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엘루나 (141/241)
  • 엘루나

    “음...”

    수련실에서 눈을 뜨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건가.”

    엘루나로 가기 전에 만독자전신기 7성에 오르고 싶어 며칠 동안 업무를 놓아두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아쉽게도 벽을 깨지 못했다.

    만독자전신기 6성부터는 단순히 내공이 많다고 다음 계단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공의 경지를 높여 깨달음을 얻어야하는데, 현재 모아놓은 내력은 충분했지만 깨달음이 모자라서 7성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급하게 생각 할 필요는 없겠지.”

    조급함은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수련실에서 나왔다. 해가 하늘 중앙에 떠 있는 것을 보니 정오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피곤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집무실로 올라갔다.

    “점점 많아지는 것 같네.”

    서류들을 처리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수북한 서류들이 다시 책상을 덮고 있었다.

    가이린에 사는 영지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내가 해야 하는 일 역시 많아졌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

    어차피 할 일이라 생각하며 바로 책상에 앉아서 쌓인 서류들을 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많아도 대충 넘길 수는 없기 때문에 꼼꼼히 살피며 확실한 서류에만 서명을 했다.

    무공을 익혀서 그런 건지 글을 읽는 속도와 생각을 하는 속도가 예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이 많은 서류를 처리하는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달칵!

    몇 장 남지 않은 서류를 보고 있을 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페루가 들어왔다. 그의 품에는 10장 정도의 서류가 들려있었다.

    “어? 언제 돌아오셨어요?”

    “좀 전에 왔어.”

    “수련실에서 나오셨으면 나오셨다고 말씀 좀 해주세요. 주인이 왜 이렇게 조용히 다니세요.”

    “귀찮아서.”

    “에휴... 헉!”

    페루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내가 처리해둔 서류를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좀 전에 오셨다면서요.

    “그런데?”

    “벌써 그 양을 끝내신 거예요?”

    “별거 없었으니까.”

    “일처리가 빠르신 건 알았지만, 정말 대단하시네요.”

    페루는 서명이 된 서류를 훑어보며 혀를 내둘렀다. 내 업무 처리 속도에 깜짝 놀란 것 같다.

    “그럼 오신 김에 이것도 해주세요. 헤헤.”

    페루는 놀라는 와중에도 가져온 서류들을 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난 피식 웃으며 남은 서류와 새로 온 서류를 모두 처리한 후 페루를 불렀다.

    “이쪽 식량부분 말이야. 숫자가 잘못 됐어. 0이 하나 많다.”

    “어?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실수한 모양이에요.”

    “그리고 병사용 검의 추가 요청도 500자루는 너무 많아. 새로 뽑은 병사가 100명이니, 그들을 포함해도 200자루면 충분해. 기존 것도 수리한 게 많으니까.”

    “아, 그것도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광산 쪽의 보호 영역은...”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서명을 하지 않은 서류 20장 정도를 페루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빠르게 일을 하시면서 이런 건 어떻게 다 보시는 거예요? 유렌님은 정말 이해 할 수가 없네요.”

    “못 보는 네가 이상한 거야.”

    “윽! 그렇긴 하지만요.”

    페루가 할 말이 없다는 듯 땅을 보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나도 당연히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다. 록스가에 있을 때 후작에게 교육을 받고, 이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익숙해진 것이다.

    “어쨌든 유렌님이 서류 업무를 하시는 것에 감탄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아부는 됐고, 로디엔은 어디 있지? 도박장이야?”

    “아뇨. 유렌님과 복귀하신 그날만 도박장에 가시고 그 이후로 계속 안가셨을 걸요.”

    “뭐? 도박장을 안가?”

    “네.”

    도둑이 눈앞의 금붙이를 가져가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놀라운 말이었다.

    로디엔에게 도박이란 삶과 같은 것이다. 미안하지만 내가 그렇게 설정을 했으니까.

    “그럼 어디서 뭐하는데?”

    “요즘 매일같이 연무장으로 출근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계실 거예요.”

    “음...”

    연무장에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그녀가 왜 그곳에 가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서류들 수정해서 다시 책상에 올려놔.”

    “알겠습니다. 연무장으로 가실 겁니까?”

    “그래.”

    페루를 돌려보내고 혼자 연무장으로 향했다.

    쩌엉!

    “이 소리는...”

    연무장 앞에 도착했을 때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밖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힘과 힘의 출돌음이었다.

    연무장 안에 들어가니, 연무장 중앙에서 로디엔과 크라이드가 맞붙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의 크라이드가 아니었다.

    콰아아아!

    콰아앙!

    전신이 폭주의 화염으로 뒤덮인 버서커 모드의 크라이드가 검을 휘둘렀고, 반대편에 있는 로디엔은 크라이드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공격력을 보이며 검을 밀어붙였다.

    “아린.”

    “오셨습니까?”

    뒤에서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아린에게 다가갔다.

    “로디엔이 요즘 매일 같이 나온다며?”

    “자신이 따라잡을 보람이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시면서, 2주 전부터 저희와 함께 수련을 하고 계십니다.”

    “역시 그런가.”

    로디엔이 엘프라고 해도 검을 수련하고 있는 무인이다 보니, 내가 싸우는 것을 보고 피가 끓어 올랐던 모양이다. 나를 따라잡고,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콰앙!

    버서커를 쓴 크라이드와 로디엔은 거의 호각으로 싸우고 있었다. 버서커 상태의 크라이드는 아린도 정면에서 싸울 수 없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자신을 실험하는 건가...”

    로디엔이 영리하게 싸웠다면 크라이드를 진즉에 이겼겠지만 그녀는 버서커의 괴력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힘과 민첩성이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발전해 있었다.

    쿠와앙!

    둘이 부딪친 충격에 연무장의 땅에 약한 진동이 일었다. 그 충돌이후 로디엔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아린.”

    “네?”

    “한계다. 말려.”

    “알겠습니다.”

    싸울수록 강해지는 크라이드와 달리 로디엔은 점점 지켜가는 것이 보여서 아린에게 싸움을 멈추라고 지시했다.

    저 상태의 크라이드는 대충하거나 중간에 멈추지 않기 때문에 로디엔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아린은 고양이처럼 살며시 움직여 크라이드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크라이드는 공격을 버티고 반격을 하려 했지만, 아린이 재빠르게 한 번 더 목을 쳐서 기절시켜버렸다.

    “왜 말리는 거죠? 어? 유렌님!”

    아린을 쳐다보던 로디엔이 이제야 날 발견하고 앞으로 달려왔다.

    “수련하러 오신건가요? 어때요? 한 판?”

    “도박 말인가요?”

    “엑? 그것도 좋긴 한데, 여기선 대련이죠.”

    “그것도 좋긴 한데, 지쳐보이시는데요?”

    로디엔의 말을 따라하자, 그녀가 날 살짝 흘겨보았다.

    “대련은 나중에 하죠. 지금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이요?”

    “네. 가시죠.”

    “아, 알겠어요.”

    로디엔을 응접실로 데려갔다. 그녀는 미리 준비된 차로 목을 적시고 보는 사람이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지었다.

    “수련실에 들어가셨다고 들었는데 잘되셨나요?”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입니다. 별로 얻은 것이 없어요.”

    “앞으로 잘 되실 거예요.”

    로디엔도 무인이었기 때문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희망적인 말을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실 말씀은 뭐죠?”

    “이 거울 제대로 보신 적 없죠?”

    “이건...”

    로디엔에게 세필리아의 거울을 보여주었다. 로디엔은 내 손에 들린 거울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가 갔던 던전의 엘프 석상에게서 나온 거울입니다.”

    “아! 그거군요!”

    “제가 알아보려고 했지만 어떤 물건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는 물건이신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는데요. 뒤에 있는 나무 무늬는 분명 본 것 같기는 한데.”

    로디엔은 거울의 뒤편에 있는 나무 무늬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무언가 생각날 듯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져가서 보시겠어요?”

    “알겠어요.”

    로디엔에게 거울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거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 무늬 분명 본 것 같은데...”

    로디엔은 거울의 무늬만을 살피며 눈을 감았다. 기억을 되새겨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로디엔님.”

    “네?”

    “엘프에게서 나온 것이니, 엘프의 모습으로 변해보면 어떨까요?”

    “그래볼까요?”

    로디엔은 내 말을 듣고, 반지와 목걸이를 빼고 거울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난 이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해 로디엔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그 엘프 석상은 상급 정령을 소환했잖아요. 거울에 정령력을 한 번 넣어보시겠어요?”

    “흠, 한 번 해볼게요.”

    로디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엘프의 거울에 자신의 정령의 기운을 넣은 순간이었다.

    우우웅.

    거울은 그녀의 손에서 요동치며 응접실 전체를 덮는 녹색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응접실의 천장까지 솟아올라 거대한 나무를 그리고 있었다.

    “음!”

    흡사 현대의 홀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이건 세계수 아르하임!”

    로디엔은 녹색 빛이 만든 나무의 형상을 보고 깜짝 놀라 거울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 응접실 전체를 빛내던 녹색 빛과 나무가 사라졌다.

    “이제 알겠어요. 거울의 무늬는 엘루나에 있는 세계수를 그리고 있었어요!”

    “세계수라고 하셨습니까?”

    모두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표정을 얼음장처럼 굳혔다.

    “네. 아르하임은 저희 엘프들의 국가인 엘루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세계수에요. 아르하임이 너무 거대하다 보니, 이 그림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아까 그 빛을 보고 확실히 알았어요. 이 거울에 그려진 그림과 녹색 빛은 모두 아르페인을 보여주고 있어요.”

    “세계수라니...”

    “던전의 엘프 석상이 엘루나나 아르하임과 무슨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이 거울에 대해 엘루나에 이야기를 전하고 와도 될까요? 유렌님의 물건 인건 알지만 세계수가 그려졌다는 건 저희에게 굉장히 중요한 물건일거예요.”

    로디엔이 양손을 맞잡고 간절한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계획한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입니다. 엘프분들의 물건이라면 돌려드려야죠.”

    “정말이세요?”

    “정말입니다.”

    세필리아의 거울은 내게 있어봐야 쓸모가 없다. 저 거울은 말하자면 교환용 아이템이다. 엘프들에게 주고, 다른 물건을 받아 올 교환용 아이템.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 이야기를 전하고 올게요.”

    “알겠습니다.”

    로디엔은 반지와 목걸이를 다시 끼고, 응접실을 나갔다. 난 거울을 도로 챙기면서 빙긋 웃었다.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동안은 수련이나 해야겠군.”

    **

    로디엔이 엘루나에 소식을 전하고 나서 5일이 지났다. 역시나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집무실로 로디엔이 찾아왔다.

    “유렌님.”

    “이제 돌아오셨군요. 소식은 전하셨습니까?”

    “네. 전하고 답신까지 받아왔어요.”

    “어떤 내용이죠?”

    “그런데...”

    “무슨 일이죠?”

    로디엔이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 말고 다른 엘프에게 거울을 보여주실 수 있을 까요?”

    “다른 엘프라고 하셨습니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가 사고를 많이 쳐서 그런지 믿지 못하나 봐요. 정확한 확인을 위해 엘프를 보낸다고 해서요. 죄송해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저, 정말요?”

    “네. 모시고 오세요.”

    원작에서도 엘루나에 가기 위해서 다른 엘프를 만나야 했다.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마워요!”

    신이 난 얼굴로 웃는 로디엔의 호감도가 엘리베이터 타듯이 쭉 올라갔다.

    “그럼 내일 자정에 이곳으로 데리고 올게요.”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똑똑.

    다음날 자정이 지났을 무렵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미리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올 사람은 한 명뿐이다.

    “들어오세요.”

    로디엔이 조심스러운 눈을 한 채 집무실에 들어왔고 그녀의 뒤로 로브를 입은 자가 따라 들어왔다. 그 자는 바로 로브를 벗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뽀족한 귀, 큰 키와 얇은 체형, 바다처럼 푸른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였다. 그녀는 인간세계에 익숙한 듯 내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가이린의 영주께 인사드립니다. 신갈목의 부족의 네 번째 가지의 두 번째 잎 데이라라고 합니다.”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데이라의 목소리는 감정의 고하가 없었다. 흡사 아름다운 인형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세계수에 관한 것은 저희에게 1순위로 중요한 일인지라, 늦은 밤에 급하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이해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세필리아의 거울을 꺼냈다. 거울을 본 데이라의 눈이 번쩍였다.

    “이게 그 거울입니까?”

    “직접보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거울을 데이라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로디엔에게 미리 들었는지 거울에 자신의 정령의 기운을 집어넣었다.

    화악!

    로디엔이 정령의 기운을 넣었을 때와 똑같이 허공에 녹색 빛의 세계수가 떠올랐다.

    “아르하임!”

    로디엔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는지 데이라의 입을 뚫고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데이라이 놀람에 잠겨 정령의 기운의 주입을 중지하자 빛이 사라졌다.

    “정말 세계수라니...”

    데이라가 경악어린 표정을 지으며 거울을 잡고 있는 손을 떨었다.

    “내가 확실하다고 했잖아!”

    “로디엔님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데이라의 말을 들은 로디엔이 얼굴을 찡그렸다. 데이라는 거울을 앞뒤로 살펴보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번 일은 엘루나의 원로들께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들이 유렌 자작님께 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전하신 말이라면...”

    “유렌 자작님을 최고 귀빈으로 엘루나에 초대하라 명하셨습니다.”

    데이라는 엘프가 행하는 최상급의 예법인 손을 나무를 그리는 자세를 취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행동에 로디엔은 충격을 먹었는지 데이라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정말이야? 유렌님을 엘루나에 초대한다고?”

    “그렇습니다.”

    “세상에...”

    로디엔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엘루나의 엘프들과 거래를 한 인간들은 있지만, 엘루나 안에 들어간 인간은 최근 200년간 아무도 없었다.

    “음...”

    잠시 생각을 하는 척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데이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초대를 받아들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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