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그리드 (2) (165/241)

그리드 (2)

‘드래곤 브레스를 정면으로 맞고 살아남은 인간이 있다!’ 라고 말하면 헛소리 하지 말라며 바로 주먹이 날아올 거다.

그만큼 브레스라는 능력은 드래곤이 사용하는 최강이자, 최흉의 능력이다.

어떤 드래곤의 브레스라도 한 방에 기사단이 전멸하고, 수백, 수천의 병력이 아무 것도 못하고 죽어 나가는데, 내가 홀로 브레스를 막아낸 것을 보고 그리드가 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짓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 아니... 이게 대체...”

그리드는 젊은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었지만, 브레스를 쓰고 나니 10년은 늙어보였다. 그만큼 저 놈도 부담스러운 공격을 한 것이다.

“아아...”

꽉 잠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레아는 손을 덜덜 떨며 내 등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그녀 역시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방금 엄청난 일이 일어난 건 알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는 것 같다.

“뭐, 뭐야...”

크라이드는 브레스의 영향으로 버서커 모드가 풀려버렸다. 멍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으어어...”

“허, 저놈도 살았군.”

내가 크라이드 쪽으로 이동해서 브레스를 막았기 때문에 웃기게도 브리더까지 살아남았다. 물론 놈의 거대한 몬스터들은 모조리 뜯겨 나갔지만.

뭐, 잘 됐네. 저놈에게 정보를 얻어야겠어.

몬스터가 없는 브리더는 팥 없는 찐빵이다. 크라이드에게 맡겨놓으면 알아서 처리 할 거다.

“크라이드.”

“예?”

“저 놈 제압해놔. 좀 패서 아는 거, 모르는 거 술술 불게.”

“알겠습니다.”

크라이드가 양 주먹을 맞부딪친 뒤 일어났다.

“유, 유렌님. 방금 그건 뭐죠?”

“윈드 브레스입니다.”

“아, 브레스군요. 네? 브, 브레스라구요?”

이레아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브레스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그럼 저, 저자는 드래곤...”

“그건 아닙니다.”

“브레스, 그것도 방금정도로 말도 안 되는 위력은 드래곤만 쓸 수 있는 게 아닌가요?”

“보통은 그렇지만 저놈은 드래곤이 아닙니다. 그 힘을 훔쳐온 도둑놈이죠.”

“쓰레기 같은 놈이군요!”

“정확합니다.”

나와 이레아의 말을 들은 그리드의 표정이 깨진 거울처럼 일그러졌다.

“고작...고작 그것을 막았다고 자만하는 거냐? 인간 따위가!”

“인간의 힘을 얻겠다고 깝죽거리던 놈도 있는데 뭐.”

“크으으.”

그리드의 등에 붙어있던 초록색 날개가 사라지고, 놈의 몸을 검은 오러가 덮기 시작했다.

화아아.

그리드의 몸을 덮고 남은 오러들을 놈의 손에 모여들어 검은 색의 검을 만들었다.

“저건...”

저 오러는 예전 검마라는 이명으로 불리던 소드 마스터 카젤란의 오러다. 놈이 이번에 사용할 재능은 카젤란의 검마와 그리드 본체의 육체 능력이다.

“인간을 하등하다 말하면서 인간의 힘을 훔치다니. 참 모순적이지 않아?”

“네놈이 어떻게...”

내가 그리드의 능력에 대해 말하자, 놈의 눈이 흔들렸다. 다만 검마에 대해서 설정만 해놨기 때문에 놈의 검술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찢어 죽여주마.”

“그 소리는 아까 브레스를 쓸 때도 했지. 기억 안나?”

“닥쳐!”

슈아아!

그리드가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놈과 나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강기 수준의 오러가 휘몰아쳤다. 저 상태의 그리드는 소드 마스터 중급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쩌저적!

내 뒤에 이레아가 있었기 때문에 귀왕살에 강기를 둘러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빠지지직!

뇌인신법을 사용해서 앞으로 향하며 그리드의 주변에 독을 뿌렸다. 고혈작에 해곤사창, 주광오산에 흔연적마까지 상위의 독을 가루 형태로 만들어 모조리 뿌렸다.

처음에 놈의 핵을 노렸던 십이 비도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방금뿌린 독과 연계돼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드의 힘과 체력은 약해질 거다.

쩌엉!

햐얀 강기를 두른 귀왕살과 그리드의 검은 오러가 부딪쳤다. 틈을 노리는 금화들을 연위결로 띄운 비수들로 막았다.

거기다 내겐 믿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준비가 끝나면 바로 그리드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다.

“무능한 인간이 감히!”

“할 말이 그것뿐이야?”

“크아아악!”

검마의 재능 덕분인지 그리드는 분노한 와중에도 정교하고 변화가 다양한 검술을 발휘했다. 검은색 오러와 현란한 검술 덕에 검이 여러 개로 보일 지경이었다.

뇌인신법으로 회피를 하지 않았다면 이미 몸에 구멍이 몇 개 났을 거다.

괜히 근접전을 한 건가.

조화경에 이르러 모든 능력이 상승해 근접 전투에 자신이 있었는데, 흑검의 위력과 정교함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수 있다 생각하느냐!”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리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화아아.

놈의 검을 튕겨내고 살짝 뒤로 몸을 뺐을 때 내 머리 위에서 은빛 반짝임이 생겨났다.

“유렌님. 이쪽은 저희에게 맡기세요!”

뒤에서 이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레아가 내게 축복을 걸어준 모양이다. 시선은 그리드에게 고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받는다고 뭔가가 변할 거라 생각하나?”

샤악!

그리드가 휘둘러오는 검을 귀왕살의 곡선에 흘리며 놈의 어깨에 비수를 박아 넣었다. 놈은 비수가 박힌 상태에서도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주변을 폭발시키는 검을 피하고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성 검인과 특성 천안이 카인 왕국 기본 검술을 인식했습니다.]

[카인 왕국 기본 검술 1장 홍화검을 각인합니다.]

[특성 천무지체로 인하여 홍화검을 재현하실 수 있습니다.]

이게 뭔 소리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방금 그리드가 사용한 검술이 카인 왕국의 기본 검술의 1장이고 그게 내게 각인되었다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리드, 혹은 검패가 카볼의 카인 왕국 검술서를 보고 검술을 익힌 것 일수도 있고, 내가 조화경에 올랐기 때문에 새로운 능력이 발휘 된 것 일수도 있다.

사실 둘 다 잘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서 이걸 얻게 되다니.

카볼의 검술서를 얻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아앙!

그리드의 공격을 유도하며 놈이 자유롭게 검술을 펼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는데 검술의 순서대로 봐야 각인이 되었다. 지금 1장이 각인됐기 때문에 2장을 봐야 각인이 되고, 3장을 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소리다.

[특성 검인과 특성 천안이 카인 왕국 기본 검술 2장 연매검을 각인합니다.]

[특성 천무지체로 인하여 연매검을 재현하실 수 있습니다.]

좋아.

그대로 그리드의 공격을 회피와 방어를 하며 카인 왕국 검술을 쓰도록 유도했다.

콰아앙!

“날 놀리는 거냐!”

15장까지 익힌 뒤 마지막 16장을 기다리고 있을 때 브레스의 여파로 힘을 모으던 그리드가 자신의 힘을 완전히 개방했다.

콰아아아!?

그리드의 오러 블레이드가 5m 가까이 커졌고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폭발을 만들어냈다. 브레스로 낭비했던 힘을 그사이에 회복한 거다.

쿠구구구구.

속도도 위력도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설프게 피하며 시간을 끌다간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

젠장! 딱 하나면 되는데

캬캬컁!

그리드에게서 거리를 벌린 뒤 연위결로 비수를 날리며 검술을 유도했지만 16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 그걸 써볼까.

카인 왕국 기본 검술은 화려하고 변화가 많은 검이다. 마지막 16장은 분명 그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부우웅.

주변에 떨어진 모든 비수들을 공중에 띄웠다. 그 모습을 본그리드가 이를 악물었다.

“그걸 쓰는 거냐!”

멸락을 아는 눈치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멸락!”

하늘을 수놓은 비수들이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소용없다!”

그리드의 검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인다. 뒤로, 앞으로, 옆으로 이동하며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렸다.

챠아아앙!

검게 물든 원 앞에서 수십 개의 비수들이 모조리 튕겨나갔다.

“크큭. 보기보다 싱겁기 그지없는 기술이군.”

“크크크.”

“음?”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나왔다.

멸락?

저건 멸락이 아니다. 놈의 검술을 유도하기 위해 연위결로 띄워놓은 비수를 그리드에게 떨어뜨렸을 뿐이다.

그 덕에 카인 왕국 기본검술 16장을 각인했다는 메시지가 떴고, 모든 것을 배웠다는 메시지까지 나타났다.

[카인 왕국 기본 검술을 모두 체득하셨습니다.]

[카인 왕국 기본 검술이 특성 검인에 예속 됩니다.]

[잊혀진 제왕의 검 6/18]

[특성 검인의 경험치가 15% 상승합니다.]

[검인에 기본 검술 6개가 모인 효과로 모든 신체능력이 2.5% 상승합니다.]

[기본 검술이 6개모인 효과로 잊혀진 제왕의 검의 첫 번째 초식 마왕(魔王)을 습득하셨습니다.]

마왕? 이건 뭐야...

18개를 모두 모아야 효과가 날줄 알았는데 1/3인 6개가 모이자 하나의 초식이 등장했다.

잊혀진 제왕검이기 때문일까 일단 내가 아는 제왕의 검과 초식 이름이 달랐다.

“그럼...”

휘잉.

메시지를 모두 읽었을 때 내가 미리 준비해놓은 덫이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좋아. 직접해보면 알겠지.

주머니에서 로벤의 롱소드를 꺼내들었다.

“이제 와서 검을 들어봐야 소용없다!”

콰아아아아!

그리드는 내 주변에 수백의 금화들을 띄운 채로 세상 전부를 부술 것 같은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지금이다! 기린!”

“무슨!”

콰르르릉!

기린을 포박한 금화에 바른 부식독이 효과를 발휘에 금화의 사슬을 녹아버렸고, 기린은 지금까지 숨죽인 채 벼락의 힘을 모으고 있었다.

쿠오오오.

내 지시에 기린은 자신이 모았던 모든 벼락을 그리드에게 쏟아 부었다.

콰아아아아!

“크아아아!”

그리드는 거대한 벼락의 기둥을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서 막아냈다. 저 벼락은 나도 막기 힘들 것 같은데 정말 지독한 놈이다.

챠앙!

겁집에서 검을 뽑은 뒤 놈의 앞으로 달렸다.

“크아악!”

그리드를 보호하기 위해 내 앞으로 금화들이 날아들었지만 무시했다. 루카스 때문에 나도 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수비에 낭비할 힘은 없다.

“으아아아! 가세요!”

“하아앗!”

뒤에 있던 크라이드와 이레아가 앞으로 나와 금화들을 처리해주었다. 난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고맙다 말한 뒤 그대로 달려 나갔다.

타악!

벼락을 막느라 전산에 핏줄이 선 놈을 향해 잊혀진 제왕의 검의 일 초식 마왕을 사용했다.

“마왕...”

화아악.

단전에 남아 있던 거의 모든 내력이 검으로 흘러들어갔다. 검에서 본적 없을 정도로 짙은 검은 빛이 일렁거렸다.

검을 든 손이 부르르 떨리고, 바닥을 밟은 바닥이 움푹 패여 들어간다.

휘두르는 검에 악마왕의 힘이 담겼다. 천하를 짓누르는 검압에 주변이 재가 된 것처럼 부서져나갔다.

“이, 이놈!”

벼락을 막던 그리드의 검이 나를 향했다. 어떤 것이 더 자신에게 위험한지 파악한 것이다.

마왕의 검이 검마의 검과 부딪칠 때 세상을 물들일 어둠이 피워 올랐다.

검마의 옅은 어둠은 마왕의 짙은 어둠에 씹어 먹혀 그 힘을 잃어버렸다.

퍼어억!

그리드의 검을 베어낸 마왕은 내 통제를 넘어 그리드의 상체를 찢어버리고 놈의 핵을 부숴버렸다.

“꺼억...”

그리드가 단발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헉...”

그리드도 자신이 이렇게 쉽게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놈에게는 아직 많은 재능과 여력이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잊혀진 제왕의 검의 일초식 마왕은 내 생각보다도 그리드의 생각보다도 강했다.

검마의 오러와 슬로스만큼이나 단단한 그리드의 몸이 종이처럼 썰려버렸다. 이런 것은 본 적도 없었다.

“으어어어...”

제압해서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핵이 깨졌기 때문에 그리드는 자신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드! 엔비가 죽었다는 게 무슨 말이냐.”

“크으으. 네, 네놈이 죽인 게 아니었나...”

“난 만난 적도 없다!”

“그, 글러트...”

“그리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녹아내리는 놈을 지켜보는 것 밖에 없었다.

“젠장...”

“유, 유렌님. 방금 그 어두운 검술은 뭐죠?”

“그런 검은 본 적도, 아니 상상한 적도 없어요. 저희 할아버지도 그런 검술은...”

크라이드와 이레아는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넋이 나간 눈으로 내 손에 들린 검만 보고 있었다.

“음...”

솔직히 나도 잘 모르니 뭐라 해줄 말이 없다.

-바, 방금 그 힘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허락 되지 않은...

허공에 떠 있던 기린이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땅으로 내려오는 녀석의 동그란 동공이 지진 난 듯 떨렸다.

“...”

-흐, 흠. 인간 이름이 뭐라고 했지? 내 자네의 말을 들을 걸 그랬어. 강하긴 강하네. 흠흠. 어쨌든 이런 일이 발생 할 줄은 나도 몰랐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기린은 민망한지 혼자서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자네의 말을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세상일이라는 게 사기꾼도 많지 않나. 그렇지? 그래서...

“후후...”

기린이 민망하다는 듯 눈을 돌리며 말을 할 때 난 녀석의 녹용, 아니 뿔을 양손으로 잡았다.

-무, 무슨 짓인가. 그 뿔은 신성한...

“신성은 개뿔!”

빠각!

-꾸에엑!

뿔을 잡은 채로 놈의 머리를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녹용 자식아. 내가 조심하라고 말했지. 그리고 뭐? ‘흠, 이름이 뭐냐고?’ 미안하다부터 나와야 할 거 아니야!”

쾅!

쓰러진 기린의 앞발을 잡고 바닥에 매쳤다.

-쿠아악!

만일 기린의 첫 단어가 ‘미안’, ‘죄송’이었다면 렐리아를 봐서라도 참았을 텐데, 여전히 거만하다.

여전히 지가 최고인 줄 아는 우물 안 개구리의 버릇을 고쳐줘야겠다.

“넌 좀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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