택일 뿐이었으니.”

“그렇지만 일이 이렇게 되다니...”

지크는 내 대답에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습격당한 것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며 미안해하고 있었다.

“단장님. 그의 말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정도로 숲을 파헤칠 수 있는 건 고위 마법사 정도밖에 없어. 오러의 흔적도 있지만 이 거대한 흔적은 마법사의 것이다. 거기다 유렌 후작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다.”

지크는 윈드 브레스의 흔적을 마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소문에서 들었던 대로 지크는 내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뒤에 있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내 말을 전적으로 믿어주고 있었다.

“유렌님의 말을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저분을 일단 가문에 데리고 가야합니다.”

“음...”

날 가문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는지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렌님. 정말 죄송하지만, 일이 일이다 보니, 저희 사이온 후작가에...”

“갑시다.”

“응?”

사이온 후작가에 동행하자고 말하려던 지크가 당황해서 말을 멈췄다.

어차피 가야하는데, 알아서 불러주면 당연히 가줘야지.

사이온 가에는 카볼의 검술서가 있으니, 그곳에 가는 것은 내가 원하던 일이다.

지크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그곳에서 심문을 당할 리도 없고, 책을 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두 번째 제왕의 검 초식을 배우기 위해서 검술서를 얻을 수 있을 때 어떻게든 얻어야 한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렇소. 나도 영주다보니, 일이 어떻게 진행 되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소. 당신들이 불편하지 않게 사이온 후작가로 가겠소.”

“고맙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유렌님께 어떠한 피해도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지그는 감동한 얼굴로 뒤의 기사들을 쳐다봤다. 기사들 역시 내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놀란 표정이 눈에 보였다.

“어차피 갈 거 빨리 갑시다.”

지크와 기사들을 지나쳐 먼저 앞을 향했다.

“레펠. 기사 다섯을 데리고 숲을 좀 더 조사한 뒤에 복귀하도록.”

“알겠습니다.”

부하에게 지시를 내린 지크는 내 옆으로 따라왔다.

“유렌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저기 뒤에 계신 여성분. 이오칼의 성녀 이레아님이 아닙니까?”

“맞소.”

“그럼 두 분은...”

“이레아님도 이 숲에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을 뿐이오. 그녀는 후작령에서 먼저 돌려보내줬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지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좀 의심 할 법도 한데 내가 말하면 무조건 믿는다. 당황스러울 정도다.

“가문에 있으면서도 유렌님의 소문은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을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축하한다고 말하는 지크의 표정은 경쟁자의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내가 마스터에 오른 것을 축하하고 있었다.

“엘루나를 구해 크라시스와 동맹을 맺은 것도 들었습니다. 역사에 이름이 남을 일이었습니다.”

“민망하군. 그 정도는 아니오.”

지크는 내가 겪은 사건과 업적들을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렉커드에 의뢰를 해서 내 조사라도 한 것 같았다. 거기다 말이 끝이 없다.

“또 가이린에서 유렌님이 활약했던...”

**

사이온 후작령에 있는 마탑에 들려 이레아를 신성국으로 돌려보내고, 가이린에도 소식을 전한 뒤 후작가로 향했다.

“록스보다 훨씬 큰 거 같은데?”

“정말 그러네요. 좀 많이 크네요.”

제국의 후작가라 그런지, 사이온 후작가는 록스에 비해 1.5배는 넓어보였다.

크기도 크기지만 자유롭고 여유로운 록스의 분위기에 비해 병사와 기사들이 좀 더 묵직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유렌 후작님. 사이온 후작가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지크가 정문을 열며 예를 취해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내 정체를 알게 된 사이온가의 병사와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도 안 되는 존재를 보는 눈빛을 보내온다.

“상황이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감사하오.”

“사이온에 손님으로 오셨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제 이름을 걸고 절대 피해가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지크는 자신을 믿으라는 듯 부드러운 웃음을 보여줬다. 예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다.

“물론 당신을 믿소.”

“그 믿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솔직히 지크를 한 번 구해줬다고 그에게 이 정도로 신뢰를 받을 줄은 몰랐다.

원작에서 지크는 라시드와 라이벌 관계가 되어 경쟁을 하는데, 이곳의 지크는 날 거의 동경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크와 내가 원작보다 훨씬 큰 실력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이온 후작가...”

어떻게 보면 이곳은 적진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리 긴장 되지 않았다.

사이온 후작가는 제국에서도 유명한 검의 명가지만, 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스토리상 방해는 해도 악역이 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대결을 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한다.

“이곳이 사이온의 가주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지크는 날 후작이 있는 저택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는 우리를 데리고 저택 최상층에 있는 후작의 집무실로 바로 올라갔다.

“가주께서는 계신가?”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무실 문 앞에 있던 집사들이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문에 노크를 해서 우리가 온 것을 알렸다.

“들어오도록.”

문 안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는 우리를 한 번 씩 쳐다본 후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십시오.”

지크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화려한 외부와 달리 사이온 후작의 집무실은 책장과 책상, 벽에 걸려 있는 몇 자루의 검이 전부였다.

“왔군.”

지크와 마찬가지인 오렌지 빛 머리색, 눈에 검을 담고 있는 듯 예리한 눈빛을 발하는 중년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 남자가 폭검의 소드 마스터이자, 사이온 후작가의 주인인 파에스 사이온이다.

“크라시스 왕국의 유렌 록스가 파에스 사이온 후작님을 뵙습니다.”

먼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후작이지만, 제국과 왕국의 차이, 연장자에 대핸 예의였다.

“후작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네. 정말 축하하네. 파에스 사이온이라 하네.”

파에스가 말을 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분위기는 날카로워 한 마리 맹수가 노려보는 것 같았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운으로 마스터가 될 순 없지.”

파에스가 악수를 하자는 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착.

그의 손을 잡자마자 갑자기 거대한 압박이 밀려왔다. 가벼운 신경전이라 생각해 그의 압박을 가볍게 받아주었다.

쿠구구구구.

“으음...”

지크는 우리의 분위기를 느끼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큭! 크하하하!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파에스가 시원하게 웃더니 먼저 힘을 풀었다. 나도 힘을 풀고 손을 놓았다. 집무실을 채우던 날카로운 분위기와 압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아직도 나잇값을 못하고 있다네. 자네를 보자마자 호승심이 타올랐지 뭔가. 정말 미안하네. 어쨌든 다시 봐도 놀랍군.”

파에스가 보여주는 감정은 큰 놀라움과 당혹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육체에 꽉 조여진 기세. 자네가 내 눈 앞에 있지 않았다면 유렌 록스라는 존재를 믿지 못했을 거야.”

파에스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표정이다.

“사실 크라시스에 20대 마스터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헛소리라 생각했네. 아무리 천재라도 수련한 기간이 너무 짧다 생각했거든. 지크 녀석이 자네는 정말 마스터가 됐을 거라 해서 미쳤나 생각했는데, 머리가 굳은 건 나였던 모양이야.”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20대 초반에 마스터가 되는 것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 나도 많은 기연을 얻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후작님. 유렌 후작의 데리고 온 이유는...”

“그래. 사설은 나중에 하도록 하지. 유렌 후작. 고요의 숲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게나. 대략 듣긴 했지만 당사자에게 들어야겠어.”

“알겠습니다.”

지크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파에스에게 그대로 해주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듣기만 하다가 내 말이 끝난 뒤 고개를 들었다.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네. 고요의 숲에 간 이유가 뭔가? 드라이어드나 님프를 보러 갔다는 말은 믿기 어렵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기는 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말 해줄 수 있나?”

“소문을 듣고 갔습니다.”

“소문?”

“고요의 숲을 지키는 강력한 수호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한 번 겨뤄보고 싶어서 갔습니다.”

파에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크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자 지크가 바로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그런 말이 있기는 했습니다. 드래곤이 산다거나, 강한 수호자가 있다던가. 괴물이 있다던가. 모두 헛소문으로 드러났죠.”

“흐음,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파에스는 피식 웃고서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수호자는 찾지 못하고, 대신 습격을 받았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흐음...”

“뒷조사를 시킨 기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곳에서 거대한 바람 마법과 번개 마법의 흔적이 있었고, 강한 오러끼리 충돌한 흔적 외엔 별다른 게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람 마법에 오러라. 자네의 말대로군.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지크의 말을 들은 파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을 위해 이 먼 곳까지 찾아오다니, 정말 대단하군.”

“제 실력이 오른 이유에 많은 실전이 있었다는 생각에 강자를 찾아다녔을 뿐입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그의 미소에는 큰 감탄과 대견함이 담겨 있었다. 나라와 세력을 떠나 선배가 뒤따라오는 후배에게 보여줄 법한 뿌듯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유렌 후작.”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파에스가 입을 열었다.

“예.”

“대련 상대가 부족하면 말이야. 나랑 한 판 하는 게 어떤가? 같은 마스터의 위치이니 좋은 상대가 될 거 같은데?”

“아...”

“하하! 농담일세. 나라 문제가 있고, 상황이 상황이니, 대련을 하기는 어렵겠지. 그냥 헛소리라 생각하게.”

파에스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련을 하자고 했다가 농담이라고 말을 바꿨다. 실제로 하고 싶었겠지만 여러 가지가 걸렸을 거다.

“좋습니다.”

“어?”

내 말에 파에스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폭검의 마스터 파에스님과 대련을 할 수 있다면 제가 영광이죠. 꼭 하고 싶습니다.”

이쪽도 파에스와의 대련은 바라던 바였다.

대련이라기보다 그 이후에 원하는 것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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