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석상의 던전 (131/241)

석상의 던전

“답답하군.” 

크라시스 왕국의 국왕 에거시드 브라이어드는 오래간만에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항상 시원하고 빠른 결정을 내리는 에거시드지만, 이번 일 만큼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왕좌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제국에선 뭐라 하던가?” 

“저희나 이오칼이 뭘 하든 상관없이 석상의 던전에 들어갈 거라고 했습니다. 탐사대를 보낼 거면 보내라는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왕좌아래에서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들려왔다. 말을 한 사람은 애거시드의 보좌관인 카이리오 자작이었다. 

“여전히 제멋대로인 놈들이군.” 

“제국은 항상 그래왔죠.” 

“하필이면 그런 위치에 던전이 생겨서 고민을 하게 만드는 지. 버릴 수도 없고, 먹기도 애매하고.” 

며칠 전 크라시스 왕국과 이오칼, 제국이 연결되는 중립 지역인 에드안에 갑작스럽게 신비로운 건물이 생겨났다. 

그 건물을 가장 먼저 발견한 용병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석상들을 피해 건물 주변을 탐색한 뒤 그 건물이 평범한 건물이 아니라, 던전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용병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던전을 탐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에드안 지역에 닿아있는 세 나라 전부에게 던전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팔았다. 

정보를 얻은 크라시스 왕국과 이오칼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제국이 먼저 자신들이 던전에 들어가겠다고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제국에서 누구를 보내 올 거라 생각하는가.” 

“마스터를 보낼 수도 있고, 마스터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사이온 후작가의 지크를 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에게 유렌 자작이 있다면 제국엔 지크가 있다는 소리가 있으니까요.” 

“역시 제국은 우릴 도발하고 있는 거로군.” 

“네. 확실합니다.” 

카이리오 자작은 국왕의 말에 동의를 하며 추가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제국은 자신들은 무슨 짓을 해서든 던전에 들어갈 테니, 올 테면 오라는 식으로 도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왕국의 탐사대가 던전에 들어간다면 몬스터나 함정이 아니라, 제국기사들이 가장 큰 위협이 될 겁니다.” 

“어렵군. 그렇다고 에드온에 생겨난 던전을 그냥 넘겨 줄 수도 없고. 그곳에서 뭐가 나올지도 알 수가 없으니.” 

“제국은 던전의 보물을 챙기며, 그곳에 들어오는 우리의 탐사대나 이오칼의 탐사대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거기다 혹시라도 제국의 탐사대가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희에게 책임을 물을 지도 모릅니다.” 

“음...” 

국왕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카이리오 자작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열 받는데, 미친척하고 크릭스 후작을 보내볼까?” 

“폐하. 그건...” 

국왕의 말에 카이리오가 진정하라는 듯 국왕을 불렀다. 국왕이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농담일세.” 

크릭스 후작은 근위기사단장이자, 크라시스 왕국의 유일한 마스터다. 

제대로 파악되지도 않은 던전에 그를 보냈다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크라시스 왕국은 그 날로 큰 위기를 맞게 될 것 이다. 

“제국 기사 지크 사이온이 유렌과 비슷한 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유렌이 정상이었다면 그를 보내면 좋았을 것을.” 

“유렌 자작이 만전의 상태라고 해도 보내면 안 됩니다. 그는 마스터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인재입니다.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아니, 유렌은 좀 달라. 그는 어떤 일에서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네. 왠지 유렌이 이 일을 해결 해 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렇지만...” 

국왕과 카이리오가 던전과 유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문 앞에 있던 서기관이 손을 들어올렸다. 

“무슨 일인가?” 

“일왕자가 급한 일이 있다면서 알현을 신청하였습니다.” 

“급한 일?” 

“전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들어오라 말하게.” 

“예.” 

서기관이 문을 몇 번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일왕자 그웬이 들어왔다. 그는 국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왕좌 앞으로 향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냐?” 

국왕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리며, 일왕자를 가까이 불렀다. 

“유렌 자작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 유렌은 지금 회복 중이지 않은가?” 

“얼마 전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들은 소식 중 유일하게 기분 좋은 소식이군. 그 편지가 내게 온 건가?” 

“그렇습니다.” 

일왕자는 품에서 편지를 꺼낸 뒤 왕좌에 앉은 국왕에게 다가갔다. 

“유렌과 꽤나 친해진 모양이구나.” 

“예. 가끔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그를 절대 실망시키지 말거라. 네게 아니, 이 나라의 큰 별이 될 아이이니.” 

“물론 알고 있습니다. 여기 그의 편지가 있습니다.” 

국왕은 왕자에게 받은 봉투를 뜯어서 읽기 시작했다. 몇 줄 읽지도 않은 국왕의 눈이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전부 다 읽은 국왕은 그 편지를 카이리오 자작에게 넘겨주었다. 

“음...” 

카이리오 자작은 편지를 읽고 나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국왕을 쳐다보았다. 국왕이 결심한 듯 카이리오 자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유렌 록스 자작을 던전 탐사대의 대장으로 임명한다. 그가 원하는 모든 지원을 해주도록.” 

“명을 받듭니다.” 

** 

“편지는 갔을 테고.” 

페루에게 석상의 던전에 관한 소식을 듣자마자, 일왕자에게 연락을 해서 국왕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일왕자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다고 했으니, 편지는 바로 국왕에게 전해질 것이다. 

편지에 적혀있는 것은 간단했다. 석상의 던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과 왕국의 명예를 위해 던전 탐사에 참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국왕은 제국의 행동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테니, 내 편지를 보고 바로 나를 탐사대의 대장 자리에 임명했을 것이다. 

“그럼 준비를 좀 해야겠네. 페루.” 

“예. 자작님.” 

“로디엔은 어디 있지?” 

“당연히 도박장에 계십니다.” 

“당연히 라니, 요즘 거기서 나오질 않는군.” 

마나석을 판매한 돈과 국왕과 록스 후작에게 지원받은 돈과 인력, 다른 영지의 지원으로 가이린의 재건은 이미 끝났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갔고, 로디엔은 정식 허가를 받은 도박장에서 살고 있었다. 오죽하면 페루가 당연히 도박장에 있다는 말을 하겠는가. 

“도박장에 다녀올게.” 

“모시겠습니다.” 

“됐어. 파이란 일이나 도와줘.” 

“알겠습니다.” 

이번 던전에서는 로디엔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의 능력이라기보다는 그녀 종족의 힘이긴 하지만. 

영주 성을 나와서 마을로 향했다. 평화로운 마을을 보고 있으니, 슬로스가 쳐들어왔던 일이 꿈만 같았다. 

“이 시기에 슬로스가 죽다니, 내가 알던 세계와는 정말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군.” 

“어? 영주님!” 

“영주님이시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영주성 앞에 있던 주민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내게 무릎을 꿇었다. 

슬로스와의 전투 이후 영지민들은 나를 신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심어린 찬양을 보내고 있었다. 

“괜찮으니, 모두 일어나시오.” 

“감사합니다!” 

“영주님! 감사합니다.” 

그들의 인사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이 몰리면 귀찮아 질 것 같아서 칼의 검은쥐를 사용해서 내 존재감과 기척을 죽인 채로 도박장으로 향했다. 

“도박을 즐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네.” 

정규 허가 도박장의 배율은 낮았기 때문에 돈보다는 게임자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도박장이 북적이고 있었다. 

“아악! 삼 땡으로 지다니!” 

“하하!” 

“흐흐!” 

안쪽에 있는 섰다 테이블에서 로디엔의 절규어린 목소리와 다른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듣기로는 하루 종일 해도 이기는 일이 거의 없다는데 방금도 진 모양이다. 

조용히 걸음을 옮겨서 로디엔의 뒤에 섰다. 창조주의 눈으로 모두의 패를 보니, 로디엔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패자체가 낮아서 콜을 부르지 않고 죽을 거 같았다. 

‘질러요.’ 

로디엔에게 전음을 보내자, 그녀가 깜짝 놀라서 토끼눈을 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로디엔이 은신상태의 나를 겨우 알아보고 소리를 내려고 할 때 손가락을 입에 대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판을 바라보았다. 

“빨리 결정해. 죽을 거야 말거야.” 

“쫄리면 죽으셔야지. 호구왕 누님.” 

“안 죽어. 자식들아!” 

로디엔이 테이블을 쿵 치며 자신의 모든 칩을 올려놓았다. 내 말을 믿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럼 패를 열겠습니다.” 

패가 열리고, 다섯 명 모두가 참여한 나름 큰 판에서 로디엔이 승리했다. 그녀가 승리한 것을 확인하고, 도박장 밖에가서 그녀를 기다렸다. 

“우와!” 

“호구왕이 이겼어!” 

“로디엔이? 웬일이래?” 

“후후후!” 

로디엔의 의외의 승리에 도박장의 모든 사람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기분 좋게 사람들을 비웃어주고 칩을 챙겼다. 

“어? 호구왕 어디가?” 

“따고 배짱이 어디 있어요. 누님!” 

“미안하지만, 데이트가 있거든.” 

“데이트?” 

데이트라는 말에 판에 있던 사람들이 더욱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다. 

“기다렸어요?” 

“아뇨.”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활짝 웃고 있는 로디엔이 나왔다.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에요?” 

“네.” 

“어어?” 

로디엔은 본인이 물어봐놓고 내가 네라고 대답하자, 깜짝 놀라 토끼눈을 한 채 나를 쳐다보았다. 

“농담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번에 로디엔님과 같이 움직일 일이 생겨서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일이요?” 

“네.전에 다음에 움직일 땐 같이 가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그랬죠!” 

로디엔은 도박에서 이긴 것만큼 기쁜지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영주성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번 일을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번에 에드안 지역에 던전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을 탐사하는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던전이요?” 

“네. 누구도 탐색한 적 없는 새롭게 생긴 던전입니다.” 

“제가 모험을 정말 좋아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던전이었어요!” 

“다행이네요. 다만 생각보다 빠르게 출발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성으로 돌아가는 즉시 준비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어요!” 

로디엔은 새로운 것을 즐기고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던전에 간다는 것에 굉장히 기뻐하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여, 영주님...” 

나도 준비를 위해 집무실에 들어가니, 페루가 덜덜 떨며 편지하나를 건네주었다. 

“갑자기 왕실 마법사가 나타나서 이 편지를 줬는데, 폐, 폐하의 인장이...” 

“그래?” 

국왕에게서 답장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편지를 뜯어서 안의 내용을 살펴보니, 던전 탐사의 대한 전권을 내게 위임해 주고,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적혀 있었다. 

“예상대로 됐네. 역시 시원시원한 분이라니까.”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준다니, 국왕의 대답은 기대이상이었다. 

“딱히 필요는 없지만.” 

사실 제국에서 누가 오고, 던전이 어떤 곳인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나와 로디엔만 가도 되지만, 다른 기사들의 경험도 살려줄 겸 아린과 크라이드 브리카를 데려갈 생각이다. 

포메라는 대놓고 쓸 수 없으니, 마법사의 지원만 받으면 될 것 같았다. 

“페루. 아린과 크라이드, 브리카를 불러와.” 

“알겠습니다.” 

기사들을 불러 던전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이틀 뒤 출발 할 테니, 단단히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여유를 주고 싶지만, 제국의 탐사대가 곧 던전 앞에 도착 할 테니, 시간이 많지 않았다. 

** 

이틀 뒤 아침 성문 앞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마탑을 향해 움직였다. 모두가 던전은 처음이기 때문인지 기대감과 긴장이 모두 담긴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영주님. 던전에 가는데 마법사는 없어도 되겠습니까?” 

“금탑의 마법사가 지원나오기로 되어 있어. 마탑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크라이드는 불안감이 조금 가셨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트레져 헌터는요? 던전에 꼭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고 하던데요.” 

트레져헌터는 던전이나 유적에서 보물을 찾는 직업이다. 함정 파악과 길을 찾는데 능숙해서 던전이나 유적 탐사에는 필수적인 직업이지만, 우리에겐 필요가 없다. 

그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가 있으니까. 

“빽!” 

빽빽이가 주머니에서 튀어나와 자신만 믿으라는 듯 허공을 한 바퀴 돌고 크라이드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빽빽이가 있으니, 필요 없어.” 

“예?” 

“빽빽이요?” 

크라이드와 브리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와 빽빽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 그녀석이 길을 무지하게 잘 찾거든.” 

“어어...” 

빽빽이의 길잡이는 그 어떤 트레져헌터의 스킬보다 위에 있는 특성이다. 녀석만 믿고 있으면 길은 고속도로처럼 뚫릴 것이다. 

“여긴...” 

이들과 간단한 대화를 하며 길을 걷다가 잠시 멈춰서 바닥을 보았다. 

“그곳이네요.” 

“그래.” 

아린이 내 옆으로 와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와 아린이 멈춰선 곳은 슬로스가 죽어서 녹아내렸던 곳이다. 당시에 거미줄처럼 갈라졌던 대지는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영주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다. 가자.” 

슬로스와의 전투, 당천위의 강림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다시 걸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땅 밑에서 광대한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화아악! 

그 거대한 무언가는 순식간에 땅에서 튀어나와 황홀할 정도의 보랏빛이 내뿜었다. 

“무슨!” 

보랏빛은 자석에 당겨지듯 순식간에 내 오른손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내 손에 파고들어온 빛은 예상과는 달리 태양 같은 따스함을 주더니, 내 몸속에서 녹아 사라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손바닥만 보고 있을 때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름을 잃은 자’의 파편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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