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신수 기린 (2) (163/241)

신수 기린 (2)

세계가 멈췄다? 

장난을 치는가 싶었지만 렐리아의 표정은 웃음기 

“이 세계가 멈췄다고 하셨습니까?” 

“네. 확실해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딱 한 번 모든 것이 멈춘 적이 있어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가 정지됐고, 바다의 거친 파도가 굳어버렸으며, 흐르는 공기조차 멈춰버렸죠.” 

진실을 말하는지, 마주 보는 렐리아의 눈에 흔들림은 보이지 않았다. 

“해가지지 않고, 달이 뜨지 않으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말 길었다는 것만 기억해요.” 

“세상이 멈췄을 때 렐리아님만 움직일 수 있던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저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생각은 할 수 있었고, 천리안으로 세상을 볼 수는 있었어요. 정말 지루한 시간이었죠.” 

“음...” 

그럴 것이다. 

모든 것이 정지되고, 자신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생각만 할 수 있다면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나가고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더욱 엄청난 일이 벌어졌죠. 앞으로 가야하는 시간이 갑자기 뒤로 흘러가기 시작했어요.” 

“과, 과거로 돌아갔다는 말씀입니까?” 

“맞아요.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어요. 되돌아가던 세계가 멈추고 시간이 다시 앞으로 흐른 건 10년 전이었어요.” 

“10년 전...” 

“이곳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신수인 기린님조차 시간이 멈춘 것과 시간이 되돌아간 것을 기억하지 못하시더군요. 그걸 기억하는 존재는 저밖에 없는 것 같았어요.” 

“음...” 

예상이지만 렐리아의 특성인 절대기억과 고유 결계의 영향으로 그녀만이 세상이 멈춘 것을 알고 시간이 뒤로 흐른 것을 기억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분명...” 

어쨌든 렐리아가 말한 두 가지 사건과 내가 소설에 들어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가 관계있는 것만큼은 알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드디어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온 이유에 조금이나마 다가간 것 같다. 

“전 세상이 멈추고 되돌아가기 전에도 대륙 이곳저곳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때 유렌님 대신 큰 활약을 했던 영웅이 있었어요.”

레리아가 말하는 것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녀는 원작의 주인공 라시드를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간이 돌아가기 전엔 유렌님이 계시는 줄도 몰랐어요.” 

당연한 소리다. 

그녀가 말하는 시간이 돌아가기 전의 세계는 원작의 내용이고, 그때 유렌은 뒷골목에서 죽어 사라지는 악역 엑스트라니까. 

“그럼 이전 세계의 영웅은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시드의 정보를 알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흡이 빨라졌다. 

“...저도 모르겠어요.” 

“네?” 

“과거로 되돌아 온후 이전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특히 제가 말한 그 영웅은 어느 순간 제 천리안에도 보이지 않았죠.” 

“음...” 

천리안에도 보이지 않는다면 에블린이 무슨 짓을 했을 거다. 추적방지 마법이나, 어떤 결계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를 발견했어요.” 

“그, 그게 언제죠?” 

“유렌님과 관계가 있던 일이에요. 리자드맨 킹을 물리치고 영지를 구해내셨을 때 유렌님의 기사분과 그가 마주쳤었죠.” 

“아...” 

키본 영지 탈환전 때 아린이 브리더를 잡으러 가서 만난 검사는 역시나 라시드였다. 

“그분은 정의감 넘치는 분이었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어요. 예전과 달리 아무 이유도 없이 살인을 하더군요. 그것도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을...” 

라시드는 주인공이라,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먼저 건드리지 않는다. 에블린의 세뇌가 강력하게 들어간 것 같다. 

“어쨌든 과거에 그분이 해결했던 일들을 유렌님이 처리하시더군요. 그것도 더 많은 일들을, 더 빠르게. 꼭 미리 아는 것처럼 말이에요.” 

미리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살짝 뜨끔했다. 아무리 그녀가 내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준다 해도 내 비밀만큼은 말해줄 수가 없다. 

“유렌님이 모험을 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흥미로웠어요. 정말 빠르게 강해지시고 누구도 겪지 못 할 특별한 일들도 겪으시고. 후후.” 

어찌 보면 그녀는 내가 새로 쓰고 있는 소설의 유일한 독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전 세상과 가장 많이 변하신 유렌님께 묻고 싶어요. 혹시 검은 로브를 입은 자를 만나신 적이 있나요?” 

“검은 로브요?” 

“네. 로브 같으면서도 그림자 같이 흐릿한 형태인데...” 

검은 로브라니, 렐리아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과거로 돌아가기 전과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어요. 이전 세상에 없었던 검은 로브를 입은 존재가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의 곁에 나타나요. 로브라기보다 꼭 그림자를 뒤집어 쓴 느낌이죠.” 

“...전 그런 자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자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접촉한 거 같아요. 특히 세상을 파괴하려하는 악을 품은 자들에게요.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악을 품은 자들을 만나면 그 이후부터 천리안으로도 그들을 찾을 수도, 볼 수도 없게 됐어요.” 

그 놈이다... 

세피로스에게 라시드의 정보와 보물의 정보들을 알려주고, 칠죄종에게도 숨겨진 정보들을 알려준 놈이 바로 그놈이었다. 

그 검은 로브를 입었다는 자식이 세상을 이따위로 바꿔버린 놈이 확실했다. 

“하...” 

등 뒤로 소름이 돋아 올랐고 손끝이 덜덜 떨렸다. 이제야 이 세상의 비밀에 다가갔다. 어떻게 해서든 그놈에게 접근해야 한다. 

“유, 유렌님. 괜찮으신가요?” 

“아, 네. 괜찮아요.” 

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자, 렐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혹시 그자의 위치는...” 

“죄송해요. 저도 그자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그렇군요.” 

괜찮다. 누군가가 뒤에서 상황을 조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 것으로도 큰 수확이다. 

“그럼 유렌님은 왜 갑자기 변하신거죠?”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냥 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소설에 들어왔다는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이 상황까지 온 내 솔직한 마음은 말해주었다. 

난 내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며 눈앞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을 뿐이다. 

“훌륭하세요.” 

렐리아는 내 대답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전혀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 유렌님이 매번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알고 있어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정말 대단하세요.” 

“음...” 

내가 했던 일을 모두 본 렐리아가 저런 말을 해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곳에 오신 건 기린님을 설득시키기 위해서죠?” 

“그렇습니다. 저 멍청한 놈이 저렇게 답답할 줄은 몰랐지만요.” 

“그분은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세요.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조심스럽게 말하면 괜찮을 거예요. 제가 같이 말해드릴게요.” 

“기린을 노리는 놈이 지금 당장이라도 올지 모릅니다. 그냥 줘패서 정신을 차리게 할 생각이에요.” 

“그, 그러지 마시고... 제가 한 번 살펴볼게요.” 

렐리아는 기린이 얻어맞는 것은 보기 싫은지, 천리안을 사용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어, 어떻게!” 

1분 정도 지났을까. 눈을 뜬 렐리아는 자신의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왜 그러시죠?” 

“이미 왔어요. 숲의 중앙에 나타나서 드라이어드와 님프들을 태우며 이곳으로 빠르게 오고 있어요! 아!” 

“젠장!” 

마법을 이용해서 단 번에 숲 중앙으로 이동해 내려온 것 같다. 거기다 숲을 불태우며 오다니 놈은 기린을 자극하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기, 기린님이 분노하신 채로 결계 밖으로 나가셨고, 유렌님과 함께 오신 분들이 따라 가셨어요. 곧 만날 것 같아요!” 

“멍청한 녹용 새끼! 렐리아님. 내보내주세요!” 

지금은 이레아가 기린을 따라가서 브리더의 세뇌를 막아내길 바랄 뿐이다. 

쩍! 

렐리아는 말할 시간을 아끼며 바로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빽빽아!” 

“빽.” 

빽빽이가 내 어깨로 돌아왔다. 

“죄송해요. 유렌님. 제가 먼저 알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다녀올게요.” 

“기린님을 부탁해요.” 

“네.” 

** 

“윽!” 

이레아는 기린을 쫓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호의를 가지고 대화하던 기린은 갑자기 화를 내며 결계를 해제해 버리고 밖으로 날아갔다. 말릴 새도 없었다. 

이레아와 크라이드가 바로 기린을 따라갔지만, 너무 빨라 기린의 발굽에서 터지는 빛을 쫓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죠?” 

“그, 글쎄요.” 

이유도 모른 채로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을 무렵 하늘에 퍼지는 연기가 보였고, 멀리서 기괴한 비명이 들려왔다. 

“서, 설마!” 

“성녀님. 유렌님이 말했던 놈들이 온 것 같습니다.”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네?” 

고오오오! 

걸음을 멈춘 이레아가 자신의 전신을 은빛의 신성력으로 덮었다. 흡사 마스터가 오러를 이용해 신체를 활성화 시키는 모습 같았다. 

“저 먼저 갈게요!” 

“서, 성녀님!” 

콰앙! 

이레아가 밟은 땅이 포탄이 터진 것처럼 파여 나갔다. 그녀는 한 걸음에 10미터이상의 거리를 도약하며 엄청난 속도로 기린을 쫓았다. 

파아앙! 

차이는 상당했지만, 이레아는 유렌의 부탁대로 기린을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기린의 뒤를 쫓았다. 

쿠르르릉! 

기린은 누구보다도 먼저 숲을 불태우는 원흉에게 도달했다. 그의 분노에 하늘에서 뇌성이 울렸다. 

화르르. 

불타고 있는 숲의 중앙에 거적때기와 나무줄기를 엮은 옷을 입은 남자, 브리더가 서있었고 그의 주변에 네 개의 주황색 불꽃 덩어리가 맹렬하게 돌아가며 주변의 님프와 드라이어드를 죽이고 있었다. 

화아악! 

남자의 뒤에서 말의 하체를 가지고, 상체는 화염으로 불타는 악마의 모습을 가진 몬스터가 나타났다. 화염을 다루는 몬스터 중에서도 상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블레이저다. 

-크으으! 

기린은 블레이저와 남자를 노려보며 전신에 스파크를 튀겼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멋지군. 정말 멋져!” 

브리더는 기린의 모습에 감동을 했는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양손을 하늘로 올렸다. 

-미친놈들이구나! 

빠지지직! 

기린의 뿔에서 번쩍이던 스파크가 낙뢰가 되어 브리더에게 내려 꽂혔다. 

콰르르릉! 

파아앙! 

하지만 브리더와 블레이져 주변에 투명한 원이 생성되며 기린의 번개를 흡수해버렸다. 

-무, 무슨! 

“너는 내 것이다.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브리더가 품에서 짙은 검은 색의 돌을 꺼내들었다. 

-음... 

기린은 그 돌에서 굉장히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당장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의 고고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콰르르릉! 

파아앙! 

다시 번개로 공격해봤지만 역시나 투명한 원에 막혀버렸다. 

-그 구슬 직접 부숴주마! 

빠지지직! 

기린의 전신이 노랗게 빛나며 세상을 태울 것 같은 빛을 내뿜었다. 빛이 터진 순간 기린은 신속을 사용해서 뿔로 브리더의 심장을 노렸다. 

퉁. 

하지만 기린의 뿔은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의 뿔이 닿은 것은 블레이저 왼쪽 상체였으며 놈 오른손에 들려있던 검은 돌이 기린의 머리에 닿았다. 

-아... 

“크하하!” 

기린은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돌에서 나오는 사이한 기운이 자신의 머리와 몸을 헤집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편해질 거다. 크흐흐.” 

브리더는 기린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희열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이, 인간 따위에게... 내가... 

지금 기린의 머릿속에 생각나는 사람은 자신의 자존심을 긁었던 유렌이었다. 그가 말했던 것이 결국 사실이 되었다. 

“그렇게는 안 돼!” 

화아악! 

기린의 뒤를 따라온 이레아가 기합을 지르며 양 주먹을 꽉 쥐자, 하늘에서 은색의 빛이 쏟아져 기린을 보호하듯 덮어버렸다. 

파지직! 

이레아의 신성력은 기린의 머리에 닿아있던 검을 돌과 충돌하며 돌의 사이한 기운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음! 

콰아앙! 

기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을 잡고 있던 블레이져의 상체를 뿔로 부숴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고, 고맙다. 이레아! 

“괜찮나요?” 

-크흠, 괜찮다. 큰 신세를 졌어. 

기린은 이레아가 오지 않았다면 저 인간에게 꼼짝없이 잡혔을 거란 생각에 아찔한 기분과 거대한 분노가 동시를 느꼈다. 

-네놈은 그냥 죽이지 않으마. 지독한 고통을 느끼게 해주겠다! 

빠지지직! 

기린의 뿔에서 이전보다도 훨씬 거대한 뇌성이 터졌다. 

“다행이야.” 

뇌익을 써서 미친 듯이 달려온 유렌은 이레아가 멍청한 녹용을 구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흑매석이라니...” 

브리더가 흑매석까지 구해올 줄은 몰랐다. 다만 저것은 일회용이다. 이미 그 힘을 잃었고, 자신과 이레아가 있으니, 브리더가 기린을 세뇌할 가능성은 이제 없어졌다. 

“크으윽! 계집이 감히!” 

브리더는 이빨을 갈며 자신의 망토를 벗어던졌다. 망토가 수십배로 커지더니 그 안에서 보스급 몬스터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전부 죽여라!” 

“크라이드.” 

“네!”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크라이드가 대검을 뽑고, 기린이 벼락을 내려치려 할 때였다. 

톡. 

허공에서 금화 하나가 기린의 등으로 떨어져내렸다. 

“어?” 

하나였던 금화는 우수수 생겨나 기린의 몸 전체를 뱀처럼 휘어 감았다. 

-크윽, 이, 이건! 

금화에 휘감겨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기린의 옆으로도 금화들이 쏟아졌고, 그 금화들이 뭉쳐져 한 명의 인간의 모습이 빚어냈다. 

“역시 공짜가 최고라니까. 기다리니 알아서 가져다주잖아?” 

“아...” 

유렌은 나타난 놈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저 놈이 이곳에 나타났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리드가 왜 이곳에 나타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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