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엘루나 (3) (143/241)

엘루나 (3)

우리 앞에 내려선 것은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카우우!”

독수리의 날개, 앞발, 머리를 가지고, 몸은 사자인 신화 속의 동물 그리폰이 위를 올려다보며 커다란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폰의 울음이 향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공중을 지 맘대로 휘젓고 있는 빽빽이였다.

“빽?”

그리폰의 울음을 들은 빽빽이가 뭐 어쩔 거냐는 듯 픽하는 소리를 낸 후 내 어깨로 내려왔다.

“키아아!”

“그만!”

날개로 돌풍을 일으키려 한 그리폰을 데이라가 손을 올려 진정시켰다. 그리폰이 데이라의 손을 쳐다보다가 날개를 접었다.

“죄송합니다.”

데이라는 한 숨을 내쉬고 우리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따라 다른 엘프들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 이 몬스터는 대체 뭡니까?”

페루는 겁에 질렸는지 브리카의 팔에 매달려서 조심스러운 눈으로 그리폰을 쳐다보았다.

“몬스터가 아닙니다. 이 아이는 그리폰이라는 종으로 저 아이와 같은 정령수입니다.”

데이라가 내 어깨에 있는 빽빽이를 가리켰다.

난 그리폰을 몬스터가 아니라 정령수로 설정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폰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다.

“빼, 빽빽이와 같은 정령수라구요? 저 무시무시한 녀석, 아니 친구가요?”

“저희 생각했던 정령수와 많이 다르네요. 하하...”

모두들 정령수는 빽빽이만 봤기 때문에 그리폰을 빽빽이와 같은 정령수로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카오!”

“빽!”

그리폰은 데이라가 돌아있는 사이에 다시 빽빽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빽빽이는 대범하게도 그리폰의 날카로운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폰은 바람 속성을 가지고 있는 정령수에요. 정령수 중에서도 몸집이 커서 정령력이 강할 뿐 아니라, 물리력도 상당하죠.”

로디엔이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며 그리폰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폰은 눈을 감고 로디엔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같았다.

“그런 정령수가 왜 저희 길을 막은 겁니까?”

“저 아이 때문인 것 같아요.”

데이라가 빽빽이를 가리키며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빽?”

빽빽이가 무슨 소리냐는 듯‘난 아무 것도 한 거 없어.’ 라는 표정으로 데이라를 쳐다보았다.

“빽빽이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저희가 들어온 남쪽 길은 이 그리폰의 구역이에요. 원래라면 저희가 지나가든 벨로아가 지나가든 나타나지 않았을 테지만 벨로아의 정령의 기운이 워낙 거대하다보니, 그 힘에 반응 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영역을 차지하러 온 다른 정령수라고 생각한 건가요?”

“네. 맞아요. 자신을 위협하는 강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거죠.”

데이라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이 아이도 당황한 것 같아요. 다른 그리폰이나, 렉크란이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왔을 텐데, 이 엄청난 정령력의 주인이 평소에 거들떠도 보지 않는 벨로아였으니까요. 후후.”

데이라가 그리폰을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당황해 보이는 그리폰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빽빽이는 위에서 그리폰을 내려다보며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봐야 귀여울 뿐이었지만.

데이라는 빽빽이는 잠시 온 손님일 뿐이라고 하며 그리폰을 돌려보냈다. 그리폰은 돌아가면서도 빽빽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별일이 다 있네.”

“빽!”

“그리폰이 당황해서 허겁지겁 쫓아올 정도라니, 업어 키운 보람이 있다.”

“빽? 빽!”

빽빽이가 자신은 혼자 컸다는 듯 날개를 흔들었지만, 씩 웃고 녀석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폰을 만난 이후로 우린 아무 일 없이 숲을 지나며 엘루나로 향했다.

그리폰을 만난이후로는 빽빽이가 지 맘대로 날아다녀도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유로워 보여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우린 한참 동안 숲을 지나고 있었지만 워낙에 환상적인 모습의 숲이라 그런지 지루하지 않게 이동 할 수 있었다. 숲의 향과 분위기에 피로까지 사라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거의 도착했습니다. 조금만 힘을 내주세요.”

“괜찮습니다.”

“네. 갈 수 있어요.”

데이라는 다른 사람보다 체력이 약한 페루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페루는 데이라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는지 지친 와중에도 밝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럼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데이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려 할 때 뒤에서 로디엔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저, 저기 유렌님.”

“네?”

“그...”

로디엔은 앞에 있는 데이라의 눈치를 보며 말을 하는 것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난 살짝 걸음을 늦춘 다음 그녀와 나를 가두는 기막을 펼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말씀하세요. 데이라님에겐 들리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저, 저기 엘루나에 가셔서 제가 도박하고 다녔다는 말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해서요.”

“네? 음, 제가 딱히 말할 이유가 없긴 한데, 알겠습니다.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그, 그게 도박을 좋아한다는 것이 밝혀져도 상관은 없긴 한데요. 잔소리가 심한 아줌마가 좀 있어서요. 딱히 무섭지는 않아요. 정말로! 그냥 귀찮으니까요. 헤헤.”

“걱정 마세요.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근데 정말 무서운 건 아니에요! 잔소리 들으면 피곤하니까요.”

무슨 일로 조용히 부르나 했더니, 상당히 귀여운 고민이었다.

로디엔에게 잔소리를 할 엘프 아줌마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로디엔은 걱정을 덜었는지 편안한 표정을 하며 숨을 내쉬었다.

근데 상관없을 텐데, 이미 다 알고 있을 테니.

로디엔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전부 로디엔이 무서워하는 엘프의 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도박을 좋아하는지 까지 모두 알고 있을 거다.

모두에게 로디엔의 이야기를 전하는 와중에 어느새 엘루나의 입구 앞에 도착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곳이 엘루나입니다.”

데이라가 손을 들어 올려서 자신의 앞에 있는 엘프들의 성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세필 나무가 자연의 성벽이 되어 엘루나 전체를 둘러싸며 보호하고 있었다. 신이 만든 댐같은 모습이었다.

거대한 문은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아 보이지만 강력한 수문장들이 세필 나무 위에 모습을 감춘 채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음!”

“우와!”

“대단하네요.”

끝도 없이 솟아있는 세필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장대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입을 뚫고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옆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보다 더 놀라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후후. 들어가시죠.”

데이라의 우리가 놀라는 모습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아...”

“여, 여긴 무슨 동화 속 나라인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라니...”

“꿀꺽.”

차례대로 아린, 크라이드, 브리카, 페루의 반응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세필 나무를 지난 엘루나의 모습은 동화 속 왕국 그 자체였다.

엘프들의 집들은 나무와 숲을 이용해서 지어져, 자연을 전혀 해치지 않고 있었고, 그 위에는 정령들과 작은 정령수들이 자신의 빛을 뽐내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에는 한명 한명이 절세미인인 엘프들이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가운데 있던 녹색 머리카락의 엘프가 앞으로 나왔다.

“음...”

다른 엘프들도 아름다웠지만, 가운데 서있는 엘프에겐 차원이 다른 단아함과 우아함, 고귀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에서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엘루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엘루나의 대족장인 아르시아라고 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라시스 왕국 가이린의 영주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아르시아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아르시아는 일국의 왕과 같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내게 깍듯하게 인사를 해주었다.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나요?”

“데이라님과 다른 엘프분들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아르시아의 미소에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역시나 다르군.

외모에서 풍기는 기품부터 차이가 나듯 아르시아는 보통 엘프가 아니었다. 엘프보다 뛰어난 무력과 정령 친화력, 지능을 가진 엘루나의 유일한 하이엘프가 바로 내 앞에 있는 아르시아였다.

“로디엔이 유렌님께 실례를 하지는 않았나요?”

“로디엔님이요?”

갑작스럽게 로디엔의 이름이 나온 것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설명을 드리지 않았군요. 로디엔은 제 딸이랍니다.”

“어?”

“헉!”

“저 로디엔님이?”

놀란 척을 했지만, 당연히 알고 있었다. 로디엔은 하이 엘프 이자 엘루나의 지도자인 아르시아의 딸이다. 다만 로디엔은 아직 하이 엘프로 각성하지 않았다.

“그, 그러셨군요.”

“로디엔은 엘루나에 있을 때부터 워낙에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혹시 유렌님을 귀찮게 하지는 않았나요?”

“어, 엄마! 무슨 소리야!”

로디엔은 빨개진 얼굴로 아르시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로디엔이 잔소리가 많다고 했던 엘프 아줌마가 바로 저 아르시아다.

“귀찮다니요. 전혀 아닙니다. 로디엔님은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입니다.”

점수를 딴다던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나오는 사실을 전했다. 슬로스가 침입 할 당시에도 마이라의 호위를 맡은 건 로디엔이었으니까.

“아...”

“흐음...”

대답을 들은 로디엔은 내 눈을 피했고, 아르시아는 방긋 웃으며 부끄러워하는 로디엔을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그럼 정말 다행이네요. 후후. 이 아이도 이제야 철이 든 모양이에요.”

“엄마...”

“오시느라 피곤하실 것 같아서 쉴 곳을 마련해두었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빽!”

모두 이동을 하려 할 때 겨우 잡아둔 빽빽이가 미친 듯이 움직여서 아르시아에게 돌진했다.

빽빽이가 성장한 뒤 엘프에게 달려드는 것을 멈췄나 했더니, 하이 엘프인 아르시아에게서 나오는 순수한 자연의 향기엔 참지 못한 것 같다.

“유렌님의 정령수인가요? 벨로아라니 흔하지 않은 아이로군요.”

“죄송합니다. 그녀석이 워낙에 버릇이 없어서...”

“괜찮아요. 그런데 이 아이 특이하네요. 정령의 기운이 이렇게 많은 것도 놀랍지만, 속성이 3개라니. 대단해요.”

아르시아는 빽빽이의 능력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빽빽이를 살펴보았다.

“성격도 밝고 건강하네요. 주인을 굉장히 좋아하고 있어요. 후후. 착한 아이를 얻은 것을 축하드려요.”

“얘가 절 좋아 한다고요?”

“네. 굉장히.”

“음...”

빽빽이는 나는 안중에도 없고, 아르시아의 품에서 기뻐하고 있다 보니 그녀의 말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아르시아는 고맙게도 빽빽이를 안은 채로 엘루나를 간단히 소개해 주었고 피곤할 테니, 이야기는 내일 하자며 숙소를 안내해주고 돌아갔다.

“예상보다 훨씬 친절하게 대해주네.”

로디엔과 많이 친해져서 그런 건지, 최고 귀빈으로 모셔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엘프들이 생각이상으로 친절하게 대해주고 있었다.

“빼액...”

빽빽이는 푹신푹신한 거대 나뭇잎 위에서 꿀잠을 자고 있었다. 하루 종일 활개치다보니 피곤했던 모양이다. 잠시 녀석을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자연 그 자체라고 해도 될 장소라 그런지 기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퍼져있어.”

엘루나는 오염이 되지 않은 태고의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외부에 비해 몇 배는 많은 마나가 퍼져있었다. 숨 쉬는 것 만으로 내공이 쌓일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에서 내공 수련을 한다면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 오늘은 잠을 자기보다 내공 수련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루 안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

가부좌를 하고 만독자전신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빨려 들어오는 기의 양이 밖과는 차원이 달랐다.

가이린에서의 내공 수련이 물을 빨대로 빨아마시는 느낌이라면, 엘루나에선 대접에 있는 물을 통째로 마시는 느낌이었다.

마나만 많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거대한 흐름에 집중까지 잘 되고 있었다. 바다 같은 마나를 느끼며 무아지경에 빠져 들어갔을 때였다.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무아가 되어야 할 내 상단전의 정신 공간에 한 자루 검이 나타났다. 어디서 본 것 같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검은 홀로 있건만 누가 잡고 있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검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정립되고 체계화 된 검로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눈에 익은 검로였다.

설마 이 검과 검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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