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상의 던전 (2)
“영주님.”
“음?”
“마탑에 도착했습니다.”
슬로스가 죽었던 곳에서 나온 보랏빛이 내게 흡수된 것을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마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유렌님. 괜찮으십니까?”
아린이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멀쩡해.”
이들에게 물어봤지만, 보라색 빛을 본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어떤 이상한 점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그 찢어진 흰색 방과 비슷했어.
보랏빛이 흡수될 때의 느낌은 구슬을 잡고 흰색 방에 소환 될 때와 비슷했다.
정말 알 수 없군.
이번에 얻은 이름을 잃은 자의 파편에 대해서는 나도 알지 못한다. 슬로스라서 얻은 건지, 칠죄종을 잡아서 얻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스토리의 중요한 라인을 차지하는 칠죄종을 죽여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할 것 같긴 하지만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조금 답답한 상태였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네. 괜찮아요. 들어가죠.”
들어가지 않고, 마탑의 문 앞에서 멍하니 있자, 로디엔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에게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주고, 마탑의 문을 열었다.
“오셨군요.”
카운터 앞에 있던 파란색 머리카락의 중년인이 우리를 보며 인상 좋은 웃음을 지었다.
“금탑의 마법사. 카론 에프린이라고 합니다.”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가이린을 홀로 구한 영웅을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카론과 악수를 마친 뒤 창조주의 눈을 사용해서 그의 정보창을 보았다.
[이름: 카론 에프린]
[특성: 유틸의 장인, 공간 장악lv3, 마나 배치lv3, 고속 계산lv3 ]
[호감도: 48 (호감) ]
[현재 기분: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있음. ]
역시 금탑의 마법사를 요청하길 잘한 것 같다.
카론이라는 마법사는 진심으로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데다가 6서클을 달성한 실력자다.
5서클정도를 보낼 거라 생각했는데, 6서클 마법사라니, 역시 금탑과 좋은 관계를 맺어두길 잘한 것 같다.
“유렌님과 같이 던전 탐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론은 내 뒤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법사치고는 친화력도 나쁘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모두 워프 룸으로 가주시죠.”
우리는 카론의 안내를 받아 마탑의 워프 룸으로 이동했다. 요즘은 포메라의 워프만 이용해서 그런지 워프 룸에 들어가자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도착장소에 불균형한 마나가 흐르고 있어서 조금 흔들릴 수 있습니다. 모두 준비 되셨습니까?”
카론이 마지막으로 워프 룸에 들어와서 모두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네. 출발하시죠.”
“알겠습니다.”
카론이 주문을 외우며 발을 구르자,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느낌이 들며 순식간에 세상이 변했다. 온통 백색이던 워프 룸에서 바위와 잡초만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던전의 입구는 뒤에 있습니다.”
카론의 말에 뒤를 돌자, 던전의 입구가 보였다. 열 개의 기둥, 삼각의 지붕 그리스의 유명한 신전을 보는 것 같은 외형 석상의 던전이 확실했다.
“우와...”
“굉장하네요.”
“저게 던전의 입구군요.”
크라이드와 브리카가 생각보다 거대한 던전의 입구를 보고, 완전히 얼어버렸다. 로디엔은 던전에서 나오는 마나의 향기를 느꼈는지 눈을 감고 그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저기 유렌님?”
눈을 뜬 로디엔이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난 그녀를 따라 약간 뒤로 물러났다. 기막을 펼쳐서 말소리가 새나가는 것을 막았다.
“말씀하세요.”
“제가 잘못 느낀 것이 아니라면, 저 안에서 저희 종족의 향기가 느껴져요.”
“정말입니까?”
“네. 엘프 본인인지, 아니면 그가 남긴 유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디엔에게 모르는 척을 했지만, 난 저 안에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던전 안에는 두 개의 길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길은 갈 수 있지만, 끝의 문은 엘프에게만 열려진다.
로디엔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바로 그 길의 끝에 있는 엘프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알겠습니다. 그 내용은 일단 우리만 아는 것으로 하죠.”
“네. 알겠어요.”
로디엔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곧 던전에 들어갈 거다. 지금이 보충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니, 장비, 식량, 물자들을 확인해 보도록.”
“네!”
“예!”
“난 잠시 입구에 다녀오겠다.”
모두에게 장비와 물자의 확인을 지시하고, 혼자 던전의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 있던 10개의 석상들 중 4개가 부서졌고, 6개는 건재한 상태였다.
“아직 들어가지 않았군.”
제국의 탐사대가 도착했다면 이 석상들은 모조리 부서져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저것들을 놔둘 리가 없으니까.
부서진 네 개의 석상들은 이곳에 정찰을 나온 기사들이 부쉈을 것이다.
“잠시 기다려야겠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모두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들었다. 제국의 탐사대를 만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던전에 들어가지 않고, 조금 기다렸다.
화아악!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건물 바로 앞에서 강렬한 빛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제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군요.”
그들이 제국의 탐사대임을 가장 먼저 알아본 카론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기사들의 갑옷에는 제국의 매가 새겨져 있었고, 마법사들의 로브에도 매가 수놓아져 있었다.
몇몇은 용병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창조주의 눈으로 보니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트레져헌터였다.
“제국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꽤 많네요. 용병도 있는 거 같고.”
크라이드가 숫자를 세보더니, 침을 꼴깍 삼켰다. 확실히 저들은 기사들의 수만 해도 20명이 넘었고, 마법사들도 3명이나 되었다.
“숫자가 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당백이지 않습니까!”
크라이드와 반대로 브리카는 숫자가 뭐가 중요하냐고 하며 당찬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참 웃기게도 둘의 성격이 반대고, 특성도 반대다. 버서커인 크라이드는 평소에 소심하고, 수호자인 브리카는 평소에 생각 없이 무대포로 산다.
“후후.”
둘의 성격과 특성이 반대인 것이 재밌어서 웃음이 나왔다.
“브리카의 말이 맞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하면 된다.”
“맞습니다. 유렌님!”
“알겠습니다!”
모두는 내말에 동의를 하듯 제국의 탐사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제국의 탐사대의 가운데에 있던 젊은 청년이 우리를 발견하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이목구비, 묵직한 대검 같은 기세의 남자였다. 원작과 같이 이 남자가 온 것이 다행이었다.
“크라시스 왕국이로군.”
“그쪽은 제국인가.”
남자의 말버릇을 따라하자, 그는 기분나빠하기 보다 오히려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실력의 자신이 있기에 저런 반응을 하는 것이다.
“후후, 실례했소. 제국의 사이온 후작가의 지크 사이온이오.”
“나 역시 실례했소. 록스 후작가의 유렌 록스요.”
“음? 유렌 록스 자작?”
“그렇소.”
내 이름을 들은 지크 사이온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도 제대로 된 확인을 위해 눈을 켰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지크 사이온]
[특성: 염검(炎劍), 화속성강화lv4, 강검lv3, 패력의 신체]
[호감도: 18 (관심) ]
[현재 기분: 즐거움을 느끼고 있음. ]
예전에 랙커드에게 카볼의 검술서의 위치를 의뢰했을 때 나왔던 제국의 사이온 후작가가 눈앞에 있는 지크의 가문이다.
사이온의 핏줄들은 화속성 오러를 가지고 큰 파괴력을 내는 것이 특징이고, 그 중 지크는 그 힘을 많이 물려받아 강력한 염검을 사용하는 기사다.
“부상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제 괜찮은 것이오?”
“지금은 완치되었소.”
지크는 내가 다쳤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다행이오.”
다행이라는 말을 하지만, 지크의 표정은 걱정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흡사 짐승이 먹잇감을 노리는 느낌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가장 만나고 싶었던 인물을 이런 곳에서 보다니, 이게 바로 인연인 것 같소.”
“보고 싶었다고 하셨소?”
“그렇소.”
지크는 정말 기분이 좋은지 주변을 둘러보며 확짝 웃고 있었다.
“유렌 록스라는 이름은 샤크라이 킹을 잡았다는 것에 처음 들어보았소. 당시엔 내가 잡고 싶었던 몬스터라 아쉽다는 생각에서 끝났었지.”
샤크라이 킹이면 상당히 오래전이다. 지크는 그때부터 내 이름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에도 당신의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오더군. 씨 서펜트를 잡았다는 소식도 들었고, 그 이전에는 오크 투사, 얼마 전에는 리자드맨 킹에다가 최근엔 리벨리온을 홀로 잡았다고 들었소.”
지크는 내가 잡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지크가 주인공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흡사 내 팬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후후...”
지켜보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크는 당장 한 판 붙자고 할 것 같은 기세를 뿜어대고 있었다.
“내게 관심이 많은 것 같소.”
“말하지 않았소. 가장 보고 싶었다고.”
“대장님.”
지크와 내가 서로의 눈을 노려보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 갈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다가왔다.
“이제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알겠다. 먼저 입구 앞에 가있도록.”
“예.”
지크의 지시를 받고 돌아가는 갈색 갑옷의 기사에게 살짝 시선을 주었다.
역시 이놈이 왔군.
이번 던전 탐사는 제국과 크라시스 왕국만의 경쟁이 아니었다. 세피로스의 검사 중 가장 패도적이고, 파괴적인 검을 사용하는 흑검이 제국의 탐사대에 잠입해 있었다.
흑검은 던전의 보상을 자신이 챙기고, 크라시스와 제국의 사이까지 갈라놓기 위해 잠입해 있는 상태였고, 난 그것을 막고 보상을 챙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비비드 사냥개의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난 바로 흑검에게 비비드 사냥개의 설정을 사용했다.
“이오칼은 오지 않는다고 했소. 던전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쳤으면 좋겠소.”
“물론이오.”
지크는 그 말을 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몇 번 손을 흔들던 지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탐사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럼 계획대로 움직여도 되겠군.”
던전 안의 길은 두 개다. 먼저 엘프의 방에 가서 보상을 얻은 다음 기사의 방으로 향해서 흑검을 막고 보상을 챙기면 될 것 같다.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모든 보물들을 내가 챙기고, 흑검까지 처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유렌님. 제국이 입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가자.”
“예!”
제국의 기사들은 앞에 있는 입구를 지키는 석상들을 둔기로 때려 부수고 있었다.
석상들은 골렘 처럼 몸속에 핵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라, 검보다는 저렇게 타격범위가 넓은 무기로 부수는 것이 효과적이다. 제국은 정찰을 하며 석상의 공략을 생각한 모양이다.
“저희도 참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크라이드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대며 입을 열었다.
“아냐. 가만히 있어.”
“예?”
“알아서 길 터주는데 뭐 하러 힘을 빼. 다 잡으면 바로 따라 들어가면 돼.”
“역시 영주님이십니다!”
크라이드는 어벙한 표정을 지었고, 브리카는 박수를 치며 내 행동에 동의했다.
“흠...”
석상을 모두 잡은 지크는 뒤를 돌아서 내게 강렬한 눈빛을 쏘아낸 후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 따라오라는 도발 같았다.
제국의 탐사대가 모두 들어가는 것을 본 후에 우리도 입구 앞에 섰다. 입구에서 새어나오는 빛에 안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장소가 변할 거다. 모두 긴장을 풀지 말도록.”
“예!”
모두에게 주의를 준 후 먼저 입구에 들어갔다.
후우웅.
땅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며, 몸이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경계를 하려는 순간 발이 땅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린 거대한 방의 양 옆으로 수십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기둥 앞엔 병사들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은은한 빛이 석상들의 입체감을 올려주고 있었지만, 석상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 석상들은 평범한 석상일 뿐이었다.
방의 정면엔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왼쪽에는 검을 들고 있는 기사의 석상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활을 들고 있는 궁사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음...”
지크와 제국의 탐사대는 그 앞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서 나를 보고 질문했다.
“유렌 자작은 어디로 가시겠소?”
“난 기사의 석상이 있는 쪽으로 갈 것이오.”
“그렇소?”
쾅!
지크가 도발적인 미소를 짓고서 바로 기사의 석상이 있는 문을 발로 차서 열어버렸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시오. 후후.”
그 말을 남기 지크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고, 그의 뒤에 있던 탐사대들이 나를 노려보다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자식들이! 감히 유렌님을 노려보다니, 목을 따버릴까요?”
“브리카. 그런 상스러운 말을 자제해라! 유렌님. 저희도 빨리 들어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크라이드가 브리카를 자제시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을 딸 필요도 없고, 저기로 갈 필요 없어.”
“네?”
“우린 궁수의 석상이 있는 곳으로 간다.”
“설마 도망치시는 겁니까?”
브리카가 기사의 석상이 있는 곳의 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도망? 뭔 헛소리야.”
“예? 그게 아니시라면...”
“우리는 궁수의 길에 먼저 가서 그곳의 보상을 챙긴 뒤 제국이 열심히 뚫어놓은 기사의 길을 편하게 걸어가서 마지막에 보상을 차지하면 되다. 제국에겐 이 던전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넘겨줄 생각이 없어.”
“역시 유렌님이십니다!”
“유렌 자작님. 제국 쪽이 더 빠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크 사이온은 거의 마스터에 도달한 검사로 알고 있습니다.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카론이 걱정된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사실을 말한 겁니다.”
“사실이라면...”
“저희에겐 최고의 길잡이가 있습니다. 녀석만 따라가면 이런 던전 탐색은 순식간에 끝납니다.”
그 말을 하며 주머니에서 놀고 있던 빽빽이를 빼냈다.
“빽?”
“오랜만에 밥값 할 시간이다. 빽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