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상의 던전 (4)
‘너와 보는 것이 다르다.’라는 말은 폼을 잡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나에 대한 다짐이었다.
지금까지 그저 살기위해 혹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수련을 해왔지만 이젠 도달해야하고, 넘어서야 할 목표가 생겼다.
천수암왕 당천위.
그 절대적인 존재를 따라가기 위해 미친 듯이 수련을 해왔고, 이제 그 능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
“그 공격을 그리 간단히 무력화 시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네 생각이고.”
엘프 석상이 등에 메고 있던 활과 화살을 꺼내 들었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영웅 세필리아의 석상]
세계를 구한 5인의 영웅 중 한 명인 세필리아가 자신의 힘을 불어넣은 석상이다. 상급의 정령을 소환하며, 달인 급의 궁술, 최상급의 검술을 사용한다. 원거리, 중거리, 근거리 전부 전투가 가능하다.
특수능력: 융합 정령 마법, 분살, 점형 오러.
“건방진...”
세필리아의 석상이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바로 앞으로 달렸지만, 그녀의 화살이 더 빨랐다.
슈아앙!
실피드가 날아가는 화살에 입김을 불어넣어 속도와 파괴력을 상승시켰다. 엘프의 석상보다 4배는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화살을 귀왕살의 빗면으로 흘렸다.
캬컁!
화살은 빠른 것이 다가 아니었다. 목재화살이지만, 위력은 철재 화살 못지않았다. 손을 흔들어서 남아 있는 힘의 여파를 털어버렸다.
빠지지직!
뇌익을 사용해서 고속으로 달려갈 때 세필리아가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시위에 걸려있는 화살에 오색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분살(分殺).”
세필리아가 날린 화살이 여러 방향으로 퍼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10개의 화살로 나뉘어 내 전신으로 날아들었다.
슈아아앙!
아는 기술이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손바닥을 내 뻗었다.슬로스의 파동을 막아냈던 미완의 기예 뇌벽(雷壁)이다.
빠지지직!
원형으로 퍼져나간 뇌기가 날아오는 화살들을 단숨에 지져버렸다.
“아니!”
세필리아는 놀란 눈으로 뇌벽이 생겨난 곳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난 이미 그곳에 없었다.
파아앙!
옆으로 빠져나가 파이어 드레이크의 몸통을 향해 귀왕살을 날렸다.
“그 따위 단검으론 소용없다!”
세필리아는 파이어 드레이크의 방어력을 믿는지 방어를 하지 않고 내게 공격을 하려하고 있었다. 실피드의 폭풍의 칼날과 분살을 동시에 날려 왔다.
“아닐걸.”
하지만 이건 그녀의 실수다. 지금은 방어를 했어야 했다.
퍼억!
“카오오오!”
귀왕살은 파이어 드레이크의 외피를 두부처럼 찢고 들어갔다. 놈은 귀왕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역소환 되었다.
“어, 어떻게...”
세필리아가 당황했는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파이어 드레이크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우우웅.
연위결을 사용해서 떨어지는 귀왕살을 다시 손으로 불러들인 후 실피드를 향해 날렸다.
슈아앙!
세필리아가 당황한 와중에도 화살을 날렸고, 실피드가 폭풍의 장막을 사용했지만 소용없었다. 귀왕살은 화살은 피해버리고, 장막은 찢어버렸다.
“꺄아아...”
실피드는 도망치려 했지만 귀왕살이 갑자기 속도를 올리며 실피드를 그대로 꿰뚫어버렸다. 정령은 비명조차 다 지르지 못하고 정령계로 역소환 되었다.
파아앙!
충격을 받았는지, 세필리아가 날리던 분살이 이리저리 흩어져 단 한 발도 내게 도달하지 못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상급 정령들을 한 방에? 말도 안 돼!”
상급의 정령을 일격에 역소환 시킨 것에 세필리아만이 아니라, 로디엔도 소스라치게 놀란 모양이다. 그녀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불가능해...”
세필리아의 석상이 활을 내려놓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감정표현을 하는 석상이라니, 저게 더 놀라운 것 같았다.
“역시 신살인가.”
사실 파이어 드레이크와 실피드를 역소환 시킨 것은 내 힘이라기보다 신살이 담긴 귀왕살의 힘이다. 신마정영의 모든 존재에게 치명적인 힘을 발휘하는 귀왕살의 능력에 정령들이 역소환 된 것이다.
“이제 끝을 내자.”
귀왕살을 비틀며 말하자, 세필리아의 석상이 활을 집어던지고, 허리춤에 있던 레이피어를 꺼내들었다.
“석상치곤 시원한 성격이네.”
부우웅!
세필리아의 레이피어에서 길게 뻗은 오러가 솟아올랐다. 마스터에 오르진 못했지만, 최상급 기사에 맞먹는 능력이다.
챠아앙!
귀왕살을 역수로 잡고, 세필리아에게 돌진했다.
레이피어의 오러가 다섯 방향으로 흩어져 내 전신을 노렸지만, 귀왕살로 반원을 그리며 레이피어의 날을 멀리 튕겨버렸다.
피이잉!
귀왕살에 밀려나간 세필리아의 레이피어가 부러질 듯 휘어졌다.
“뇌엽!”
그 틈을 노려 벼락의 신이 깃든 듯 노랗게 번쩍이는 왼쪽 주먹으로 세필리아를 내리쳤다. 그녀가 재빠르게 레이피어를 회수해 방어를 하려 했지만, 뇌엽은 그녀의 오러를 가볍게 뚫어버렸다.
콰아앙!
낙뢰처럼 떨어지는 주먹에 레이피어가 부러지고, 세필리아의 석상이 반파되었다. 핵까지 반으로 쪼개졌기 때문에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몰랐군.”
“어, 잠깐.”
이 던전의 목적은 영웅들이 후대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즉, 시험을 치르고 능력이 되는 자에게 자신의 유물을 물려주는 방식인데 어쩌다 보니 흥이 올라 시험관을 때려 부숴버렸다.
아이템을 주지 않을까봐 갑자기 불안해졌다.
“설마 널 죽였다고 보상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세필리아는 그것엔 대답하지 않고,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완전히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걱정했지만, 다행히 석상이 사라진 곳에 아이템이 떨어졌고 옆에는 출구로 향하는 마법진이 나타났다.
“다행이네. 그런데 세 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해서, 마법진에 눈이 가지 않았다.
원작에서 세필리아의 석상이 주는 아이템은 성석의 반지와 엘프의 거울 두 가지다. 하지만 이곳엔 처음 보는 팔찌가 추가로 나와서 세 가지 아이템이 떨어져 있었다.
“설마, 석상을 때려잡아서 하나 더 준건가?”
성석 반지와 엘프의 거울을 챙긴 뒤, 팔찌를 들어올렸다.
[세필리아의 팔찌]
세필리아가 엘프의 숲을 떠날 때 그녀의 아버지가 주었던 팔찌다. 사대 속성을 강화시켜 주어서 마법과 정령 마법의 위력이 크게 상승한다.
“대박.”
얻어 걸린 아이템 치고는 엄청난 옵션이라, 기뻐하며 팔찌를 팔에 낄 때 빽빽이는 세필리아가 무너진 자리로 가서 그녀의 정령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맛있냐?”
“빽!”
정령의 기운을 흡수하고, 기분 좋게 대답을 하던 빽빽이의 전신이 빛나기 시작하며 녀석의 주위로 자연의 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점차 빛이 사그라지며 달라진 빽빽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너...”
“빽!”
빽빽이의 외형은 흰머리오목눈이다. 꽁지와 날개 위쪽을 제외하면 온통 흰털뿐인 솜뭉치 같은 모습인데 꽁지와 날개의 검은 색이 조금 진해졌고, 크기가 아주 약간 커졌다.
“빽빽이의 정령의 기운이 엄청나게 올라갔어요!”
로디엔이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그녀는 빽빽이를 살펴보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성장이 가능하다니...”
그녀의 말대로 조금 변한 외형과 달리 빽빽이 속에 잠재되어있던 정령의 기운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빽!”
특히나 녀석의 자신감은 올라간 힘 이상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생쥐에서 사자가 된 것처럼 날개를 버둥거리며 자신의 위용을 뽐내려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론 그저 귀여울 뿐이었지만.
“유렌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한 대도 안 맞았으니까.”
내가 걱정됐는지, 아린이 다가와서 내 전신을 살펴보았다.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린. 여기서 나가야 하니까. 모두 불러와.”
“알겠습니다.”
아린이 곧바로 다른 사람들을 불러왔고, 우리는 동시에 마법진에 올라갔다.
우우웅.
마법진은 천장과 똑같은 녹색 빛을 발하면서 우리가 처음에 도착했던 선택의 방으로 보내주었다.
“바로 움직이자, 제국에게 보물들을 뺐길 수는 없어.”
“알겠습니다!”
기사의 석상 옆에 있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콜로세움 같은 원형경기장이 나타났다.
“석상은 전부 부서졌습니다.”
바닥에는 기사들의 석상들이 부서져 있었다. 눈을 감고 비비드 사냥개로 흑검의 위치를 찾아보려 했지만 거리가 멀어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부터 달린다. 빽빽아.”
“빼액!”
빽빽이가 기운차게 대답을 하며 날아올랐다. 녀석은 길을 안내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뒤로 바람을 불러와서 이동속도를 빠르게 만들고, 지치지 않게 해주었다.
원래의 빽빽이라면 힘이 달려 금방 지쳤겠지만, 성장한 덕인지 한참동안 바람의 장벽을 펼쳐주고 있었다. 녀석은 드디어 자신의 밥값이상을 하고 있었다.
“나왔다.”
20분정도 달렸을 때 비비드 사냥개의 반응이 되살아났다. 흑검의 움직임이 빨라진 것을 보니, 무언가를 발견했거나, 정체를 드러낸 것 같았다.
“아린.”
“네.”
“먼저 갈 테니, 빽빽이를 따라와.”
“알겠습니다. 다만.”
“다만?”
“조심하십시오.”
“그래.”
아린의 진심어린 걱정에 웃으며 답을 해주고, 뇌익을 극성으로 사용해서 흑검이 있는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
“정리는 끝났나?”
“예! 기사 석상 10개 모두 파괴했습니다. 저희 피해는 경상 4명입니다.”
지크 사이온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기사에게 묻자, 그가 기계처럼 바로 대답했다.
“이번엔 경상이라 다행이군. 아무리 기사의 석상이라 해도 오러 기술을 사용하다니, 미친 일이야.”
“거기다 석상들은 듣도 보도 못한 검술을 쓰고 있습니다.”
“입구에 있던 석상들은 말 그대로 준비운동조차 되지 않았어.”
기사의 길로 향한 지크와 제국의 탐사대는 기사들의 석상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해왔다. 그 와중에 3명의 기사가 목숨을 잃었고, 마법사 한 명이 중상을 입었다.
“생각지도 못한 손해야.”
“네. 함정이 아니라, 몬스터가 이리 강할 줄은 생각 못했습니다.”
데리고 온 트레져 헌터가 제 역할 해줬기에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기사들이 당한 것에 지크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마법진으로 보건데 다음이 마지막 방이겠군. 모두 30분간 휴식.”
지크가 다음 방으로 향하는 마법진 앞에서 모두에게 명령을 내리자, 기사들이 벽에 기대서 투구를 벗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쉴 준비를 할 때 중상을 입어 벽에 기대 앉아 있던 금발의 기사가 홀린 것처럼 일어나 검을 뽑았다.
“너 왜 그래?”
금발의 기사는 자신을 부축하던 동료기사를 슬쩍 쳐다보다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샤악.
가벼운 바람소리가 흘러가자, 기사의 목이 땅에 툭 떨어졌다.
“후후.”
금발의 기사의 검에서 불길함이 가득 담긴 검은 오러가 뭉글뭉글 흘러나왔다. 그 불길함을 느낀 기사들이 뒤를 돌아봤지만 한 발 늦었다.
샤아악!
그저 일격.
횡으로 휘두르는 단 일 검에 탐사대원들의 몸이 반으로 양분되었다.
푸아아악!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쓰러지며 피를 뿌렸고, 그들이 흘린 피로 바닥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런 미친놈!”
금발의 기사 아니, 세피로스의 흑검은 당황해하고 있는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지크가 정신을 차린 뒤 돌진하는 흑검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힘과 예리함이 부족했다.
타앙!
흑검은 지크의 검을 튕겨버리고 어깨로 그를 강타했다.
우지직.
지크의 철제 갑옷이 우그러지고, 그가 피를 토했다.
“커헉...”
흑검은 여유를 부리듯 천천히 걸어왔고, 지크는 이를 악물며 검에 염화의 오러를 둘렀다. 그것을 본 흑검의 검에도 검은 오러가 타올랐다.
콰아아앙!
화염검과 흑검이 부딪치며 대기가 타올랐다. 지크는 큰 내상을 입었기 때문에 흑검의 검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제국의 미래라고 했던가? 별거 아니군.”
“네놈이 감히!”
콰아아앙!
흑검의 검에 타오르던 검은 오러가 그의 전신에서 폭발했다.
“커억!”
지크는 그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벽으로 튕겨나가 거칠게 떨어졌다. 그는 뼈가 부러졌는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지크가 제 실력을 발휘한다면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겠지만, 흑검의 배신과 동료들의 죽음에 당황해서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으으...”
“네 죽음으로 제국이 다시 움직이겠지. 너희 전투광들이 바라는 것을 이뤄주는 것이니, 원망하지 말도록.”
“네...놈...”
흑검이 지크의 앞에 서서 검을 수직으로 들어올렸다.
“뒷일은 내게 맡기고 잘 가라. 지크 사이온.”
“네놈은 내가 죽어서라도...”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크크.”
지크는 너무도 분해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흑검이 그를 비웃으며 검을 내려찍으려 할 때 뒤에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늘려왔다.
슈아앙!
챠앙!
“누구냐!”
흑검이 날아온 단검을 쳐내고 뒤를 돌아봤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어디 보냐?”
“어?”
흑검의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황급히 물러나려고 했지만, 주먹이 더 빨랐다.
콰앙!
“크흑!”
주먹을 간신히 막았지만, 그 힘의 여파에 흑검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네, 네놈이 어떻게 여길!”
기가 막힌 듯 핏대를 올리는 흑검을 향해 유렌이 주먹을 털어내며 피식 웃었다.
“너 잡으러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