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주인을 무는 개는 키우지 않는다 (148/241)

주인을 무는 개는 키우지 않는다

보랏빛이 사라지고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분명 본적 있는 곳이었다. 이름을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카볼의 검들이 검술을 보여주었던 내 정신세계 같은 곳이다. 

“그때와는 다르군.” 

이전의 정신세계는 나와 검들을 제외하면 온통 흰색 공간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공간 전체가 옅은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어 암울하고 기괴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저것들은...” 

달라진 건 하나 더 있었다. 

두 개의 휘어진 뿔을 가진 붉은 피부의 악마가 왼쪽에 앉아있었고, 곧은 외뿔을 가진 청색 피부의 악마가 오른쪽에 서서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글레시아!” 

“하르바스!” 

저 미친 악마 놈들은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강력한 적개심을 세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그러면 나야 좋지만.” 

저 악마들 특히 하르바스가 사라져야 이 세계에서 나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둘이 알아서 싸워준다면 난 지켜만 보다가 글레시아를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어쨌든 여긴 정신세계가 합쳐진 곳인가...” 

이 보라색 세계는 두 악마와 내 정신세계가 합쳐진 곳 같았다. 

공간 전체가 옅은 보라색인 것이 증거인데, 빨간색과 파란색이 합쳐지면 보라색이고, 내 흰색이 합쳐져 밝은 보라색이 된 것 같았다. 

“크으으...” 

“카아아...” 

내 혼잣말을 듣고, 서로를 노려보던 하르바스와 글레시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하르바스의 눈에는 루비가 글레시아의 눈에는 사파이어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두 악마 모두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 

“저 인간은!” 

글레시아는 약간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에 비해 하르바는 내게 살기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글레시아. 이쪽으로 와라. 너와 나는 계약을 했으니, 하르바스만 처리하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거다.” 

“음...” 

“크크크큭. 크하하하!” 

인상을 찌푸리는 글레시아를 하르바스가 허리까지 틀어가며 크게 비웃었다. 

“왜 쳐 웃는 것이냐! 하르바스!” 

“크크크. 혹한의 글레시아가 하등한 인간에게 목줄이 잡혀 있는 꼴을 보고 있는데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있나!” 

“목줄이라니 그런 것이 아니다! 아까는 이 인간이 협박을 해서 어쩔 수가...” 

“그렇다면 글레시아. 저 인간부터 먼저 처리 하는 것이 어떤가.” 

“뭐라고?” 

“너도 눈치 챘겠지만, 이곳은 우리 셋의 정신계가 합쳐진 곳이다. 네가 인간의 편을 든다면 내가 이길 수 없겠지. 하지만 넌 저 인간에게 평생 종속 되게 된다. 네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너보다 하등한 종족에게 목줄이 잡혀서?” 

하르바스는 불같은 혓바닥을 굴려가며 글레시아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난 저 인간과 계약을 했다.” 

“그건 네가 검일 때의, 외부에서의 이야기지 않나. 이곳은 정신계다. 그 계약이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지. 네가 저 인간에게서 벗어날 기회는 이곳밖에 없다!” 

하르바스의 말에 마음이 동했는지 글레시아의 분위기가 점점 싸늘해졌다. 

“저 인간부터 처리하고 우리 둘이 흑혈의 결투를 하는 거다! 너와 내가 제대로 된 몸으로 겨룬 것이 벌써 500년이 넘었다. 결투의 승자가 상대의 힘을 잡아먹고, 저 인간의 몸까지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크으...” 

글레시아가 차가운 신음소리를 냈다.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놈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승자는 더 이상 검에 묶여있지 않아도 된다. 저 인간의 몸으로 인간계를 마계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이런 기회를 놓칠 것이냐! 글레시아!” 

“크크큭! 그래. 이번만큼은 네 말이 맞아. 검에서 벗어날 기회라니, 쉽게 오는 것이 아니지.” 

글레시아의 눈이 차갑게 번쩍였다. 놈은 완전히 하르바스의 계략에 넘어갔다. 난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으로 이미 날 죽인 것처럼 말하는 악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레보다 못한 인간주제에 이 몸에게 협박을 하고, 명령을 내리다니!” 

차아앙! 

글레시아의 손에서 푸른 섬광이 튀어나와 내게 향했다. 하지만 그 섬광은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고 나를 뚫고 지나갔다. 

“마법이 통과되다니!” 

“음, 저 벌레와의 계약이 정신계 까지 이어진 모양이군.” 

“하르바스. 말이 다르지 않나!” 

“괜찮다. 달라진 것은 없어. 너 대신 내가 저 인간을 뼈째로 녹여주마.” 

“저 놈은 내손으로 얼려 부숴버리고 싶었는데...” 

글레시아가 이빨을 갈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르바스에게 맡긴다는 것 같았다. 

“크크크. 글레시아. 탁월한 선택을 한 거다. 우린 순혈의 악마. 설사 죽을지언정 인간의 밑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맞지. 거기다 인간의 몸을 얻을 최고의 기회가 아닌가.” 

“알고 있으니, 빨리 처리해라.” 

“크크크.” 

하르바스가 나를 비웃으며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난 놈을 무시하고 글레시아를 보았다. 

“이게 네 선택인가? 악마라도 계약은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 넌 악마라는 이름값도 하지 못하는군. 글레시아” 

“크크크. 그래서 내가 나선다고 하지 않나. 하등한 벌레여. 입 닫고 죽어라.” 

대답은 글레시아가 아니라, 하르바스의 입에서 나왔다. 난 여전히 글레시아에게만 시선을 주었다. 

“글레시아. 마지막으로 묻겠다.” 

“뭐?” 

“나를 도와 하르바스를 죽여라.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크크큭. 아주 제대로 미친놈이로구나. 기회? 그건 단어는 벌레인 네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까 하르바스도 내 손에 넣으라고 했지. 내게 도움을 주려 한 것이 아니었나?” 

“도움? 멍청하군. 나를 협박해서 계약한 놈이 뭐가 좋다고 도움을 주겠나! 내가 네 인간에게 잡혔으니, 하르바스도 잡히길 바란 것이다! 하등한 것과 말하는 것도 지겹군. 하르바스 뭐 하는 거냐!” 

글레시아는 당장이라도 날 죽이고 싶은지 이빨을 갈고 있었다. 

“크크큭. 알겠다. 바로 태워주지.” 

난 하르바스를 쳐다보지 않고, 글레시아에게 계속 시선을 유지했다. 

“글레시아. 그럼 나와의 계약을 해지하도록.” 

“정말 미쳤느냐? 네가 나와 계약을 해지한다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불에 타죽느니, 차라리 네게 얼어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진심인가?” 

“그렇다.” 

글레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손을 뻗으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미친놈이로구나! 좋다. 내 몸에 넣은 네 마나를 돌려주마. 네가 그것을 받아들인 순간 계약은 해지된다.” 

우우웅. 

놈이 보내준 내력을 도로 받아들였다. 

[혹한의 악마 글레시아와의 계약이 해제되었습니다.] 

“역시 하등한 종족인가, 얼어 죽는 고통을 모르는군.” 

“크크크. 네 소원을 들어주마. 유렌 록스 내가 너를 직접 얼려...크흑!” 

“크아악!” 

내게 다가오던 두 악마가 동시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지 놈들을 바닥에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포메라의 말이 맞았군. 조금 시간이 지나야 발동 되네.” 

“네, 네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으아악!” 

“크아아악!” 

“성석이라고 아나?” 

“서, 성석? 신성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하는 거냐? 크으윽.” 

성석이라는 말에 악마들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내 본체는 성석 아이템을 3개나 끼고 있거든. 그게 이제야 효과를 발휘하는 거다.” 

지금 나는 포메라에게 주었던 성석 목걸이, 성석 반지, 성석 팔찌를 모두 끼고 있는 상태다. 

“세 개를 모두 착용하면 세트 효과까지 주어지지.” 

세 아이템은 세트 효과를 발휘하여 내 정신력과 저항력을 몇 배는 높여주고, 빙의하거나 접근하는 악마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준다. 

“크으윽! 이, 이놈!” 

“죽여 버리겠다!” 

“글레시아. 그런 것을 적반하장이라고 하는 거다. 난 분명 네게 기회를 주었고, 마지막 기회를 걷어찬 것은 너다.” 

“이 하등한 놈이!” 

글레시아에게 힘을 합쳐서 하르바스를 죽이자는 것은 내가 놈에게 준 기회였다. 

그것을 받아들였으면, 글레시아는 아그네스처럼 나와 함께 가는 것이었지만 놈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글레시아에게 계약을 해지하자는 말을 한 것이다. 내가 직접 놈을 죽일 수 있도록. 

멍청한 글레시아는 내 의도를 모르고 계약을 해지해주었고, 이 꼴이 된 것이다. 

우우웅. 

정신세계에서 특수한 물건을 만드는 데는 많은 정신력이 소모 되지만 난 연위결의 수련과 성석 세트의 효과로 최고조에 이른 정신력을 갖추고 있다. 

성석 세트의 효과를 받지 못했던 포메라 때와는 완전 다르다. 

“할 수 있겠어.” 

글레시아와 하르바가만이 아니라, 아이자크까지 세 놈이 덤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귀왕살.” 

신살수의 이빨로 만든 귀왕살 백 자루를 허공에 소환했다. 귀왕살에 실려 있는 신살의 기와 그 숫자에 경악한 악마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으윽! 이, 이게 무엇이냐!” 

“인간. 아니, 유렌 록스! 다, 다시 계약을 하자. 평생 네 말을 따르겠다! 하, 한 번만 기회를!” 

“나,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죽는다면 마검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는 고철덩어리가 될 거다. 네 하인이 되어주마. 아니, 노예가 되겠다. 제발!” 

악마들은 고통에 헐떡거리면서 내게 빌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기차는 지나갔다. 

“주인을 무는 개는 필요 없다.” 

“크으윽! 죽여 버리겠다!” 

“크아아아! 겁화!” 

쿠와아아앙! 

빠지지직! 

하르바스와 글레시아가 성석이 주는 고통을 참으며 자신들의 기술인 불과 얼음의 폭풍을 소환했다. 난 거대한 뇌벽을 만들어 놈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마, 말도 안 돼!” 

“인간이 어떻게 이런 정신력을!” 

그들의 경악을 비웃어주며 들고 있던 오른 손을 내렸다. 

“멸락.” 

후우우우! 

허공에 떠 있는 백 개의 신살 귀왕살이 소낙비처럼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귀왕살은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매처럼 움직이며 두 악마의 전신을 노렸다. 

“막아!” 

“크아아악!” 

하르바스와 글레시아가 귀왕살들을 향해 불과 얼음을 퍼부었지만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고, 놈들의 몸은 귀왕살에 뚫려 순식간에 고슴도치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크어억...” 

“카악...” 

하나만 박혀도 지옥의 고통을 주는 귀왕살이 각각 40개씩은 박혔다. 신조차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거다. 

“으으억!” 

“이, 인간 따위에게 내가...” 

글레시아는 푸른 연기가, 하르바스는 붉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올라갔다. 

“진짜 끝났군.” 

귀왕살을 지우고 가벼운 한숨을 쉬었을 때 허공으로 날아갔던 푸른 연기와 붉은 연기가 응축되어 추락하는 용처럼 내게 떨어져 내렸다. 

“이건...” 

왼쪽에는 푸른 기운이 오른쪽에는 붉은 기운이 내려왔다. 아이자크와 마찬가지로 악마들이 가진 힘이 길을 잃고 내게 달라붙으려는 모양이다. 

우우웅! 

떨어지는 놈들의 마나를 잡은 순간 내 정신세계가 깨어지고, 현실에서 눈을 떴다. 

“엘루나?” 

내 왼손에는 글레시아가 오른손에는 하르바스가 들려 있었고, 아르시아는 뒤에, 로디엔은 내 위에서 엘라임을 타고 있었다. 

정신세계와 달리 현실에선 1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크으윽!” 

모든 것이 잘 끝났지만, 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악마가 소멸한 두 마검에서 대량의 마나가 미친듯이 내 몸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정신세계에서 받았던 마나들의 정체가 이것인 모양이다. 

“으으...” 

너무도 거대한 마나라 혈도가 파열되고 몸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검을 놓을 수도 없었다. 아교가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젠장!” 

난 검을 잡은 채로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만독자전신기를 운용하며 거대한 양극의 마나를 아주 천천히 받아들였다. 

두 마나의 속성이 상극이기 때문에 속보보다 안정성과 정확성을 중요시했다. 들어온 마나들을 혈도로 이동시켜 내력으로 바꾸는 것 만해도 혈도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끝이 없어. 이렇게 된 거 대주천에 도전해보는 게 좋을지도... 

지금까진 심법을 소주천으로 운용했다. 깨달음과 내력의 부족으로 임독양맥과 생사현관을 타통 할 능력이 되지 않아서 였지만 이젠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할 수 있어. 충분해. 

글레시아와 하르바스를 죽여서 전투경험의 경험치가 올라 깨달음이 충족되었고 마나의 양은 넘치고 있었다. 

지금이 화경에 오를 최고의 기회 같았다. 

쿠우우. 

임독양맥은 만년한철 문을 만든 것처럼 단단하게 막혀있었다. 내력을 갈고 닦아 임독양맥을 막은 탁기를 몰아쳤다. 

쿵. 

뇌가 흔들린 것 같은 통증과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탁기가 조금씩 제거되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을 참으며 계속해서 임독양맥을 두드렸다. 

지지지직. 

퍼엉! 

셀 수 없이 도전한 끝에 임독양맥이 뚫렸다. 

맥이 관통되는 순간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아찔한 충격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열린 혈도로 내력이 지나가는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고 시원할 수 없었다. 

찌직! 

생사현관은 얇은 막이었다. 임독양맥을 뚫은 내력은 순식간에 생사현관에 이르러 막을 가볍게 찢어버리고, 용맥처럼 내 몸 전체를 미친 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대주천을 이룬 것이다. 

대주천을 이루자 내공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였다. 임독양맥과 생사현관을 뚫고도 흘러넘치는 마나들을 단전의 내력으로 차곡차곡 바꾸기 시작했다. 

절대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전신이 개방된 감각이 들며,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희열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정신을 잃는다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정신을 다잡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잊고 무아에 빠져 끊임없이 만독자전신기를 운용했다. 

단전은 바다처럼 넓어졌고, 천무지체는 끝도없이 내 몸을 더욱 강하고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우우웅. 

악마들의 모든 마나를 흡수하고 대주천이 경지에 이르자 무아에서 깨어나 정신이 들었다. 몸은 깃털같이 가벼웠고, 정신은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만독자전신기가 7성에 도달했습니다.] 

[조화경(造化境)을 이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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