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검 vs 마검
후우욱.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검에서 나오는 열기에 목구멍으로 들어갈 침조차 바싹 말라버린 느낌을 받았다.
“저걸 누가 잡고 있는 거지?”
저 괴물 같은 검은 이곳에서 나올 무기가 아니다. 원작에서 중후반에 나와 주인공과 일행들을 위협하는 악마의 무기다.
후우욱!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어야 할 마검이 개방된 채 숲을 모조리 불태우고 있었다. 숲을 덮고 있는 화염과 연기 때문에 누가 검을 잡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 엘루나가...”
아르시아는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이를 악물었다. 항상 보여주던 부드러운 여유는 쥐죽은 듯 사라져있었다.
화아악!
마검이 만들어낸 기괴하고 지독한 불기둥은 닿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 있었다. 태우는 연기에서 마저 아릿한 열기가 퍼지고 있었다.
“아아... 숲이...”
“지, 지옥이야.”
“이걸 어떻게 해야...”
아르시아의 뒤에 있던 엘프들은 강렬한 불꽃과 열기에 밀려나며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나마 아린이 입술을 피나도록 깨물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제길.”
천무지체의 수화불침, 성석 세트 그리고 명룡의 보의에 추가된 속성저항 효과로 화속성에 큰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도 후끈함이 느껴질 정도니 엘프들은 서있는 것으로도 용한 상태일 거다.
이곳에서 전투가 가능한 것은 나와 아르시아 뿐이다. 아르시아를 보니, 그녀는 핏발이 선 눈으로 검이 만들어낸 화염폭풍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리얼!”
아르시아의 외침에 우리의 부드럽게 감싸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자연의 기운을 듬뿍 담은 바람이 뜨겁게 타오르는 열풍을 모조리 밀어내고 있었다.
콰아아아!
마검이 만들어내는 화염폭풍에 맞먹을 정도로 몰아치는 바람위에서 인세의 아름다움을 벗어난 여성이 걸어 내려왔다. 신비로운 모습과 거대한 존재감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아르시아. 너무 오랜만에 부르는 거 아니야?
“인사 나눌 시간 없어.”
-그렇게 보이네. 몇 백 년 만에 나온 엘루나가 이런 꼴이라니.
“이 주변의 열기를 모조리 날려버려. 저 불꽃들도.”
-분부대로 하지.
후우웅!
아르시아의 어깨에 내려앉은 에리얼이 손을 올리고 입김을 불자 모든 것을 잡아먹던 열기와 화염이 뒤로 쭉 밀려나기 시작했다.
에리얼. 바로 바람의 정령왕을 소환하는군.
아르시아가 소환한 에리얼은 모든 바람의 정령을 지배하는 바람의 정령왕이다. 그녀는 이 사태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처음부터 정령왕을 소환한 것이다.
콰아아!
에리얼이 일으킨 해일 같은 바람에 화염과 연기가 잠시 걷히고, 마검과 검을 든 자의 모습이 잠시 드러났다. 그 순간에 창조주의 눈을 사용했다.
[마검-하르바스] - 3단계 개방.
겁화의 악마 하르바스가 묶여 있는 마검이다. 검을 잡는 순간 하르바스가 소유자의 정신계에 침범하여 몸과 정신을 강탈한다. 하르바스를 잡은 인간은 세계를 태울 힘을 얻게 되지만 자신의 영혼도 타버린다.
특수능력: 인페르노, 겁화의 폭풍, 폭열의 대기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야. 하르바스가 맞았어.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 되어있어야 할 마검 하르바스가 봉인이 풀린 채 엘루나를 불태우고 있었다. 하르바스에게서 눈을 떼고 그것을 들고 있는 숙주를 보았다.
“저 괴물은...”
“우오오오오!”
아수라라도 만들려고 했는지, 오두십비(五頭十臂) 머리 다섯 개, 팔 열 개를 가진 상리를 벗어난 괴물이 소름끼치는 울음을 터트렸다.
“젠장! 또 그 놈들인가!”
본 순간 알았다.
삼두육비의 괴물은 세피로스에 속해있는 마의의 작품이라는 것을.
“마의. 이 미친놈이!”
최상급의 기사라고 해도 주인이 아닌 이상 하르바스의 폭주와 폭발을 견디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의는 하르바스의 폭주를 견디는 몸을 만들기 위해 재능과 체력이 넘치는 수백 명의 인간들을 해부한 뒤 다시 결합해서 키메라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증거로 놈의 몸엔 수 많은 바느질 자국이 나있었다.
“몬스터까지 섞었은건가...”
키메라의 모습을 보니, 인간만이 아니라 몬스터들까지 섞어놓은 것 같다. 플랑코나 트롤의 팔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지독한 놈들!”
세피로스의 행동에 이빨이 갈렸다. 놈들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왜 이 일을 벌였는지도 알 것 같다.
이건 나를 노린 것이 아니다. 세피로스는 엘루나를 위협해서 엘프들을 밖으로 이끌어 제국과 다른 나라들이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다.
“에리얼! 저 놈이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폭풍을 만들어서 가둬!”
-간단하군.
아르시아의 명령을 받은 에리얼이 양손을 들어 올려 하르바스를 가두는 폭풍을 만들었다. 하르바스를 접근을 막고 숲의 열기를 지우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릴 생각이었겠지만 이건 최악의 수였다.
“아르시아님! 안 됩니다!”
마검이 이미 3단계로 개방된 상태에서 시야가 막혔다. 만약 하르바스가 인페르노라도 쓴다면 그대로 전멸이다.
“유렌님? 그게 무슨...”
“젠장! 온다!”
화아악!
말이 씨가 됐을까 에리얼이 만들어낸 폭풍 한가운데서 눈을 태울 것 같은 주황빛이 타올랐다.
콰아앙!
화염으로 이루어진 광선이 폭풍을 찢어발기고 우리에게 쏟아졌다.
인페르노!
하르바스의 학살기 중 하나인 인페르노가 발동되었다. 물론 노리는 것은 나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생명들이다.
콰아아!
우리의 영혼조차 태워버릴 주황색의 광선은 에리얼의 다급하게 만든 폭풍과 바람의 벽들을 종이처럼 뚫어버리고 우리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상승의 경지가 발동됩니다.]
“아...”
엘프와 아린뿐이니라, 아르시아까지 반응하지 못했고 그들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에리얼이 자신의 몸에 정령력을 쏟아 부어 인페르노를 막으려 했지만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아주 잠시 시간을 버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리얼이 벌어준 한 순간 덕에 내게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나 혼자라면 인페르노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뒤에 있는 이들은 전부 죽을 것이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콰아아아!
이들을 놔두고, 도망칠 수는 없어.
휘돌리던 내공을 억지로 끌어올려 어떻게든 해보려고 할 때 내 머릿속을 스쳐가는 하나의 단어가 있었다. 이 상황을 완벽하게 해결해줄 마법의 주문이.
명룡의 보의!
“레비타스!”
쿠와아아!
흉갑을 뚫고 명룡의 보의 안에 있는 황룡이 깨어났다. 신묘한 힘을 가진 황룡의 머리는 그 거대한 입을 벌려 밀려들어오는 화염 줄기를 모조리 씹어 삼켜버렸다.
쿠우우우.
단 한 줄의 화염과 열기조차 놓치지 않고, 모든 불꽃을 먹어 치운 황룡은 내게 눈짓을 한 번 보내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어...”
“아...”
“이, 이게 무슨...”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던 모두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 않았다. 그들은 경악이 담긴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이이...”
하르바스를 든 키메라도 이해 할 수가 없는지 고개를 모로 틀고 나를 노려보았다. 레비타스는 한동안 쓸 수 없지만, 그건 인페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인페르노의 여파로 키메라의 팔 하나가 재로변했다.
“유, 유렌님. 바, 방금 그 용은 대체...”
아르시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상태였다.
“아르시아님. 지금은 그런 것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
“그, 그렇죠. 일단 저희 모두를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해요. 제가 모두를 죽일 뻔...”
“그것도 나중에 말씀하시죠. 우린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
아르시아가 나를 보는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에서, 의지해야 할 대상으로.
“미안해요. 정신 차릴게요.”
“전 저 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아르시아가 마음을 잡기 위해 자신의 뺨을 치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네?”
아르시아와 다른 엘프들이 넋이 나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검은 마검 하르바스라고 합니다. 자신의 주변을 태우며 점점 그 위력이 강해지는 마검이죠.”
“마검!”
“마검이라니!”
마검이라는 소리를 들은 아르시아와 엘프들이 소스라치는 비명을 질렀다.
“마검이면 설마 악마가 들어있는 건가요?”
“하르바스라는 불의 악마가 들어있습니다. 지금은 상태는 개방 3단계. 숙주의 의식을 완전히 잡아먹었으니, 주변의 모든 것을 태울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지금 막지 않으면 엘루나는 멸망할 겁니다.”
내 솔직한 말에 아르시아와 엘프들의 표정이 싸늘할 정도로 굳어졌다.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에 굵은 핏줄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저것을 막을 수 있죠? 알려주세요!”
아르시아는 날 경계하며 움직이지 않는 하르바스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숙주의 생명력을 완전히 없애거나, 마검을 파괴하거나 2가지입니다.”
하나 같이 어려운 일이다. 에리얼은 우리를 보호하다가 큰 힘을 소모해버렸고 뒤의 엘프와 아린은 솔직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 혼자 싸워야 할 것 같다.
“아그네스.”
-응.
“하나는 큰 방패, 하나는 내 몸을 덮을 망토로.”
-알겠어.
아그네스는 셸던의 루비를 얻어 화속성 저항력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 아그네스로 일행들을 보호하고, 두 번째는 내 몸을 덮어 놈과의 전투를 해야 할 것 같다.
쿠우웅!
아그네스는 흡사 벽 같은 거대 방패가 되어 엘프들의 앞을 막았다.
“이, 이건...”
“이곳에 있으세요. 아까 같은 것만 아니면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령들을 소환해서 주변의 불을 끄고, 번지는 것을 막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인지, 이 전장을 주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인지 엘프들은 두말 하지 않고 내 명령에 따랐다.
“빽빽아.”
“빽!”
“너도 도와줘.”
“빽!”
빽빽이도 옆으로 가서 불타는 숲에 신성력이 담긴 물을 쏟아 부었다. 녀석의 정령의 기운이 강해졌고 신성력이 담겼기 때문인지 엘프들보다 쉽게 불을 제어할 수 있었다.
“캬오!”
휘이이!
빽빽이의 옆으로 그리폰이 날아왔다. 그리폰은 빽빽이를 도우려는 듯 불이 번지지 않게 바람을 일으키며 열기를 지우고 있었다.
두 정령수는 처음의 어색했던 만남은 잊고,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알겠어요.”
아르시아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것은 둘밖에 없다는 것을 안 모양이다.
“에리얼. 할 수 있지?”
-끙. 방심하다 이 꼴이라니.
에리얼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마검의 열기를 걷어 내가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전부 일 것 같았다.
-너도 정신력과 정령력의 소모가 커.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난 괜찮아. 버틸 수 있어.”
“아르시아님. 제가 싸울 테니, 뒤를 봐주세요.”
“유렌님. 그건 이곳의 주인인 제 몫...”
“아뇨. 지금은 제가 싸우고, 아르시아님이 지원하는 것이 맞아요. 이곳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고집을 부리시다간 늦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르시아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 모양이다.
결국엔 저 괴물과 혼자 싸워야 하는군.
“후우...”
한숨을 내쉬고 아직도 나를 노려보는 하르비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르시아는 에리얼을 이용해서 내게 다가가는 화염과 열기를 필사적으로 막아 주었다.
“윽!”
놈에게 가까이 갈수록 열풍이 심해지고 온도가 높아졌다. 흡사 용암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젠장! 천무지체, 석성 세트, 아그네스, 명룡의 보의에 에리얼의 지원을 받는데도 이정도라고?”
놈이 있는 곳으 70m 안으로 들어가니, 내가 가진 모든 속성저항 아이템에 에리얼의 지원을 받은 상태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일단... 견제부터 해볼까?”
슈아앙!
십이 비도를 날려보았지만 놈에게 닿기도 전에 모조리 힘을 잃었다. 연위결을 사용해서 비도들을 다시 끌어올렸지만 마검에 화염폭풍에 맞고 모조리 튕겨나갔다.
“젠장, 이 이상 가면...”
지금 놈과의 거리는 40m 이 이상 앞으로 가면 버티는 것만으로 체력 소모가 심할 것이다. 이곳에서 해야 한다.
우우웅!
공격을 받았기 때문인지 가만히 있던 마검의 불꽃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검이라...”
앞에서 하르바스를 보고 있으니 석상의 던전 로벤에게서 얻었던 마검이 생각났다.
마검 글레시아는 원작에 나오지도 않고, 봉인되어 벽돌인 상태지만, 하르바스를 상대 할 수 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르잖아.”
귀왕살을 꺼내려던 손을 돌려 마검 글레시아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 하르바스를 휘두르던 키메라의 움직임이 멈췄다.
키아아아악!
키메라의 몸이 부르르 떨더니, 고막을 파열 시킬 것 같은 기괴한 울음을 내질렀다.
샤아아.
그 괴이한 소리가 멈추자, 시원하게 느껴지던 글레시아의 손잡이가 갑자기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밟고 있던 땅이 싸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쩌저정!
[하르바스와 글레시아가 마주쳤습니다.]
[글레시아의 봉인이 해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