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은 잘 서야지
다음날 정오. 나와 일행들은 엘루나의 입구 앞에서 대기 하고 있었다.
“바로 떠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쓰러진 거 아니라니까.”
아린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내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 걱정됩니다..”
“지금 상태 최고야. 더할 나위가 없어.”
“그럼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어.”
내 대답에 아린 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쉬면서도 내 걱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 할 말이 있는데, 영지에 돌아가면 너희 한 명씩 내 개인 수련실로 오도록.”
이들에게 세계수의 선물을 어떻게 줄지 이미 생각을 해놓았다. 기사들에게 세계수의 선물을 복용시킨 뒤 그 안의 마나를 내가 직접 이끌어줄 것이다.
“네?”
“수련실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브리카와 크라이드는 내가 부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고, 아린은 바로 대답을 했다. 역시 성격이 제 각각이다.
“왜 부르는지 궁금해?”
“네. 조금, 아니, 많이 궁금합니다.”
크라이드와 아린은 대답하지 않았고, 브리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희는 약해.”
“윽!”
“그, 그렇죠...”
“최근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너희들도 느낀 것이 많겠지. 밥값을 할 수 있게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이번만큼은 세 명이 모두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이들 셋은 힘에 대한 심한 갈증을 가지고 있다. 수련을 도와준다면 분명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을 거다.
이 녀석을 강하게 키워놔야 내가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지.
“페루.”
“네.”
홀로 가만히 있던 페루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녀석의 마음속엔 기사들에 대한 부러움이 남아있었다.
“너도 오도록.”
“네?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수련실로 오라고, 다른 방식이겠지만 네 한 몸 지킬 방법은 알려주마.”
“아...”
“잘됐다. 페루!”
브리카가 페루에게 어깨를 걸치며 기쁨에 들뜬 웃음을 지었다. 페루는 믿기 힘들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난 진심임을 증명하듯 녀석에게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여주었다.
“오신다. 모두 정렬.”
“네!”
마을 안에서 죽상을 하고 있는 로디엔과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르시아가 나타났다. 그녀들의 뒤에는 같이 떠날 몇 명의 엘프들도 보이고 있었다.
“모두 안녕하세요...”
로디엔이 인사를 해왔지만 본인이 안녕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평소의 자유분방한 복장과 다르게 아르시아처럼 엘프의 전통복장을 입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저요? 당연하죠...”
전혀 당연하지 않아 보였다.
“걱정 마세요. 어제 단단히 교육시켰으니, 가서 잘할 거예요.”
“으...”
“아, 네...”
로디엔이 엘루나의 대표로 왕궁에 가는 것은 원작에 없는 내용이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알아서 잘하기를 바랄 뿐이다.
“모두 목걸이를 받아서 목에 걸어주세요.”
아르시아의 뒤에 있던 엘프들이 우리에게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 사용했던 시리안 목걸이다.
“로디엔. 지금부터는 네가 설명하거라.”
“저희가 이동할 장소는 크라시스 왕궁의 워프룸이에요. 왕궁 쪽의 허가도 받아놨으니 바로 이동해도 문제없을 겁니다.”
아르시아가 교육을 잘 했는지 로디엔이 우리에게 상황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모두 모여주세요.”
“네!”
로디엔과 엘프 다섯 명, 나와 기사들까지 해서 총 12명과 한 마리가 원을 그리며 모였다. 모두가 모인 것을 본 로디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을...”
“카오오!”
로디엔이 시리안 목걸이의 이동주문을 외우려고 할 때 하늘에서 그리폰이 나타났다. 그리폰은 우리의 머리 위에 떠서 숲이 떠나갈 정도의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빽!”
내 어깨에 붙어있던 빽빽이도 날아올라 조롱조롱 울기 시작했다. 못 본 사이 두 정령수는 꽤나 친해진 모양이다.
“캬오.”
“빽.”
눈빛을 교환하다가 그리폰이 먼저 날개를 펄럭이며 돌아갔고, 빽빽이는 다시 내려왔다.
“인사 잘 했어?”
“빽!”
“죄송합니다.”
“그럼 다시 출발을...”
“유렌님.”
로디엔이 출발을 말하려 할 때 아르시아가 양손으로 모야 엘프가 사용하는 최고의 예를 취했다. 그녀의 뒤에 있는 엘프들도 그녀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엘루나의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언제다도 다시 찾아와 주세요.”
“감사합니다. 아르시아님. 꼭 다시 오겠습니다.”
“인사 끝났으니, 진짜 출발하겠습니다.”
로디엔이 목걸이를 발동시켰다. 녹색 빛이 우릴 뒤덮었고 긴 터널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다만 이곳에 올 때와 다르게 지진이 난 것처럼 듯 흔들리는 감각은 전혀 없었다.
번쩍.
빛이 사라지자 이젠 익숙한 왕궁의 워프룸이 보였다.
“오셨군요.”
카이리오 자작이 병사들에게 물러나란 지시를 내린 뒤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에거시드 브라이어드 폐하의 2보좌관 카이리오라고 합니다. 크라시스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엘루나의 대족장 아르시아 세라피아의 딸이자 설수목 부족의 세 번째 잎 로디엔 세라피아라고 합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이리오는 인간의 예를 아르시아는 엘프의 예를 취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카이리오는 원래 제 3보좌관인데 언제 2가 됐는지 모르겠다.
“폐하께서 손님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원하실 때 뵙는 것으로...”
“전 지금 바로 뵈어도 상관없습니다.”
로디엔은 평소와 다르게 진중한 표정과 침착한 어투를 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카이리오가 눈짓을 주자 문 앞에 있던 서기관이 달려 나갔다. 국왕에게 이야기를 전하려고 간 것이다.
“로디엔님의 말씀을 전하러 갔으니,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알겠습니다.”
카이리오는 로디엔과 엘프들을 옆의 테이블로 안내해준 뒤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유렌 자작님.”
“네. 조금 피곤해보이시네요.”
“유렌님 덕분에 갑자기 큰일이 생겨서 잠을 좀 못 잤습니다.”
카이리오자작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라 지금도 살이 떨립니다. 유렌님은 항상 제 상상을 뛰어넘으시는 군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듣지 못하셨습니까?”
“유렌님이 엘루나를 구해내셔서 엘루나가 저희에게 동맹을 제안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엘루나의 대표가 오시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실 거라 하더군요.”
“그렇군요. 그럼 대충이라도 설명을...”
카이리오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려 할 때 국왕에게 소식을 전하러 갔던 서기관을 헉헉거리며 돌아왔다.
“폐하께서 엘루나의 손님들을 알현실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카이리오 자작님. 폐하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으니, 그곳에서 같이 들으시죠.”
“네. 그래야겠네요.”
카이리오 자작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로 향했다. 닫혀있던 알현실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국왕은 이미 왕좌에서 내려와 있었다.
국왕의 옆에는 일왕자와 이왕자 그리고 왕궁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질서정연하게 서있었다.
“엘루나의 대족장 아르시아 세라피아의 딸이자 설수목 부족의 세 번째 잎 로디엔 세라피아가 크라시스의 하늘을 뵙습니다.”
로디엔과 엘프들이 양손을 모야 국왕에게 예를 표했다. 나와 기사들도 그 뒤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크라시스의 국왕 에거시스 브라이어드라 하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 ”
국왕은 앞으로 다가와 모두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주었다.
“모두 고개를 드시오.”
국왕의 말에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국왕은 엘프와 우리들을 보며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재촉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소? 데이라 공에게 듣긴 했지만 당사자들에게 제대로 듣고 싶구려.”
데이라는 당시 엘루나에 없었다. 아르시아에게 이야기만 듣고 먼저 이곳에 와 있어서 정확한 내용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유렌 자작.”
“예. 폐하!”
“자네가 그 일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들었네. 설명 좀 해주겠나?”
“알겠습니다. 먼저 저희가 엘루나에 있을 때 숲에서 불이...”
알현실의 있는 모두에게 엘루나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했다. 물론 비밀로 해야 하는 일들은 제외하고 겉으로 보이는 사실들만 전했다.
“...그렇게 해서 마검을 멈췄습니다.”
“...”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엘프와 내 기사들을 제외한 모두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럼 자네가 홀로 마검을 막았다는 것인가?”
“혼자는 아닙니다. 아르시아 대족장께서 바람의 정령왕으로 길을 열어주셨고, 로디엔님이 물의 정령왕으로 놈의 시선을 끌어주었습니다.”
“폐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로디엔이 앞으로 나섰다.
“말하시오.”
“유렌님이 홀로 마검을 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건 저희 대족장께서도 인정하신 일입니다. 유렌님이 처음에 저희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엘루는 전멸했을 지도 모릅니다.”
로디엔은 최대한 좋은 말을 해주려 하고 있었다. 그 덕에 알현실의 모두는 감탄을 넘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물론 이왕자나 몇몇 귀족들은 혐오와 질시를 담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저희는 목숨을 걸고 엘루나를 구해내고, 보물을 돌려주고도 보상조차 요구하지 않으신 유렌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유렌님을 믿고 크라시스 왕국에게 동맹을 제안 드리는 겁니다.”
엘루나의 갑작스런 동맹 제안에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전부 나 때문이라는 것에 사람들이 경악을 하고 있었다.
“아...”
“어...”
국왕이나 귀족들이나 혼이 쏙 빠져나간 표정이다.
“크하하하하!”
정신을 차린 국왕이 알현실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복덩이로다. 내 유렌의 도움을 받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엘루나와 동맹을 만들어오다니, 진정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야.”
국왕은 모든 것을 이룬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옆의 귀족과 왕자들을 보았다.
“누구도 못 할일이야. 대단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진정한 영웅입니다!”
“큰 보상을 내리심이 합당합니다! 폐하!”
일왕자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국왕의 말에 대답했고 대부분의 귀족들도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엘루나는 크라시스와 단순한 무력동맹이 아니라 무역, 연구, 훈련까지 같이 진행하며 서로에게 필요한 능력과 지식을 교환해 함께 성장해 나가는 관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당연히 동의하오! 오히려 우리가 부탁드리고 싶구려.”
국왕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로디엔의 말에 동의했다. 로디엔은 말을 마치고 주머니에서 큰 나뭇잎에 감싸진 물건 하나를 꺼냈다.
“대족장께서 폐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오...”
국왕은 로디엔에게서 선물을 넘겨받고 잎을 펼쳐보았다. 세계수의 열매였다.
“세계수의 선물이라는 열매입니다.”
로디엔이 열매에 대해 설명해주자 국왕의 눈빛이 번쩍였다. 순수한 마나가 담겼다는 말에 귀족들의 눈에도 부러움 가득한 빛이 모였다.
“정말 고맙소! 대족장께 내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국왕의 성격상 저런 보물을 받았다면 받은 것의 두 배는 될 정도의 보물을 보내줄 것이다. 그는 지금 당장 왕실 보고를 열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저희와의 동맹 말고도, 크라시스 왕국에 큰 경사가 생긴 것을 축하드립니다.”
“경사? 그게 무슨 말이오?”
국왕과 귀족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무슨 뜻인지 몰라 로디엔을 보고 있을 때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유렌님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어?”
천둥이 내려친 이후처럼 알현실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로디엔의 동맹제안보다 더욱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는 자들을 제외한 모두는 한참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유, 유렌 자작.”
“예. 폐하.”
“저, 정말인가? 자네가 마스터에 올랐다는 게?”
“운이 좋았습니다.”
“허어...”
국왕이 멍한 눈으로 뒤로 물러났다. 귀족들에게선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저, 정말이라면 이건 경사정도가 아니야. 드디어 우리나라도 두 번째 마스터를...”
“폐하!”
국왕이 몽롱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이왕자가 앞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냐.”
“유렌 자작은 아직 이십대 초반입니다. 역사상 가장 빨리 마스터에 오른 기사도 20대 후반이었습니다. 유렌 자작과 로디엔님이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음...”
“하긴 말이 안 돼...”
“만일 소문이 잘못 흘러나간다면 유렌 자작이 망신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크라시스도 망신을 당하게 될 겁니다.”
말은 나를 걱정해주는 것 같았지만 이왕자의 표정은 그저 질투와 분노, 혐오만이 담겨 있었다.
“확실히 너무 어리긴 하지.”
“뭔가를 착각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유렌 자작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지 않나?”
“맞습니다. 유렌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귀족들끼리도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일왕자는 꾸준한 신뢰를 보내주고 있었다.
“음...”
국왕은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내 옆으로 왔다.
“유렌 자작.”
“예. 폐하.”
“미안하지만 증거를 보여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어차피 소문이 날일이다.
확실히 하는 것이 내게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 로벤의 롱소드를 꺼내 든 후 내력을 집어넣었다.
부우우웅!
검을 부술 것처럼 터져 나오는 선명하고 강렬한 강기에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아예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것 같았다.
우우웅!
강기는 점점 커지며 2m가 넘게 솟아올랐다. 거대한 빛의 대검을 보는 것 같았다.
“와,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
“미쳤어. 크기도 농도도 보통이 아냐. 하급을 벗어났어!”
“마, 말도 안 돼! 이건 거짓말이야!”
“유렌! 믿고 있었다!”
이왕자의 절망이 담긴 표정과 일왕자의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 교차되어 보였다.
예전에 이왕자가 줄을 잘 서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왕자야. 줄을 잘못 선건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