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엘루나 (4) (144/241)

엘루나 (4)

검은 무미건조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움직이는 검로는 그렇지 않았다. 달인의 수준에 오른 검사가 휘두르는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고 체계가 잡힌 검로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

3번째 검로를 보는 순간 무슨 검술인지 바로 알아 차렸고, 검을 어디서 보았는지도 깨달았다.

‘검술은 크라시스 왕국 기본 검술이고 검의 모양은 카볼의 검술서에 있던 것과 똑같아.’

검이 홀로 움직이는 검로는 완벽에 이른 크라시스 왕국의 기본 검술이었고, 검의 형태는 카볼의 검술서의 나왔있던 검과 아주 흡사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공 수련을 하며 무아에 빠지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몸과 정신을 맡기는 무(無)의 상태가 된다.

지금은 기존의 무아와 달랐다. 나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검술을 볼 수 있었다.

‘이 일이 왜 발생 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이유가 있겠지.’

검이 펼치는 크라시스 왕국 기본 검술을 최대한 집중하며 관찰했다. 이 또한 수련이라 생각하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후웅!?

크라시스 왕국 기본 검술의 열여덟 자세가 끝나자, 검은 내게 인사를 하듯 공중에서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끝난 건가.’

크라시스 왕국 검술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또 달랐다. 검에 대한 이해가 더욱 늘어난 것 같았다.

스으으.

검이 점점 희미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끝났나 생각하고 있을 때 검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검이 아니, 도가 나타났다.

‘저 도는 로벨 왕국이군.’

도 역시 본 적 있는 형태다. 날카로운 검술로는 제일이라는 로벨 왕국의 무기로, 로벨 왕국 기본 검술서에서 보았던 도와 똑같은 형태다.

샤아악!

도 역시 크라시스의 검처럼 홀로 움직이며 로벨 왕국 검술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번에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로벨 왕국의 검술들을 눈에 담았다.

로벨 왕국 기본 검술 열여덟 자세를 끝낸 도는 나를 위협하듯 앞으로 빠르게 날아온 뒤 사라졌다.

‘검술에 담긴 특성과 검의 형태에 따라 성격도 다른 느낌이군.’

크라시스는 진중한 검로, 로벨은 예리한 검로로 나뉘는 것처럼 검의 성격도 다른 것 같았다.

다른 검술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대했지만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내가 보고 있던 흰 공간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끝났군.’

무아에 빠져있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음...”

눈을 뜨니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한숨도 자지 않았건만 10시간 이상 숙면을 취한 느낌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눈앞에 메시지들이 나타났다.

[더욱 진중한 검로의 크라시스 왕국 기본 검술을 펼칠 수 있습니다.]

[더욱 예리한 검로의 로벨 왕국 기본 검술을 펼칠 수 있습니다.]

[연위결로 펼치는 검술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내가 익힌 검술들의 장점을 극대화 시켜준 건가?”

정신세계에 있을 때 검들의 움직임에 집중하길 잘 한 것 같았다.

마이라는 구출 할 때처럼 언제 검술을 쓰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검술이 강해지는 것도 환영할 일이다. 만류귀종이라는 말처럼 암기술에 검술을 적합 시킬 수도 있을 테고.

“연위결로 펼치는 검술의 숙련도가 오른다는 건 설마... 어검인가?”

여태까지 연위결로 암기만 내리꽂았지 검법을 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할 수 없었다. 연위결의 숙련도가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가능 할지도 몰라.”

아이자크를 태워버리며 큰 성장을 이뤘다. 제대로만 된다면 정신세계에서 본 검들처럼 내가 들지 않고 연위겨로 검술을 펼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조만간 진짜 어검을 쓰게 될지도...”

**

“이거 괜찮네.”

엘프들이 가져다 준 음식들로 가볍게 아침을 먹었다.

우릴 위해 미리 준비한 듯 음식의 맛과 질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좋았던 건 후식으로 준 엘루나의 과일들이었다. 바나나의 모양에 키위의 색과 껍질을 합쳐놓은 것 같은 과일이었는데 신기하게 달달하면서도 끝 맛은 짭짤했다.

원래 과일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자연스러운 단 맛과 짠 맛이 조화되어 끊임없이 술술 들어갔다.

“빽!”

과일에 대한 설명은 빽빽이를 보면 된다. 몸이 두 배가 될 정도로 과일을 먹어서 날지도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빽.”

“그러게 왜 그렇게 먹었냐.”

“유렌님.”

손가락으로 빽빽이를 놀리고 있을 때 밖에서 데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 데이라는 맞이했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나요?”

“네. 잘 먹었습니다. 특히 과일이 맛있네요.”

“다행이네요.”

“이 녀석이 특히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훗.”

데이라는 내 어깨에 겨우 매달려 있는 뚱뚱한 빽빽이를 보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유렌님. 식사를 다 마치셨으면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족장께서 유렌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 혼자 말인가요?”

“네.”

“알겠습니다.”

숙소에 들어가서 옷을 챙겨 입고 데이라를 따라갔다. 그런데 데이라의 걸음은 엘루나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쪽은 밖으로 향하는 곳이지 않나요?”

“맞습니다. 대족장께선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데이라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설마 바로 그곳에 가는 건가?

데이라가 향하는 곳은 보통 장소가 아니다. 엘루나에 살고 있는 엘프들도 함부로 갈 수 없는 장소. 세계수가 뿌리를 뻗고 있는 곳이다.

“빽.”

난 아무 말 없이 데이라를 따라갔고, 빽빽이는 몸이 무거워 그런지 고개만 획획 돌리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데이라를 따라 한참을 움직이자 사다리꼴 모양의 투명한 문이 보였고, 그 옆에 아르시아와 로디엔이 나란히 서있었다.

“잘 주무셨나요?”

아르시아가 태양 같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를 해왔다. 딸을 잘 챙겨줘서 그런 건지, 손님으로 초대해서 그런 건지 지위에 비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의를 갖춰주고 있었다.

“덕분에 편히 잤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무시지 않은 것 같던데요?”

“네?”

“후후.”

역시 하이엘프의 감각은...

아르시아는 내가 자지 않고 수련을 한 것을 알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마나에 누구보다 민감한 종족이 하이엘프이니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로디엔의 질문에 아르시아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유렌님.”

“네.”

“죄송하지만, 던전에서 구하셨다는 거울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세필리아의 거울을 꺼낸 순간 아르시아의 표정이 변했다. 슬픔, 그리움, 아쉬움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표정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까지 그 감정에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세필리아...”

“네?”

“그 거울 주인의 이름이에요.”

아르시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서 거울을 받아갔다. 그녀는 거울을 쓰다듬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세필리아는 세계를 구하고 싶다며 자신들의 친구들을 따라 엘루나를 떠났죠.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이뤘지만,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해서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르시아는 세필리아의 거울을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

“세필리아는 엘루나로 돌아올지, 함께한 친구들의 곁에 남을지 고민하다. 결국 인간들의 곁에 남았죠.”

“어, 엄마. 대체 세필리아가 누군데 그렇게...”

“내가 너보다도 어렸을 때 세필리아에게 많은 것을 배웠단다. 내 언니나 다름없지.”

세필리아는 아르시아와 200살이 넘게 차이 났기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자매를 딸처럼 귀여워했다.

전쟁이 끝난 후 몇 달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인간들과 보내기로 정한 세필리아는 아르시아와 엘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엘루나에 연락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 했지만 마지막에 생각을 바꿔 엘프의 거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둔 것이다.

“정말 늦었지만 세필리아가 이제야 돌아왔네요.”

그 말은 하는 아르시아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나지는 않으십니까?”

“그게 세필리아의 실수에요.”

“실수라면...”

“세필리아는 인간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감정과 삶에 물들어버렸어요. 엘프는 개인의 삶을 존중하죠. 그녀가 한 선택이니 전 그 선택을 받아들여주는 것이 다에요.”

아르시아는 여러 감정이 녹아있는 미소를 지으며 거울을 보았다.

“다만 그녀의 마음이 조금 더 빨리 전해지지 않은 것에 아쉬움이 있을 뿐이에요.”

아르시아는 세필리아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들과 같이 있기를 선택한 것에 대한 실망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우우웅!?

아르시아가 거울에 자신의 정령의 기운을 넣자, 로디엔 때보다 훨씬 큰 녹색 빛의 세계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역시 맞네요.”

“엄마...”

아르시아는 다정한 눈으로 로디엔을 쳐다보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유렌님 덕분에 얻은 물건이니 함께 가시죠.”

“세계수에 가시는 겁니까?”

“그곳에서만 거울에 담긴 것들을 꺼낼 수 있어요.”

“전 외부인인데 가도 괜찮겠습니까?”

“유렌님이 거울을 가져와 주셨잖아요. 아마 좋은 경험이 되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못이기는 척하며 로디엔의 옆에 섰다. 아르시아는 사다리꼴 문 옆에 달려 있는 푸른 꽃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웅.

그저 평범하게 뚫려있던 문에 곳에 초록, 파랑, 노란 색이 섞인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저만 따라오시면 되요.”

아르시아는 그 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들어가세요. 뒤에 따라갈게요.”

로디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빛의 문으로 들어갔다.

“음...”

안은 왕궁에 만들어진 워프 통로처럼 빛이 일렁이는 공간이었다. 다만 워프 통로와 다르게 안정적이고 마음이 편해지는 분위기였다.

통로는 100m정도 밖에 되지 않아 금세 끝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아르시아가 들어간 곳이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열려 있는 출구로 들어갔다.

번쩍.

없다.

끝이 없다.

좌우로도, 상하로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하다 못해 위대한 나무가 내 앞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었다.

“아아...”

그 거대함에 목이 잠길 때 아르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계수 아르하임. 저희의 전부이자, 시작인 나무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말이... 나오지 않는군요.”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아르하임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그 크기를 보니 감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후후. 유렌님이 그렇게 당황하는 것은 처음보네요.”

로디엔이 옆에 서서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로디엔. 넌 처음에 왔을 때 너무 놀라서 울면서, 바닥에...”

“어, 엄마! 그런 말을 왜 해! 그땐 어렸잖아.”

로디엔은 소리를 지르며 아르시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야!”

“빽!”

빽빽이는 나무의 끝을 보고 싶은 듯 파닥거리며 날아올랐다. 아직 배가 빵빵했지만 날 수는 있는 모양이다. 힘든지 얼마 날지 못하고 돌아왔다.

“후후.”

아르시아는 빽빽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세계수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시작할게요.”

아르시아는 세계수에 거울을 가져다 댄 채로 정령의 기운을 담았다. 그러자 거울에서 나오는 녹색 빛이 세계수를 덮어씌우며 커지기 시작했다.

화아악!?

세계수와 일치될 기세로 커지던 녹색 빛은 나뭇가지와 잎에 이슬처럼 스며든 후 녹색 알갱이가 되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녹색 빛을 내뿜는 반딧불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그 빛들은 아르시아만을 향하고 있었다.

우우웅.

아르시아는 눈을 감은채로 그 빛들을 손에 모아 자신의 몸에 받아들였다. 그녀의 몸이 은은한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저 거울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감정, 생각m, 자신이 익힌 특별한 능력까지.”

놀라고 있는 로디엔에게 데이라가 나지막한 어조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럼 엄마는 지금 세필리아란 엘프의 감정과 생각을 받고 있는 거라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 말대로다. 세필리아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 평생을 갈고 닦은 검술, 궁술, 정령술에 대한 정보들을 거울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엘프들에게 전해지길 빌면서.

아르시아가 저 거울을 얻은 이후 엘루나의 엘프들은 한층 더 강해지고, 크라시스 왕국과 친교를 맺게 된다.

“하나 끝났군.”

한 에피소드가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 편히 아르시아를 보고 있을 때였다.

투쾅!

아직 하늘에 떠있던 녹색 빛들이 하나로 모여들어 내 옆에 있던 로디엔에게 쏟아졌다.

“이건!”

빛의 기둥에 휩싸인 로디엔은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기둥 속에 잠겼다. 로디엔에게 다가가려는 데이라의 손목을 잡아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유렌님! 이게 뭐하는 겁니까!”

“보세요. 로디엔에게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네?”

데이라는 내 말을 듣고 기둥을 자세히 보고 로디엔이 단순히 기절했고, 그녀를 감싸고 있는 빛이 순수한 자연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아르시아가 정상이었다면 설명을 해줬겠지만, 그녀는 세필리아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글쎄요...”

로디엔에게 벌어진 상황이 무언인지는 알고 있지만, 나도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건 지금 나올 상황이 아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이곳에서 무슨 일이 터지는 거냐?”

세계수를 올려다보며 말을 해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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