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신수 기린 (162/241)

신수 기린

콰르르릉! 

뇌성이 터진 곳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단순히 빛과 소리만이 아니라 그곳에 나타난 거대한 존재감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빠지지직! 

천둥소리가 그치고 비어있던 허공에 노란색의 광구(光球)가 나타났다. 광구는 공기를 태울 것처럼 스파크를 튀겨댄 후 사그라졌고 그 안에 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 유렌님.” 

“서, 설마 저게...” 

“맞아. 기린이다.” 

동양의 용의 머리에 사슴의 뿔, 말의 발굽에 사자의 갈기와 소의 꼬리를 가진 환상의 동물 기린의 모습 그대로였다. 허공을 밟는 발굽 아래에 스파크가 번쩍이고 있었고, 꼬리에는 노란색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빼, 빽!” 

“어, 엄청 멋있는데요? 저런 동물은 처음 봐요...” 

“뭐, 뭔가 제 생각과는 너무 다르네요. 외형이나, 분위기나...” 

크라이드는 기린의 모습이 멋있는지 감탄을 하고 있었고, 이레아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녀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를 느낀 것 같다. 

쿠우우우. 

기린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다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비행이라기보다 하늘을 걷는 느낌이다. 

“바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긴장을 풀지 말도록.” 

“아, 네!” 

“알겠습니다.” 

기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바로 싸울 수 있게 마음을 다잡고, 이레아와 크라이드에게도 경고를 해주었다. 

스윽. 

기린이 공격을 해오면 바로 귀왕살을 박을 생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귀왕살을 뽑을 일은 일단은 없었다. 

쿵. 

기린은 공격은커녕 우리 바로 앞에 내려와 마름모 꼴 눈을 번쩍였다. 우리를 한 번씩 쳐다보던 기린은 이레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 장소에 인간이 오다니 처음 있는 일이로군. 

“마,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 

기린은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기린의 말은 메시지 마법처럼 머릿속에 직접 울리고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었는지 모두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말이라? 인간의 언어를 말하는 건가? 이건 그런 것이 아니다. 

“그, 그럼 뭔가요?” 

이레아가 양손을 모은 채로 기린에게 질문을 했다. 기린은 계속해서 이레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자신의 의사를 보냈다. 

-이건 내 의지를 너희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바꿔서 전하는 것이다. 난 인간의 말을 알지 못한다. 

“메시지마법 상위에 있는 마이닝 마법 같은 건가 봐요.” 

기린의 저 능력은 무공으로 따지면 혜광심어같이 상대의 머릿속에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나 뜻을 그대로 전하는 대단한 능력이다. 

“그럼 저희의 말은 어떻게 알아들으시는 거죠?” 

-마찬가지다. 너희의 머릿속에 있는 의미들이 내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다. 언어로 하는 것보다 더 완벽한 뜻과 감정을 전할 수 있지. 

기린은 이레아의 말에 굉장히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굉장히 건방질 거라 생각했는데 상당히 의외의 반응이었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기린] 

용의 머리에 사슴의 뿔, 말의 발굽에 사자의 갈기와 소의 꼬리가 있는 신수. 특수 능력인 벼락의 위력도 굉장히 강력하지만, 단단하고 균형 잡힌 신체에서 나오는 물리 공격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공격성이 짙지 않지만, 자존심이 상하거나 화가 나면 스스로도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격해진다. 여자를 굉장히 좋아한다. 

특수 능력 : 벼락, 신속, 진언, 신령. 

지금 우리와 대화를 나누는 능력이 진언인가 보군. 그리고... 어? 여자를 좋아한다고?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좀 전까지의 일을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았다. 기린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레아만 보고 있고 거의 그녀와만 대화를 하고 있었으니까. 

이 얼빵한 놈이 정말 신수 기린이고 나를 죽였던 놈이 맞는 지 모르겠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에요.” 

-흠, 흠 별 거 아니다. 

기린은 이레아의 칭찬에 콧김을 내뿜으며 입술 끝을 쓱 올렸다. 저건 분명 웃고 있는 것이다. 

-으음! 그러고 보니 너희 결계는 어떻게 통과한 거지? 

이레아를 보고 웃던 기린은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진즉에 해야 할 질문을 늦게 물어봤다. 

“바닥에 결계의 힌트가 보여서 그 힌트대로 뚫고 왔소.” 

-음? 

이제야 나를 자세히 살펴본 기린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콧김을 뿜더니, 뒤로 세 발 물러났다. 

-너, 너는 인간이 맞는 건가? 인간이 어찌... 

“이상한 걸 묻는군.” 

-난 결계 안에서 수많은 인간들을 보았다. 너는 그들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나를 품고 있다. 거기다 그 질도 괴이 할 정도로 순수해. 인간 같지가 않군. 

내 내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는지 머릿속으로 들리는 기린의 음성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거기다 네 마나중 반 정도는 내 벼락의 힘과 비슷하다. 그 힘은 인간이 다루기 거의 불가능 할 텐데... 

기린은 만독자전신기에 있는 자전의 힘을 느낀 모양이다. 이제는 놀란 것을 넘어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로 관심 없는 인간에게 위협을 느껴 뒬로 물러난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지금이 본 목적을 말하기에 딱 좋은 순간 같았다. 

“할 말이 있소.” 

-할 말? 

본론을 말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당신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온 것이오.” 

-전해야 할 말이라.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소.” 

-음... 

기린은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눈 사이의 주름이 짙어졌다. 

-진심이군. 좋다. 무슨 일로 날 찾았는지 말해다오. 

“당신을 노리는 자가 있소.” 

-나를 노리는 자? 

“그렇소. 당신에게 세뇌를 걸어서 정신지배를 한 뒤 인간의 도시를 공격하려는 놈들이 있소.” 

-... 

내 말이 끝났지만 기린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10초정도가 지난 후 기린이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내가 인간 따위에게 지배될 거라 생각한 건가? 날 너무 무시하는군. 인간. 

“당신도 인정했듯이 난 진심이오. 당신이 그 놈에게 세뇌된다면 당신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수많은 생명이 죽게 될 거요.”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인간의 기술이나 기예에 지배될 일은 절대로 없으니. 크르르. 

기린은 이 대화조차 기분이 나쁘다는 듯 자신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기린은 창조주의 눈에 보였던 설명대로 자존심이 더럽게 강한 것 같다. 자신이 세뇌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세상엔 특별한 장비나 능력이 있소. 그런 것들을 이용한다면 당신을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오. 

기린에게 정신방어 특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기린의 감정이 격해지거나 부상을 입는다면 브리더는 어렵지 않게 기린의 세뇌를 성공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네가 인간치고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 이상 날 모욕한다면 너에게 인간과 신수의 격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마. 

“하...” 

생긴 대로 답답한 놈이다. 이놈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강한 줄 아는 우물 안 개구리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군.” 

일단 말을 들어야 대책을 의논해볼 텐데, 기린은 내 말을 아예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헛소리니 듣지 않는 거다.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좋다. 내 너에게 진정한 벼락이 어떤 건지 느끼게 해주마. 

기린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왜 싸웠는지 알겠군. 

샤크라이 킹을 잡고 내 미래를 봤을 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 예상되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으니, 기린에게 피하거나 안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달라 했을 테고, 기린은 내 말을 듣지 않았을 거고, 자존심을 굽히지 않던 기린과 전투가 벌어진 게 뻔하다. 

“하지만 그때와는 완전 다르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조화경에 오른 지금은 눈앞의 기린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건방짐을 털어버릴 정도로 줘패서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 할 것 같다. 

“자, 잠시 만요! 일단 이야기라도 제대로 들어주세요. 저희는 정말 기린님을 위해서 온 거에요.” 

-음, 그러면... 

이레아가 앞으로 나서자 공중으로 떠오르던 기린이 움직임을 멈췄다. 

“하...” 

내가 기린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자, 녀석이 내 눈빛을 보고 움찔하더니,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미, 미안하지만, 건방진 인간을 교육할 방법은 직접 몸으로 알려주는 것뿐이다. 너를 봐서 살살해주마. 

“아...” 

“지랄하네. 둘 다 물러나.” 

저런 놈이 신수라는 것이 너무 한심해 혀를 차며 이레아와 크라이드를 뒤로 물렸다. 

후우욱. 

스르릉. 

올라가는 녀석의 머리 위로 몇 가지 독을 흘린 뒤 귀왕살을 꺼내들었다. 

-그, 그건! 

공중에서 스파크를 튀기던 기린은 귀왕살에 서려있는 지독한 살기를 느끼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늦었다.” 

화악! 

나와 기린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때 둘 사이의 공간이 툭 튀어나와 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펄럭. 

문 안에서 나비의 날개를 달고 있는 요정이 나타나 나와 기린 사이에 내려앉았다. 

“두 분다. 그만 두세요.” 

-렐리나! 왜 나온 건가! 

요정이 나타나자 기린이 당황하면서 땅으로 내려왔다. 저 요정이 바로 기린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이유였다. 

저 요정은... 

판타지라고 하면 당연히 요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단 만들어만 놓고 방치해두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렐리나. 안으로 들어가라. 이곳은 위험하다. 

“괜찮아요. 기린님. 이분은 그럴 분이 아니에요.” 

-뭐? 

“날 안다고?” 

“그래요. 잘 알고 있어요. 유렌 록스님.” 

요정의 여왕 렐리나는 청녹색 날개를 펄럭이며 대답했다. 

“어떻게 내 이름을...” 

다시 생각해봤지만 이곳에 온 이후 내 이름을 밝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렐리나. 이 인간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가까이 가면 내가 막아 줄 수가 없다. 

“내가 마음먹으면 네가 있든 말든 상관없어.” 

-역시 네놈에겐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두 분 다 그만하세요.” 

레리나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 기린에게 짜증났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기린 역시 마찬가지인지 앞발을 내려놓았다. 

“기린님. 이분은 위험한 분이 아니세요. 

-하지만 렐리나. 

“걱정 마세요.” 

-음... 

렐리나의 설득에 기린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유렌님. 괜찮으시다면 저와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나요?” 

“...알겠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렐리나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날 아는 이유와 나와 대화를 하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럼 잠시만 이 안으로 와주시겠어요?” 

렐리나는 자신이 나왔던 작은 차원 문이 내가 들어갈 수 있을 크기로 키워주었다. 

-렐리나! 저 인간을 성역에 데려갈 생각인가! 

“이분은 괜찮아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렐리나의 미소에 기린은 끙 소리를 내며 바닥을 한 번 긁었다. 

“이레아님.” 

“네.” 

“혹시 누가오더라도 저 망아지가 날뛰지 않게 말려주세요.” 

“제, 제가요?” 

“네.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레아의 말이라면 한 번은 들을 것 같아서 그녀에게 기린을 부탁했다. 

-망아지? 네놈이 감히! 

기린이 화를 내든 말든 신경 끄고, 렐리아가 만든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음...” 

이 안은 또 다른 세계였다. 모든 것이 작고 낮았으며 수풀과 나무에서는 초록빛이 연결 된 선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꺄르.” 

렐리아처럼 나비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요정들이 내 모습이 신기한지 내 몸 이곳저곳과 빽빽이에게 달라붙었다. 

“빽!” 

빽백이가 만지지 말라는 듯 울었지만 요정들은 무시하고 녀석의 털을 흔들었다. 

“죄송해요. 이 아이들이 기리님을 제외한 다른 존재를 처음 봐서 그래요.” 

“괜찮습니다.” 

“모두 기다리렴.” 

“너도 가서 좀 놀고 있어.” 

“빽.” 

렐리아의 말에 요정들이 까르르 웃더니 다른 나무와 수풀 쪽으로 흩어졌다. 나도 빽빽이를 날려 보냈다. 

“소개가 늦었어요. 요정들의 대지, 로웰의 여왕 렐리아라고 해요.”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알고 있어요. 유렌님을 직접 뵈니까 신기하네요.” 

레리아가 입을 가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떻게 저를 알고 계시는 거죠?” 

“제겐 세상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있어요. 그 눈으로 유렌님의 활약을 지켜봤죠.” 

“마음의 눈이요?”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제가 보고 싶은 곳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에요.” 

천리안 같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인 모양이다. 

[이름: 렐리나] 

[특성: 천리안, 고유 결계, 절대기억. ] 

[호감도: 67 (깊은 호감) ] 

[현재 기분: 큰 의문과 걱정을 동시에 하고 있음. ] 

지켜봤다는 게 정말인지, 나에 대한 호감도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내가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자, 렐리나가 내 맞은편에 있는 나무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마음의 눈으로 왜 저를 보신 겁니까?” 

“그 이유를 말씀드리기 위해선 한 가지 믿기 힘든 일을 말씀드려야 해요.” 

“믿기 힘든 일이라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한 번 멈춘 적이 있습니다.” 

세계가 멈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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